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명의 청춘 남녀, 내외법을 조롱하다.
    [역사의 한 페이지4] 드러난 풍습과 그 이면의 풍습
        2018년 08월 02일 10: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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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

    조원과 숙부인의 대화

    #16. 산책로처럼 긴 담장을 끼고 이어진 후원에서 내당에 이르는 길.

    숙부인과 은실이 걸어오고 있고 그 뒤로 조원이 소리치며 뛰어온다.

    조원 : 부인! (숙부인이 외면하며 걸어가자 앞을 가로막고) 잠시만! 이 차합을 두고 가셨소이다.
    숙부인 : (차합을 받지 않은 채 망설이며) 은실아, 호의는 잘 알겠사오니 받은바 진배없다고 여쭈어라.
    은실 : 나으리, 호의는 잘 알겠사오니…
    조원 : (은실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맞추려 애쓰며) 아니, 사람이 면전에 있는데 어찌 나도 안보고 말씀을 전한다 말이시오.
    숙부인 : (여전히 흔들림 없이) 남녀가 유별한데 발도 치지 않고 어찌 대면할 수 있겠냐고 전하거라.
    은실 : 나으리, 남녀가 유별하니…
    조원 : (말을 끊으며) 부인, 밤마다 집회에서 숱한 남정네들 앞에서 그토록 온화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시면서, 어찌 백주 대낮에 호의로 대화하려는 제게는 몸종을 사이에 두고 멀리하려 하십니까?
    숙부인 : 점잖으신 분이 어찌 남의 처자 행적을 캐고 다니는지 심히 불편하다고 여쭈어라!
    은실 : 나으리, 점잖으신 분이…
    조원 : 어허, 시끄럽구나. 넌 좀 저리 가 있거라!

    [사진]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포스터. 조원역은 배용준이, 숙부인역은 전도연이 맡았다.

    조선시대 내외법(內外法)에 의한 대화를 잘 보여주는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한 장면이다. 내외법이란 모르는 남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을 피하는 예법을 말한다. 원래 ‘내외(內外)’의 의미가 단순히 남녀유별의 관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남녀의 접촉을 막는 강제적 조치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조선 시대의 남녀는 어릴 때부터 엄격히 구분되어 길러졌다.

    이런 내외법은 남녀가 대화할 때에도 적용되었는데 남녀는 직접적으로 말을 섞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 영화 장면처럼 노비와 같은 중간 매개인을 통해 대화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중간 매개자가 없는 경우에도 마치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다. 즉 남녀 둘이 대화하면서 마치 셋이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이런 식이다.

    남: 이리 오너라. 박진사 계시냐고 아뢰어라.
    여: 아니 계시다고 여쭈어라.
    남: 어디 가셨나고 아뢰어라.
    여: 밤나무골 향교에 용무 있어서 가셨다고 여쭈어라.

    재미있지 않은가? 이런 예법 때문에 ‘팔뚝집’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팔뚝집은 남자 손님과 직접 대면하여 술을 파는 것이 내외법에 맞지 않다하여 주모가 중문을 사이에 두고 손님에게 음식을 담은 소반을 팔뚝을 뻗쳐 밖으로 내밀면 손님들이 그것을 받아서 먹는 술집이다. 일명 ‘내외술집’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런 집에서는 주모와 손님이 이렇게 얼굴을 보지 않고 술을 팔고 사고 했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남녀유별의 관념은 조선시대 가옥 구조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선후기 양반의 가옥구조가 그러한데 이런 집들을 보면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와 남성들의 생활 공간인 사랑채를 따로 만들었다. 같은 부부라도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별도의 공간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용무’가 있을 때만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나있는 좁은 쪽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두 공간을 이동했다. 부부가 한방에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지금의 가정생활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오늘 날 어느 부부가 각기 방을 쓰면서 따로 일상생활을 하고, 필요할 때만 가끔 만나 용무를 본다고 가정해보라. 이 부부는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서로의 사생활을 철저히 존중해주는 아주 드문 경우이거나 아니면 부부 사이가 아주 나쁜 경우이거나.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양반집의 풍속은 부부가 각방을 쓰는 것이 상식이었고, 같은 방에서 늘 생활한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이렇게 상식은 시대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다.

    [사진] 우리나라 초기 교회도 내외법을 존중하여 ㄱ자 모양으로 설계하였다. 남녀의 공간을 분리한 것이다. 1908년 세워진 김제의 금산교회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은 ㄱ자 모양을 보여주는 금산교회의 외부모습이고, 오른쪽은 목사 예배석을 기준으로 남녀 공간이 분리된 금산교회의 내부 모습이다. (인터넷 사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실제….

    이렇게 남녀를 엄격히 구별하고 또 남녀를 차별하는 것은 조선을 지배한 사상인 유교와 관련이 깊다. 유교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남존여비의 입장을 취한다. 유교가 남녀를 이해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의 상식과는 많이 다르다. 과학적으로 보자면 우리들 각자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반반씩 생명 정보를 선물 받았다. 우리들 생명을 만들어 주심에 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경중을 논할 수 없다.

    그런데 유교적 관점에서는 생명의 근원은 백프로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단순히 ‘인큐베이터’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표현 양해하시라. 유교적 입장에 따른 비유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각에서는 아버지는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고, 어머니는 나를 양육하신 분이시다. 부모의 공덕을 찬양할 때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네”라는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쓰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모 두 분은 모두 효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맞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이렇게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녀 차별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유교적 사유 방식에 따라 조선 사회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표되는 남녀유별의 질서가 서서히 확립되어 갔던 것이다. 이런 예법과 질서는 양반 지배층들부터 실천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점차 민중들의 삶 속에도 스며들어 결국에는 조선 사회 전체 공공의 도덕률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습속의 자기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은 조선시대 이전에도 남녀유별이 확고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12세기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사람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다소 당혹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잡속(雜俗)편에 실린 글을 보자.

    “옛 역사서에 고려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보면 풍속이 모두 깨끗하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러하다. 고려인은 매번 중국인이 때가 끼여 더러운 것을 비웃는다. 그런 이유는 고려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먼저 목욕하고 외출을 하며 여름에는 매일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냇물의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녀 구분 없이 모두 옷과 모자를 시내 언덕에 올려놓고 물이 흐르는 곳에서 벌거벗고 하는데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진] 서긍이 쓴 [고려도경]의 잡속편. 남녀가 구분 없이 옷 벗고 목욕해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진] 일본도 혼욕문화였다. 에도시대 남녀가 같이 목욕하는 것을 본 미국인이 그린 그림이다. (사진출처: http://kiss7.tistory.com/615)

    [사진] 유럽에서도 남녀가 같이 사우나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lsgdoo9/220656925313)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려인들이 목욕을 자주해 깨끗하다는 점과 남녀 구별 없이 옷 벗고 같이 혼욕(混浴)한다는 것이다. 지금 유럽의 사우나에서 자연스럽게 남녀가 같이 옷 벗고 사우나를 하듯이 고려인들에게는 남녀가 같이 시냇물에서 혼욕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그런 사회였다. 이것은 분명 유교에서 강조하는 남녀칠세부동석과는 다른 질서였다. 가족 내에서도 재산분배나 제사의 봉양에 있어서 남녀 평등성이 강했다는 것도 이미 사회사(社會史)에서는 상식이 되어있지 않은가?

    이런 남녀 평등성이 강한 가족 제도는 유교적 사회 질서가 확립되기 이전 우리 역사의 오랜 관습이었다. 이런 관습의 형성에는 불교의 영향도 일부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남자와 여자를 수직적 상하 관계로 바라보는 유교적 관점과 달리 불교는 남녀를 상대적으로 평등하게 본다. 어떤 사람이 지금 남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전생에는 여자였을 수도 있으며, 또 그가 죽은 후에는 다시 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거대한 윤회의 수레바퀴 위에서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 것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그저 잠시의 우연일 뿐이다. 현재 입고 있는 ‘성별’이라는 육신의 옷이 영원한 것이 아니며, 다음 생에는 또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거북이와 악어의 성별이 정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거북이와 악어는 특이하게 알이 부화할 때의 온도에 따라 성별이 나누어진다고 한다. 악어의 경우 알의 상태에서 주위 온도가 30도 미만일 경우에는 모두 암컷으로 태어나고, 34도 이상의 온도가 유지될 때에는 모두 수컷으로 태어난다. 30∼34도 사이가 유지되면 암컷과 수컷 모두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거북이의 경우는 모래의 온도가 25도 이하인 경우에는 모두 수컷, 33도 이상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되니, 성별이 악어와는 반대이다. 역시 25도에서 33도 사이가 되면 두 성별이 다 태어난다. 거북이와 악어의 암컷 수컷의 결정이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처럼 불교에서도 남녀 성별도 그런 정도의 차이였다.

    드러난 풍습 이면의 드러나지 않은 풍습

    이렇게 길게 남녀관계나 남녀유별의 문제를 따지는 이유는 내가 수집한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작년에 수집한 사진으로 남녀가 어울려 같이 강에서 노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시기는 60년대 아니면 70년대 정도로 추정된다. 이 사진을 이번 글의 주제로 삼은 것은 지난 세 차례의 글이 전쟁과 관련된 무거운 주제였던지라 분위기를 바꿔봐야겠다는 뜻도 없지는 않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연일 계속되는 찜통 더위를 견디면서 문득 강에서 시원하게 물놀이하는 이 사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진] 7명의 청춘 남녀들이 강에서 어울려 물놀이하고 있는 사진이다. 그들에게 남녀 내외법이라는 규범은 저 멀리 동떨어져 존재하는 관습일 뿐이었다. 그들이 어울려 물놀이하는 장면을 다소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관습에 물든 증거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고려시대에는 저런 장면이 전혀 괴이한 일이 아니었고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을 것이다. (박건호 수집사진)

    이 사진이 무슨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는 특별한 사진은 아니다. 일상생활을 담고 있는 평범한 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남자 아이 다섯에 여자 아이 두 명이 신나게 물놀이를 하면서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같은 동리의 친구들이 물놀이 나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도회지 학생들이 놀러 와서 찍은 것일 수도 있겠다. 나이는 10대 중반의 학생들로 보인다. 중학생들로 보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나 고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등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 정도라고 보면 거의 맞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장면은 무척이나 생소하고도 신선하다. 이 ‘낯선 느낌’이 사진을 수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중국사람 서긍의 기록처럼 벌거벗고 혼욕하는 사진은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사진이다. 같은 마을 친구들이 남녀 구별 없이 어울려 노는 장면은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이렇게 같이 어울려 물놀이하는 사진은 기존 관습으로는 무척 낯설고, 공식적 사진에서 담아내지 못한 자유로움이 담겨있다. 조선시대에서 지금까지 남녀의 관계에 모두 내외만 있었겠는가? 드러나는 역사가 있는가하면 드러나지 않은 역사도 있듯이, 풍속도 드러나는 공식적인 것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 사진은 그 ‘드러나지 않은’ 풍속의 한 단면을 무심히 툭 펼쳐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이 별로 신선하지도, 이상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50년대에서 6,70년대를 거쳐 80년대 심지어 90년대 자신들이 학창시절 찍은 각종 기념사진을 보길 권한다. 물론 남녀 공학 학교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공식적인 사진이나 비공식적인 사진 대부분을 통틀어 그 시대 사람들은 또는 우리들은 남녀유별의 조선시대 습속을 충실히 이어받아 남녀를 구별짓는 것에 편한함과 자연스러움을 느꼈다. 학생들의 수학여행 혹은 졸업사진들을 많이 수집을 해 온 내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최근까지도 학생들은 남녀가 섞여 사진 찍는 것을 오히려 어색하게 느낀다.

    이런 습속은 언젠가는 바뀌겠지만 옛 습속은 이렇게도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이런 습속에 젖어 살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들은 그 뿌리가 강고해서 1년, 2년 만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100년 200년에 걸쳐 천천히 변하는 것들이다. 인식과 관습의 변화는 이렇게 어렵고도 지난한 것이다. 내외법을 조롱하듯이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일곱의 청춘 남녀들이 던져준 역사의 단상(斷想)이었다.

    [사진] 1950년대 이후 학교의 남녀 학생들의 각종 기념사진들이다. 남녀 사이에 무슨 38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격히 선을 구분하였다. 남녀 학생 사이에 일부러 간격을 띄운 경우도 보이며, 심지어 교사들이 남녀 학생 사이에 앉아 인위적으로 섞여 앉지 못하도록 한 사진도 보인다. 내외법이라는 조선시대 관습이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아래 사진모음의 왼쪽 하단 사진은 1990년대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 사진이다. 몇 명이라도 섞여 앉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교사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남학생, 왼쪽은 여학생으로 엄격히 선을 지키고 있다. 이런 사진들을 보다가 7명의 남녀 학생들이 같이 물놀이하는 사진을 보면 그 사진이 주는 신선한 가치를 더욱 확연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일곱 장의 사진은 박건호 수집 사진, 아래 사진모음의 왼쪽 하단 사진은 김효진 선생님 제공사진)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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