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회찬의 꿈은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
    [노회찬을 추모하며-6] 그를 보낸다
        2018년 07월 28일 01:15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틀 전에 나경채 전 정의당 공동대표가 보내왔던 노회찬 의원에 대한 추도사인데 조금 늦게 게재한다.<편집자>
    —————

    등산복 차림의 키 작은 사내가 들어와 천붕天崩이라도 맞은 듯 비통한 얼굴로 느릿느릿 국화를 바치고 향을 태워 꽂고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두 번 절을 했다. 그 남자는 우리를 향해서 허리를 숙이고 우리도 맞절을 했다. 그가 네모낳고 납작하게 포장된 상자에서 내용물을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좋아 보이는 넥타이였다.

    “저는 화물연대 조합원입니다. 어느 라디오에서 노회찬 의원님이 10년도 더 된 넥타이를 매고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배운 게 없어서 해드릴 게 이것밖에 없습니다. 노동자의 하늘이었습니다. 부디 힘내십시오”

    그는 어깨 너머로 다시 한 번 노.회.찬.의 영정사진을 흘끗 보고는 다시 느릿느릿 등을 돌려 나갔다. 우리는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눈빨간 사람들이 온다. 어깨를 들썩이며 들어와 엎드려서 한참을 있다 죄라도 지은 듯 우리의 눈길을 피해 나간다. 당원가입 원서를 찾는다. 포스트잇에 마지막 인사를 쓴다. 뒤돌아 본다. 느리게 느리게 시야를 떠난다.

    광주분향소의 모습(나경채 페이스북)

    지난 7월 20일 나는 경남 양산에 있었다. 권현우 위원장을 출마시켜 지방선거를 치뤘던 양산당원들이 이제부터 무얼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자 당원교육 형식으로 나를 초대했었다. 그 자리에서 노회찬 의원의 이야기를 꽤 길게 했었다. 해방 직후 일기 시작한 혁신정당 운동이 고질병인 분열과 군사쿠데타로 인해 좌절을 겪다가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다시 시작된 진보정당 건설 노력 또한 연이어 실패했었다. 노회찬 의원이 이 거듭된 실패를 어떻게 평가하며 새로운 당의 창당과 원내 진출을 기획했는지 다시 살펴보는 것이 지금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노회찬 의원은 진보정당의 성공을 위해 몇몇 노동조합 간부들만이 아니라 노동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민주노총이 진보정당 건설의 조직적인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핵심일꾼이 되어야 할 사회운동의 좌우 인사들을 폭넓게 아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국회의원 선거 1인 1표 등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는 정치제도를 최소한 1인 2표제로 바꾸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진보정당 성장의 내외적 조건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전략가였고, 설계자였다. 정의당이 2018지방선거를 큰 실패 없이 마쳤지만 앞으로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답답하다면 지금이야 말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때이고, 진보정치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내외적 조건이 무엇인지 고민하자는 것이 노회찬 의원에 대한 얘기를 꺼낸 취지였다.

    그날 양산 당원들과 나눴던 내용을 가지고 조만간 노회찬 의원을 만나서 얘기해보려고 했었다. 조만간 만나자는 문자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가 가버렸다. 나는 왜 그날, 노회찬 의원에 대한 이야기에 그렇게 시간을 쏟았을까? 미리 추모를 해버린 기분이다. 허망하고 허탈하다.

    2004년까지 나는 민주노동당에 내 작은 정성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하는 마음으로 당적에 이름만 올린 평당원이었다. 총선 전후의 TV토론은 나와 같은 많은 이들이 새로 당적을 갖게 하거나 당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 노회찬 의원의 활약은 가장 돋보였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부유세 공약을 좌파정책이라고 비판하는 자민련 토론자에게 ‘암소갈비 뜯던 사람이 불고기 먹으면 그 옆에 굶던 사람이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다’고 일격을 날리던 노회찬 의원. 이 말을 들으면서 눈물이 나왔었다. 다음 날 나는 뭐에 끌리듯 지역위원회 사무실에 나갔고 혹시 할 일이 뭐 있겠냐고 물었었다.

    나와 비슷한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은 인터넷까페 ‘노회찬 국회 보내기 운동본부(노국본)’로 모였다. 진보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치인 팬클럽이 생긴 것이다. 약 5,000명이 가입을 했다. 이 까페의 주인공들은 20대 청년, 여성, 의류업 종사자, 작가, 영세 의류업체 사장, 신문사 지국장, 학생,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이었다.

    이 까페를 처음 만들어 대표를 했던 우00씨는 20대 초반이었다. 당시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 가난해서 대학은 엄두도 내지 않았고, 아버지는 연락이 안 된 지 여러 해, 아픈 어머니와 함께 임대아파트에 거주했으며 기초생활수급자였다. 그는 노회찬 의원이 출연한 TV토론을 볼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특히 저 암소갈비 얘기를 했을 때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온갖 복지제도를 대부분 서럽게 경험했던 그는 기회만 있다면 나라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딱 노회찬 의원이 하고 있었고, 저 사람은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을 아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노회찬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었다. 노회찬 의원이 왜 그에게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했는지는 직접 듣지 못했지만, 그가 그 직책을 너무너무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나는 노회찬 의원을 도왔다. 제7공화국 시대를 열자는 것이 노회찬 후보의 주요 주장이었고, 심상정 후보는 시대교체와 세박자 경제론을 들고 나왔으며, 권영길 후보는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말했다. 이 경쟁에서 노회찬 후보는 결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권 후보를 지지했던 특정 그룹의 엄청난 왜곡과 비난 공세를 뚫지 못했다.

    패배가 확정된 날, 우리는 허름한 냉면집 골방에 모였다. 무거운 얼굴의 노회찬 후보는 패배는 그 누구의 탓이 아니며 모두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동지들을 다독였다. 속내를 털어놓아도 좋을 사람들만 모였기 때문에 한 마디 정도는 상대진영을 원망해도 좋을 자리였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참지 못한 몇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왜 당신 탓입니까? 가만히 있을 겁니까?’ 그의 대답은 그저 ‘어허~’였다.

    곡절 끝에 민주노동당을 탈당하여 창당한 진보신당에서 노회찬 의원은 다시 탈당했었다. 2011년이었다. 통합진보당을 만드는 길에 합류한 것이었다. 그는 함께 떠나자고 말하지 않았고 나는 가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다. 2014년 내가 관악구의원 재선에 나섰을 때 나는 진보신당이 당명을 바꾼 노동당 후보였고 그는 진보정의당 소속이었다. 서로 다른 당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선거구로 와서 열정적인 지원유세를 해주었다.

    2015~16년 연말연초에 나는 노동당 대표 선거의 후보였고 진보정치세력의 결집을 위해 나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결선까지 가는 접전 끝에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그날 노회찬 의원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보다 더 들뜬 목소리였다. ‘정말 미안하고 정말 고생 많았소’ 하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도울 일이 있다면 꼭 말해달라고 했고, 나는 조만간 때가 오면 2011년도의 탈당에 대해 노동당 당원들께 사과해 주시라 요청했고, 그러겠다고 했던 그는 나중에 이 약속을 지켰다.

    정의당 광주시장 후보로 지방선거를 치르던 얼마 전 광주를 방문한 노회찬 의원은 광주시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안이 뭐냐고 물어왔었다. 지역경제와 일자리가 최대 현안이고 회피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켄 리빙스턴이 영국 런던의 시장이었을 때 대처 총리에 맞서서 대안적 경제정책을 편 적이 있어요. 그때 정책을 한 번 참고해 보세요. 나 후보에게 도움이 될 거에요’

    나는 이 말이 매우 반가웠다. 대안적 경제정책이 꼭 필요하다는 갈급이 있었고 마침 2006년에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이 펴낸 ‘런던플랜’이라는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나 문자가 아니라 직접 대면해서 나눈 마지막 대화가 이것이었으니 나에겐 그에게 들은 마지막 격려이자 조언인 셈이다.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니 믿을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동지들의 걸림돌이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고, 차라리 거름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이재영, 오재영, 박은지, 유병기, 노회찬…진보정치에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은 사람들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이만한 정당이라도 지킬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두렵기도 하다.

    “나 노회찬은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유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노회찬을 잃은 우리는 유언과 달리 좌충우돌 할 것이다. 당당하지 못하고 회의할 일도 많을 것이다. 노회찬을 잃은 우리가 무슨 수로 당당히 앞으로만 나아가겠는가?

    다만, 따뜻한 복지국가 만들자던 노회찬의 꿈은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기에 그 간절함에 책임 한 조각씩 더 얹어서 가자고 말하고 싶다.

    노동자와 서민들도 사회가 이룬 성과를 평등하게 공유하는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보정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전파한 사람, 정의감 넘치는 고등학생이었고, 시대의 아픔에 민감했던 대학생이었고, 불꽃으로 쇠붙이를 이어 붙이던 용접공 노동자. 수십 년 묵은 낡은 불판을 갈아야 한다던 웅변가였고, 삼성 X파일을 폭로한 죄로 의원직을 빼앗기고도 후회하지 않았던 진짜 정치인, 노회찬을 보낸다.

    필자소개
    정의당 심상정 선대위 상임공동선대위원장. 전 관악구의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