• 약자의 무기 '기억'을 위해 역전의 용사 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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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04일 10: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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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현재 해결해야할 고통스런 현실들도 많은데 과거의 일까지 끄집어내서 기억하고 기념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노동자들이 최초로 가두정치 투쟁에 나선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는 1986년 5월3일 인천투쟁. 인천 시민회관 앞에서 벌어졌던 그날의 시위를 기념하기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발제를 맡은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는 “(사회적) 약자의 무기는 기억밖에 없다”며 이 같은 질문에 답했다.

    3일「인천 5. 3 민주화운동 기념대토론회」가 ‘5.3에서 미래로’라는 주제로 인천종합문화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는 그날 ‘역전의 용사’들이 토론자로 대거 참여해, 벌써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은 토론회였다. 

    당시에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수괴’로 지목되어 대대적인 수배를 받았던 인사들이 이제는 다수가 ‘고위층 인사’가 되어 토론에 참여했다. 20년 전 ‘수괴’가 오늘 국회의원이 돼 있는 변화만큼 우리 사회는 변화하고 발전했는가에 대한 성찰이 이날 토론회를 관통하는 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발제자 조현연 교수는 “왜곡되고 조작된 기억의 정치를 통해 아직도 사태로 불리고 있는 5월3일의 인천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는 화두를 던졌다.

       
      ⓒ심유정

    ‘희한한 폭발’, ‘운동권 박람회’ – 87년 6월항쟁의 맹아 그러나 …

    전두환 독재정권에 당시 민중진영의 전면적인 거부였으며 동시에 보수정당과 분명이 선을 그었던, 뿐만아니라 운동세력 내 노선의 갈등 전면적으로 표출됐던 5·3 민주화운동. 이같은 양상에 대해 이날 토론회를 진행한 최원식 교수는 ‘희한한 폭발’이라고 규정했다.

    조 교수는 “1986년 5·3 인천투쟁은 민주변혁과 인간해방을 향한 한판 굿”이었다며 한국의 정당정치와 진보운동의 과제에 초점을 맞춰 ‘위기의 한국사회 민주주의’를 분석하는 발제를 했다.

    그는 서울과 인천의 운동세력이 총집결해 각 단체 명의로 40여종의 유인물이 배포됐던 이날 유인물들의 골자는 “반미, 반독재, 보수대연합 성토”였다며 “개헌투쟁과정에서 연대했던 신민당을 기회주의 집단으로 규정 ‘신민당은 개헌싸움의 주체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양상을 보인데 대해 조교수는 “① 그동안 일정한 정치적 연대관계를 보여 오던 보수야당과 민중운동단체들의 시국관과 정치적 지향이 명백하게 다르다는 사실이 그 즈음 명확히 드러났고, ② 그동안 꾸준히 성장해 온 민중운동 세력의 역량을 배경으로 한 ‘민중항쟁의 결정적 계기’가 도래했다는 인식이 있었고 ③ 당시 노동자가 40만을 넘는 인천지역의 특수성이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80년 광주와 87년 6월 항쟁 사이 최대의 가두투쟁이었던 5. 3투쟁이 갖는 의의에 대해 “민주변혁운동이 보수야당세력에 대해 차별성의 획을 분명히 그어낸 민주화운동과 민주변혁투쟁의 핵심주체이자 독자적인 실체로서 스스로를 드러낸 자기 주체선언”이라고 평가했다.

    “노동자들이 최초로 가두 정치투쟁”에 나섰던 이날 투쟁을 놓고 토론자들도 87년 6월항쟁의 맹아, 혹은 교두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5· 3 직후 이적단체로 몰려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던 서노련 핵심이었던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광주민중항쟁 이후 양적 질적으로 성장한 민주화운동의 폭발과 이후 전면적인 탄압과정에서 발생한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6월 항쟁, 78월 노동자 대항쟁으로 이어졌다"고 의의를 분석했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심유정
     

    이날도 특유의 촌철살인으로 폭소를 자아낸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도 “5·3 민주화운동이 6월 항쟁의 맹아였지만 작은 붕어빵은 아닌 맹아였다”고 규정하고, “보수야당은 직선제개헌 현판식을 하려했으나 대회조차 치르지 못했고 하부에서는 훨씬 민중적인 요구가 거침없이 표현됐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당시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집행국장이었던 이우재 선생은 “5·3은 6월 항쟁의 붕어빵이 아니라 더 큰 이후 20년 동안의 맹아였다”고 해석했다. 그는 “그 이후의 역사적 과정은 신민당과의 에서 연대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그들의 ‘꼬붕’이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했다.

    반면 신민당과 분명히 선을 긋고자 했던 세력은 “자기 역량에 대한 무분별한 과대평가로 좌익맹동주의적 모습을 보여줬다”며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말자고 지적했다. 또 당시 학생이었던 열린우리당 이인영 의원은 학생운동권의 경우 “5·3과 건국대 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학생운동권은 더 많은 대중과 함께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며 그것이 6월 항쟁에서 발전적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오늘날 우리 고통의 원인은?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 ⓒ심유정
     

    한편 조현연 교수는 이후 ‘민주’정부가 연이어 들어서고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성공, 시민운동의 발전 등에도 불구하고 “87년 민주화 이후 도데체 변한 것이 무엇인지 반문하거나 전혀 실감할 수 없다”고 ‘민주화의 역설 내지는 배반’ 속에서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목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핵심으로 한 총체적인 삶의 질 약화와 ‘민주’정부에 의한 신자유주의 세계와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과 적응이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은 정치, 그 가운데서도 정당정치라고 주장했다. 우선 개혁이 실종된 참여정부를 비판하며 “헤게모니 세력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다”며 그 결과 정부여당의 사회적 지지기반 붕괴와 민심이반은 당연한 것이라고 조교수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

    이날 조교수는 민주노동당의 현주소에 대해 상당한 비중을 두고 비판했는데 진보정당 100만표시대, 원내진출 성공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줬으나 “20세기형 낡은 정파구로에 발목 잡혀 당의 성장과 진로가 가로막혔다”고 지적했다.

    20세기형 낡은 정파구도에 발목잡힌 민주노동당

    조현연 교수는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이 한계에 봉착했고 거꾸로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들어야 하는데 사회운동과 정당운동이 큰 틀로서 대안적인 국가 경영전략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며 그 틈바구니에 뉴라이트 운동, 황우석 신드롬 등 보수적 대중운동이 형성되고 있다고 환기시켰다.

    이와 관련 노회찬 의원은 노동자들이 가두 정치투쟁의 전면에 나섰고 이것이 6월 항쟁을 넘어 7, 8, 9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으나 87년 6월 항쟁의 성과 혹은 정권의 부분적 양보로 이루어진 그해 말 이뤄진 “노동법개정과 헌법개정에 노동자대투쟁의 내용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87체제의 한계’라고 주장했다. 심상정 의원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반면 열린우리당 이인영 의원은 “5․3이 우리 안에 숨어있던 부르조아 민주주의 시각과 변혁운동의 시각이 명확히 분화되던 기점이었다”며, “지금의 참여정부를 너무 신자유주의만 이야기하면 억울하다”며 “보다 변혁적인 정부로 가는데 있어 과도정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괴’가 의원이 된 만큼 오늘의 사회는 좋아졌는가?

    이날 토론회에서 ‘5·3 민주화운동’, ‘5·3 항쟁“, ‘5·3 투쟁’, ‘5·3 사태’ 등 통일되지 않은 용어를 노회찬 의원이 지적하기도 했다. 통일되지 않은 용어만큼이나 역사적 의의를 인정받지 못하고 여전히 좌경, 용공 세력의 폭력난동 쯤으로 기록돼 있는 현실의 반영일지 모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발제를 맡았던 조현연 교수나 당시 인천산업선교회 간사였던 이민우 생명평화기독연대 공동대표의 분석처럼 5.3이 노동자들이 가두정치투쟁에 나섰던 최초의 투쟁이었는데도 이날 토론회에는 당시 학생출신 노동운동가였던 현역의원이나 지식인 시민사회운동가들이 토론자로 채워졌다. 당시 노동자 대오를 책임졌던 인천지역노동자연맹 멤버였던 노동자들이 토론자에서 제외돼 아쉬움을 주었다.

    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기념사업회내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투쟁과정에서 용역경비들에게 폭력을 당하는 사진들을 들고 피켓시위를 벌여 민주화운동의 ‘계승’이나 ‘기념’과 현실의 노동문제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 씁쓸함과 아쉬움을 던져주기도 했다.

    한편 이날 ‘인천 5·3민주화운동 20주년 기념행사’로 토론회이후 ‘인천지역의 민주화운동 열사, 희생자 합동추모제’가 열렸다. 경동산업 노동자들이 집단분신이라는 극단적 저항이 있던 9월4일 해마다 합동추모제를 열었으나 올해부터는 5월3일로 옮겨 진행하기로 한 것.

     1986년 5월3일 인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군부독재 타도하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삼반(반민족, 반민주, 반민중) 정권 타도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신민당이시여! 민정당 의원 멱살만 잡지 말고, 미제국주의의 압잡이 군사파쇼정권 타도의 대열에 동참하라!”
    “삼반정권과 야합하여 이땅의 노동자, 농민, 빈민의 투쟁을 외면하고 개헌을 사리사욕적 집권놀음에 악용하는 신민당에게 민중의 이름으로 경고한다.”
    “삼반정권과 신민당의 타협을 배후조종하는 미 제국주의 몰아내자.”

    노회찬 의원이 ‘운동권 박람회’라고 표현하고 최원식 교수는 ‘희안안 폭발’이라고 표현했던 1986년 5월3일 인천 시민회관 앞.

    양김씨가 연합하여 만든 신민당은 85년 치러진 2.12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되는 돌풍을 만들었다. 이 여세를 모아 이들은 ‘직선제 개헌’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86년 3월1일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청주, 인천으로 이어지는 ‘신민당 개헌현판식’을 열기로 했다.

    한편 당시 민통련으로 대변되던 재야세력도 ‘민주헌법쟁취’ 범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헌법문제는 정국의 주요이슈로 등장 신민당과 재야가 연합한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를 3월17일 경성하기도 했다.

    3월이후 대중투쟁 열기는 고양되기 시작해서 자발적으로 신민당 현판식에 참여한 인원이 50만-70만에 달할 정도였다. 당시 광주현판식이 끝난 후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인다. 이에 운동세력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현판식에 주목하며 5월3일로 예정된 인천대회를 준비한다.

    한편 광주현판식 이후 양 김씨는 4월29일 ‘좌경, 용공, 폭력시위를 자제해 달라’는 성명을 발표, 운동세력과 선을 긋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이튿날인 4월30일은 전두환과 신민당이 회동을 하여 이른바 ‘4.30대타협’을 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5월3일 12시 인천시민회관 앞에는 수도권 일대의 ‘운동권’이 총집결해 가두시위를 벌인다. 인노련, 서노련 등의 주요인사들이 서울에서 합숙을 하고 참여했으며, 그 이전 인천 시내 곳곳에는 ‘화염병 공장’과 ‘유인물 공장’이 차려놓고 만든 화염병과 유인물이 현장에서 배포됐다.

    리어카에 앰프를 설치한 연단이 등장하고 다섯시간동안 격렬한 시위가 계속됐다. 73개 중대 1만여명의 병력에 의해 밀고 당기는 공방전이 계속되가지 밤 늦게까지 지속된 이날 시위를 전두환 정권은 ‘5·3 인천소요사태’로 불렀다. 현장에서 연행된 1백33명이 구속됐고, 50여명이 수배됐다. 서노련과 인노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됐고 양승조 인노련 의장을 비롯한 수배자 검거과정에서 이른바 ‘부천서성고문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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