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생' 말하는 민주노동당, 철학이 빈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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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5월 05일 10: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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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민주당이 소위 ‘민생법안’이라고 불리는 법 몇 개를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5월 국회가 끝나기 전에 시급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 절박성은 사실상 국회 일정보다는 정치적인 의미가 더 클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식 양당제보다는 유럽식 다당제를 더 선호하고 당이 새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역동성이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양당제와 다당제 사이에 엄청난 ‘최적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사회 구성원 중에서 소외되는 사람을 줄이고 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약간 극단적이라도 다당제가 더 좋을 것이라는 게 평소의 소신이다.

    내가 다당제를 더 좋아하는 이유

    다당제를 염두에 두면 당과 당 사이의 다양한 협력관계와 연정에 대해서 당연히 옹호하게 된다. 원래 그런 협력관계를 염두에 두고 작동하는 시스템이라서 그렇다.

    녹색의 경우에는 대표적으로 적녹연정을 이야기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때때로 백녹연정이나 심지어는 정체가 불투명해도 흑녹연정 같은 것들도 개념적으로는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다양한 연정의 가능성 때문에 대표적인 새로운 정당인 녹색당에는 가장 극좌에서 가장 극우파까지 다양하게 결합하고, 또 그래서 ‘구국의 강철대오’ 같은 단일노선을 잘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얼마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형용모순 가득한 개념을 제시했는데, 사실 조금만 유럽 논쟁사로 들어가 보면 ‘제 3의 길’이라는 80년대 중반의 멋진 개념이 결국 블레어 총리를 거치면서 ‘좌파들이 신자유주의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라는 현실로 살짝 옷을 바꾸어 입은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유럽 통합을 추진하던 세력이 우파정권이 아니다. 프랑스도 미테랑 제 2기에 유럽통합을 추진하였고, 사회당의 강건한 당론으로 유럽 통합 및 상당한 강성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했었다.

    좌파 신자유주의와 제 3의 길

    정치의 역동성이란… EU 화폐 통합할 때 TV 토론에서 사회당과 드골당이 한 편 먹고, 공산당과 르펭의 국민전선이 한 편을 먹고, 녹색당 그룹은 입장통일이 안 되어서 아예 토론에 나오지 못한 적이 있다. 공산당과 극우정당이 같이 앉아서 서로를 지지한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 이 어색한 형국은, 그러나 일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에는 종종 벌어졌다.

    현재 극우파 정당이 제 1당을 차지한 대표적 나라로서는 스위스를 거론할 수 있는데, 중도좌파와 중도우파들은 스위스가 EU에 가입해야 한다고 국제 표준에 맞추자는 것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라크에도 파병해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이라크 파병을 스위스에서 막은 건 중앙민주연합(CDC)라고 불리는 극우파 정당인데, 결국 국민투표까지 가서 극우파들이 이겨서 이라크 파병을 저지했고, 그 계기로 극우파들이 집권당은 아니라도 다당제의 전형은 스위스에서 제 1당이 되었다.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과 연합도, 한나라당과 정책 공조도 가능

    나는 개인적으로 사안에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연합을 해도 괜찮고, 심지어는 한나라당과도 정책 공조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만약 이명박 혹은 그 어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다음 대선에서 새만금을 열어주겠다고 공약을 내걸고 나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절차와 생각으로 많은 환경단체들도 정책투표를 하게 될 것이다. 원래 정책이란 것은 그런 것이다.

    양당제에서는 쾌도난마처럼 두 당의 입장이 확연하게 갈리지만 다당제에서는 정책을 중심으로 수많은 합종연횡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안에서 정당이나 정치그룹이 원래의 입장, 즉 ‘position’을 민주주의적 절차 내에서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다당제 정치의 묘미라면 묘미인 셈이다.

    이런 사유들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정책 공조를 한다고 해서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 이유로 열린우리당 2중대이니 혹은 보수적 속내를 드러냈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원래의 소신이다.

    공조는 좋은데 ‘민생 법안’이란 말은 생각 좀 할 필요 있다

    그렇지만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협조의 명분으로 걸었던 ‘민생 법안’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민생이라는 말은 총리실에서 쓰던 용어인데, 민생대책이라는 말로 깡패들 잡아가고, 불법 다단계 관리하는 일 그리고 요즘 살판 난 듯이 TV 광고까지 해대는 고리대금업 같은 것들을 총리실에서 약간 특별 관리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건 추측이지만 이 민생이라는 단어가 현 정부의 이데올로기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아마 국무조정실장이 대통령 인수위원회를 총괄하게 된 정부의 태생적 과정 사이에 어떤 화학적 결합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나라 행정부에서 전통적인 민생은 원래 깡패들하고 싸우는 것을 의미하고, 현행 법규 체계에서 잘 다루기 어려운 신종 범죄나 유사 범죄, 예를 들면 불법 다단계 같이 기존의 체계에서 1차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것들을 의미한다.

    이 기준대로라면 카지노 사업 같은 것도 민생정책에 들어가야 하기는 하는데, 현재 소위 좌파라는 청와대 386들이 근본적으로 도덕성과는 약간 담쌓은 집단들이기 때문에 카지노 만들어주는 것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면서 그걸 ‘균형발전’이라고 포장하면서 법까지 만들어준 사람이니까 약간 방향이 흔들리기는 한다. 어쨌든 노무현 정부에서 민생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론은 DJ 시절의 ‘사회 안전망’과 비슷하게 사용되는 측면이 있다.

    ‘민생 법안’ 용어 열린우리당이 써먹는 건 이해되지만

    거시경제가 안정되면 개인들도 나아질 것이라는 점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성장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고, 그런 면에서는 경제 기조 혹은 경제에 대한 국가적 철학 같은 것은 박정희 시대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크게 과언은 아니다.

    이런 흐름에서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은 ‘민생법안’이라는 말을 써도 크게 상관할 것은 없다. 어차피 성장 이데올로기 위에 서 있는 근대화담론의 연장선 속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자 문화권 내에서 ‘민생’이라는 단어는 원래 중국 국민당의 이데올로그인 쑨원의 신해혁명 때 나온 개념이다. 민족, 민권, 민생이라는 그 유명한 삼민주의가 원래 태생이다. 열린우리당이 내세운 여러 가지 말들을 일일이 분석하기는 어려운 일 같아 보여도, 그냥 아시아적 가치를 공유하는 중국의 국민당이 꿈으로 여겼던 근대화 시민혁명의 일환이라는 작업 가설을 놓고 보면 좀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다.

    중국 근대사 역사를 놓고 공부를 해보면 열린우리당은 국민당 시절의 담론과 비슷한 말들을 상당히 많이 주장한다. 민족 얘기 나오면 약간 오버액션을 취하고, 민권이라는 말은 인권으로 치환하면 사실 인권 분야에 대해서는 열린우리당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뭔가 하기는 하려고 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민생… 그야말로 아시아적 가치 위에 서 있는 케인즈 우파 정도에서 생각하는 민생 이데올로기는 대만으로 쫓겨난 국민당의 마지막 순간들을 보는 듯한 아스러운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한 가지를 추가한 것은 일종의 절차주의인데, 자신도 잘 못 지키기는 하지만, 어쨌든 민주주의의 절차주의를 지키겠다고 생각하면서 행정 시스템을 효율화하는 것이 개혁이라고 이해하면 대체적으로 열린우리당의 입장들은 잘 풀린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민생 법안’ 말하면 어색하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민생법안’이라는 말은 뭔가 좀 어색해 보인다. 물론 말꼬리 물고 들어가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민중법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입으로 나올 때에는 보이기에 부드러워 보이라고 ‘민생법안’이라고 발언하는, 일종의 언어학에서 말하는 ‘코노테이션(connotation)의 치환’ 같은 것이 발생하는 것 같아 보인다.

    민중은 무섭고, 시민은 좀 아닌 것 같고, 민생은 더 부드러워 보이니까 편의상 쓰는 것이라고 좋게 이해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이 민생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 하긴 비정규직 법안을 민생이라 부르면 어떻고 민중이라 부르면 어떻고, 심지어 복지라고 부르면 또 어떠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는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당 중에서 민생이 삼민주의의 이데올로기이고, 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줄 만한 정당은 현재로서는 민주노동당 밖에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자신이 국회 내에서 할 역할을 ‘민생법안 통과’라고 규정하면 약간 서글퍼 보이기는 한다.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는 중국 공산당 관련된 초기 책들을 내가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가?

    민주노동당 철학 부재 얘기해주는 것 아닌가

    여담이지만 경제학에는 ‘민생’이라는 개념이 없다. 사회계약론에 입각한 시민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 후생’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좌파든 우파든 매우 강력한 국가주의 모델 속에서 사유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의 삶’과 민생이라는 단어가 다를 바가 없지만, 이렇게 풀어놓고 얘기하면 민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얼마나 이데올로기적인가라는 게 조금은 명확해진다.

    정책협조는 한나라당과 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 이유가 ‘민생법안’이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철학 부재를 느끼게 된다. 열린우리당은 국민당과 비교해서 다를 게 없는 이데올로기를 계승하니까 민생이라는 말을 써도 좋은데, 민주노동당도 민생법안이라고 그러고 있으면 정책만 제시를 못하는 게 아니라 철학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하긴…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는 대신에 노란 스카프가 국토를 뒤덮던 지난 대선을 생각해보면 열린우리당이 오히려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을 통합 계승한 것이라고 억지로 우길 사람들이 있기도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민주노동당은 누구를 계승하거나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국회의 ‘다윗’이라고 하지만 다윗 정신을 계승하고 싶은 건 아닐 것 같고…

    앞으로도 민생이라는 단어는 계속해서 미디어에서 확대재생산할 것이지만 이게 쑨원의 삼민주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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