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정당 건설의 전략과 전망"
    [노회찬을 추모하며-2] "이념에 '기성복'은 없다"
        2018년 07월 26일 01: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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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999년 10월 14일 보건의료노동조합 전국 대의원 교육 강의안이며 <노동과 사회> 10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노동조합 대상의 교육이고 관련 매체이어서 노동과 관련한 주제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글을 읽다 보면 2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우리는 과연 20년 동안 얼마만큼 진보하고 전진했는지 되묻게 된다. 노회찬 의원이 유서에서 밝혔듯이 자신은 여기서 멈추지만 이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다. 다만 시간의 흐름이 진보와 전진을 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때로는 퇴보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해왔다. 그 과오를 반복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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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당 건설의 전략과 전망

    노회찬 (민주노동당 발기인 1228번)

    들어가는 말

    드디어 진보정당의 깃발이 올랐다. 민주노동당의 이름으로. 1999년 8월 29일 천 7백여명의 창당 발기인들은 당명을 채택하고 지도부를 선출하면서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같은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은 우선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짧게는 1997년 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대통령선거투쟁에 참여한 지 2년 만에, 길게는 1987년의 노동자 대파업투쟁 이후 12년에 걸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제반 노력이 소정의 결실을 보았다는 점이다.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공식적인 창당사업의 닻이 올려진 것이다.

    둘째, 여러 가지 미흡한 점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사상 유례없는 대중적 방식의 창당경로를 밟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정당 창당과 관련하여 아직까지 일선 현장 노동자들의 논의와 참여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중앙의 일정을 밀어붙이기 식으로 집행하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이러한 지적은 모두 사실이며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백만명이 넘는 당원이 참여하고 있다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신당 창당을 결의하면서 그 발기인을 당 상층의 보스가 임명한 38인으로 한정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진보정당의 발기인대회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4차례의 투표를 통해 치열한 접전 끝에 당명을 채택하는 과정은 바로 대중참여, 대중주체, 대중주도라는 진보정당의 대원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사건이다.

    이제 공식적인 창당 일정을 밟기 시작한 진보정당이 대중참여, 대중주체, 대중주도라는 대원칙을 안정적으로 견지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이 불가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진보정당의 기능적 특성과 활동조건의 특수성을 살려나간다면 시간과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여기서도 원칙이 왕도인 것이다.

    1. 진보정당의 출발

    인류가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3천년의 역사를 갖는다. 그러나 인간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적 의미의 정당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150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물론 정당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곧 세습권력으로서의 왕권이 소멸하였거나 현저히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당이라는 형식의 정치결사체가 등장한 것은 그 자체로서 역사의 진보라 할 수 있다.

    정당을 먼저 만든 것은 귀족, 자본가, 대토지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그 사회의 소수였으므로 초기의 정당은 이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보수정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들 정당의 형태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초기 정당들의 특징은 지금도 보수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어 오고 있다. 당의 성격에서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고, 당의 목적이 구성원의 증가나 대중의 결집보다는 명망가를 가입시키는 데 있으며, 당의 재정 역시 소수의 기부자로부터 충당하고, 당의 활동이 선거나 의회 내에서의 제휴에 집중되고 당 소속 의원들에 의해 주도되며, 당의 실권은 원내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특수 집단이 발휘하는 특징이 그것이다.

    진보정당의 역사는 귀족, 자본가, 대토지 소유자들의 정당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체의 정치활동으로부터 배제된 다수의 대중, 그 중에서도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근로계층이 새로운 정당을 만든 것이다. 이 새로운 정당은 대개의 경우 사회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내걸었으며, 의회 의원 한 명 없는 상태에서 다수의 당원을 조직하는데 주력하여 대중정당으로 출범하였고 다수의 당원을 관리하는 제도로서 엄격한 당비 납부제도를 초기부터 실시하였으며 투표권조차 없던 상태에서 보통선거권과 비례대표제 쟁취를 위한 투쟁을 강화하였다.

    물론 진보정당의 출현과 성장이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발전이 지체되고 절대왕권이 지속되었던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나라들에선 진보정당의 모든 활동이 오랫동안 불법화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진보정당의 활동은 독재정권에 의해 탄압 받거나 금지되어 왔다. 1987년 노동자 대파업투쟁 이후 비로소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자유가 쟁취된 것처럼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부분적인 활동의 자유를 획득한 것은 겨우 10년 남짓한 역사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의 진보정당은 세계 진보정당의 역사가 확보한 보편적인 경험과 함께 한국 사회라는 특수한 환경을 조화시키는 데서 자신의 성격을 형성하고 발전 경로를 찾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 진보정당은 이념정당이다.

    진보정당은 기본적으로 탈(脫)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을 자신의 이념으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정당의 이념은 사회주의이다. 이를 재론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이러저러한 개혁과 개량이 진보정당의 힘과 능력을 키워내고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는데 보다 유리한 조건을 형성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조차도 근본적인 변화의 전망 하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추상적인 논쟁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자신의 이념을 구체적인 활동과 정책 속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표현해 내는가 하는 데 있다.

    이념에 ‘기성복’은 없다

    사회주의 이념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이념에 있어서 ‘기성복’은 없다는 사실이다. 기성의 이념 속에서 정답 찾지 말고 자신에게 맞는 정답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뜻에서 민주노동당의 강령시안이 ‘노동자 민중 중심의 민주적 사회경제체제’를 대안적 체제로 제시하고 이를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해방을 목표로 하였던 사회주의적 이념과 전통을 계승하되, 역사적으로 현존하였던 사회주의가 지녔던 비민주성과 관료적 억압 그리고 경제적 비효율성을 극복하는 체제’라 규정한 것은 이념 문제를 다루는 출발점으로서 의의가 큰 것이다.

    또 강령시안에 적절히 밝혀져 있듯이, 소비에트 사회주의와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명백히 밝히는 것은 진보정당의 이념이 현실 속의 입지를 찾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대목이다. 예컨대, ‘무산대중은 단결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부분적인 국영화와 계획경제의 도입을 주장했던 1957년의 진보당이 자신의 강령에서 ‘6.25 전쟁을 일으킨 공산도배’에 대한 비판에 많은 비중을 둔 것도 휴전 후 3년 만에 창당하는 진보당의 고민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또 그간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주의 정당(Socialist Party)’이란 호칭 대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진보정당(Progressive Party)’이란 국제사투리를 사용한 배경에는 이 사회가 갖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특수한 체험과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고자 하는 현실이 감안된 것이다. 이념이란 마치 연(鳶)처럼 항상 지상의 현실보다 높이 떠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념이 뜬 구름과 다른 것은 연줄을 통해 지상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고 그 높이와 방향이 조절될 수 있다는 점이다.

    3. 진보정당은 대중정당이다.

    오늘날 대중정당을 표방하지 않는 정당은 없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대중정당은 진보정당이었다. 지배계급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던 나라들에서 진보정당은 전위정당이라는 엘리뜨정당의 성격을 갖기도 했지만 진보정당은 이념적 지향이나 주요 참가세력의 성격상 처음부터 대중정당의 성격을 유지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대중정당으로서 진보정당의 출현은 경쟁이 불가피하게 된 보수정당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다수의 대중이 선거권을 획득하는 추세에 따라 오늘날 거의 모든 보수정당들도 대중정당의 외양을 갖게 되었다.

    보수정당들의 대중정당적 성격은 다분히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의 보수정당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들 정당들은 대체로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배체제나 민정계, 민주계니 하는 소수 그룹의 과두지배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당원으로 참가한 ‘수백만의 대중’들은 당 활동과 의사결정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들은 단지 선거 시의 지지(예상)자들로서 당내에 입도선매되어 당원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진보정당이 대중정당의 성격을 갖는 것은 지지기반의 특성이나 당 운영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지배계급의 문화가 지배적인 문화인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에서 ‘정치의식과 정치문화’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절대다수의 대중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정치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진보정당은 일정 수의, 아니 상당수의 대중을 정당 내부로 조직화하고, 교육, 훈련, 토론 등을 통해 새로운 정치의식으로 무장하게 할 때만이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다. 진보정당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당원의 수를 발전과 쇠퇴의 척도로 평가하고 당원의 증대를 의석 확보보다 중시하는 것은 단순히 당의 세력을 과시하거나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다. 국가기관과 사회의 전반적인 체제가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달벨트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조직화와 조직의 확대만이 이에 대응하는 유력한 방도이기 때문이다.

    참여와 민주주의 없이 진정한 대중정당이 될 수 없다

    진보정당이 대중정당이라는 것은 단순히 대중에게 입당의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중정당이라는 것이 아무나 입당하여 약간의 당비를 내고 선거 때 당을 지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보수정당의 조직성격과 다를 바 없으며 이런 당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당의 이념, 지도체제, 운영원리에 있어서의 진보성은 점차 쇠퇴하게 될 것이다. 결국 당 활동에 대중참여와 대중주체의 원칙이 실현됨으로써만이 대중정당의 성격을 획득할 수 있으며, 당내 민주주의도 이뤄질 수 있다.

    여기서 대중정당으로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제기된다. 첫째, 다수의 대중인 일선 당원들이 일상적인 당 활동과 교육, 토론, 훈련 등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당이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 일선 당원들이 당의 모든 주요한 정책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체제와 운영원리를 갖춰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일선 당원들의 활동 단위 설정을 포함한 당의 일선 조직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당의 기초 조직이 세포와 세포위원회로 구축되는가, 부문 및 분야별 분회로 구축되는가 아니면 일선 당원들이 지구당 혹은 지역조직에 바로 연결되는가의 문제는 사실상 당의 성격과 운영원리를 아래로부터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4. 진보정당은 근로대중의 당이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전체 발기인의 90%이상이 노동자란 점에서 이 당은 ‘노동자 중심의 당’ 또는 ‘노동자당’이라 부를 수 있다. 동시에 여러 계급계층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단체들이 참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계급연합당’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당의 미래와 발전전략을 함께 생각해야 하며,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진보정당의 주체는 전체 당원이다. 노동자, 농민, 빈민, 지식인, 청년, 학생, 자영업자, 양심적 중소기업인 등 모두가 대등한 당의 주체이다. 물론 당의 주체인 당원의 구성은 당의 발전과 함께 변화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창당에 참여한 발기인을 기준으로 할 때, 당원의 99.9%가 근로대중이다. 그리고 전체 당원의 90%가 노동자이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은 전체 당원 중 50% 남짓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민주노동당은 근로대중의 당이며 노동자는 당의 주도세력임이 분명하다.

    본격적인 당원 조직화가 시작될 경우 초기 단계에선 민주노총 조합원의 증가가, 다음 단계에선 민주노총 소속이 아닌 노동자들의 증가, 그 다음엔 노동자가 아닌 근로계층의 증가가 이어질 전망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한 단계가 끝나야 다음 단계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동시에 여러 단계가 진행될 수도 있다. 또 장기적으로 노동자의 구성 비율은 다소 낮아질 수 있다. 이것은 당이 정상적으로 발전한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어떤 경우이든 당원의 절대 다수는 근로대중일 것이며 그 과반수는 노동자가 차지할 것이다.

    근로대중 내부의 차별화를 경계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은 민주노총 노동자와 비 민주노총 노동자, 노동자와 비노동자의 차별성을 강화하려는 경향이다. 예컨대 ‘노동자 중심성’이란 표현은 이미 근로대중 내부에서 노동자와 비노동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같은 차별화는 정당한가? 현실적인가? 사회의 발전에 따라 계급구성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100년전 독일과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민주노총의 경우 조합원의 1/3은 전통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쁘띠부르주아지는 양적으로 팽창하지만 그 중간층과 하층은 빠른 속도로 노동자계급으로 편입되어왔다. 그리하여 재산과 생활수준 및 교육수준으로 볼 때 오늘날의 노동자계급은 근로대중(혹은 민중)부문의 하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대중부문의 최하층에서 최상층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내부 구성이 다양해짐에 따라 근로대중 내부에서 노동자계급과 비 노동자계급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점차 의의를 잃어가고 있다.

    ‘노동자 중심성’이 갖는 문제-참여 없이 ‘중심’이 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발기인대회를 앞두고 ‘노동자 중심성’을 규약에 명기된 조직의 성격으로 표기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뜨거운 쟁점이 되었지만 이론적으론 별 의미 없는 논쟁에 불과했다. 만일 ‘노동자 중심성’이 당내 헤게모니를 가리키는 뜻이라면 이를 규약이나 당헌에 명기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것도 아니며, 세습되는 것도 아니다. 당내 헤게모니는 적극적인 참여와 민주적인 경쟁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는 속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여성할당제와 마찬가지로 민주노총에게 30%의 할당제가 실시된 것은 아직 당내의 노동자가 자력으로 헤게모니를 갖기 힘들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한편 ‘노동자 중심성’이 ‘지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북한, 중국,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국가의 헌법은 이들 나라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지도성’ 역시 ‘중심성‘과 마찬가지로 선험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분명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발달이 아직 여타 계급계층으로부터 지도성을 인정받지 못한 단계라는 것이며 동시에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는 동맹의 상대가 될 유력하고 신실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생활조건과 문화 등 이러저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로대중 전체는 국가권력과 국내외 독점자본의 포위 속에 동일한 운명에 처해 있다. 이러한 현실은 진보정당의 구성과 활동에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진보정당의 발전전략이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대중 일반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근로대중 일반의 지지와 참여를 고르게 획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노동자계급의 지지와 참여를 확대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5. 진보정당과 시민운동

    지금 추진되고 있는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 이외에도 농민, 빈민, 청년, 여성, 지식인 각계 각층이 다양하게 참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당은 근로대중의 폭넒은 참여와 지지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당 건설기에 있어서 민주노동당의 조직적 기반은 주로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 이외에는 세력으로서, 운동으로서 존재하는 유력한 민중부문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의 주체 역시 창당 초기에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전체 당원의 80% 이상을 차지 할 것으로 보인다. 또 이제까지의 창당과정에서 당의 성격이나 기본노선 등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민주노총은 사실상의 거부권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창당 초기의 당이 ‘민주노총당’으로 평가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또 부인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건설되고 있는 진보정당의 발전전략을 가다듬을 수 있다. 즉 민주노동당의 경우 ‘민주노총당’으로부터 출발하여 전체 근로계층의 당으로 성장하는 발전전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내부의 지지를 확대, 강화하는데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그 성과에 바탕해서 외연을 확장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첫 단계의 발전전략이 성과를 거둘 때 비로소 진보적 시민운동과의 연대문제, 적녹동맹 등 외연을 확장하는 두 번째 단계 전략의 생산적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민주노총당’으로부터 출발하는 당의 발전 경로는 창당추진세력들의 의지나 민주노총의 의사에 따라 규정되기보다는 그와 반대로 시민운동 이외에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노동운동밖에 없는 주객관적 현실이 당의 발전전략을 역으로 규정해 주는 측면이 더 크다. 여기서 시민운동, 특히 진보적인 시민운동과 진보정당과의 관계설정이 당의 성격과 장기적 발전전략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국민승리21이 지난 3월 한길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 “99년 올해 진보정당이 만들어진다면 어느 세력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설문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시민단체 세력”이 주도해야 한다는 응답은 68.6%였던 반면,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주 기반으로 하는 노동계 세력”이 주도해야 한다는 응답은 11.8%에 불과 하였다. 시민운동을 포함하여 폭넓은 진보세력이 결집하여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보정당 내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연대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노동운동의 경우 안으로는 타계급, 타세력과의 연대로 인한 주도권과 정체성의 손상에 큰 우려를 갖고 경계하고 있으며, 밖으로부터는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조직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는 평가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진보적 시민운동의 경우 최근의 화려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진출을 뒷받침할 조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이미 ‘권력’에 버금가는 정치적 발언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어려운 조건이기도 하다.

    결국 양쪽 모두 준비가 덜 되었으며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다. 양쪽 모두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확고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연대는 개혁신당의 실패담이 보여주듯이 상층 명망가간의 연대로 흐를 위험이 큰 것이다. 따라서 지금 추진되고 있는 진보정당과 진보적 시민운동의 당내에서의 연대는 진보정당이 근로대중의 정당으로 자생력을 갖춘 이후에나 검토될 사안이다. 그 이전까지는 협력적 경쟁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6. 당과 노동조합 –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일반적인 관계는 ‘상호 독립적인 동반자 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소련공산당이 지도하던 제3인터내셔날(코민테른) 시기에 풍미했던 당과 노동조합의 지도-피지도 관계는 오늘날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국가에만 존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당과 노동조합과의 관계는 당이 먼저 건설되고 당이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했던 독일, 스웨덴형과 영국, 프랑스 등의 선 노조 후 정당형으로 구분한다. 이들 유형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고 또 각국의 당-노동조합 관계도 시대와 환경의 변천에 따라 변화해 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공통적인 것은 당과 노동조합이 상호 독립적인 의사결정체계를 갖고 독립적으로 운영해 간다는 것이다. 브라질 노총(CUT) 조합원의 90% 이상이 노동자당(PT) 당원이었던 브라질의 경우나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집단가입 형식을 통해서만 노동당에 참가할 수 있었던 영국 노동당의 초기 시절에도 당의 의사 결정은 기본적으로 당에 참가한 개별 당원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다. 노동조합이 자신의 조직적인 의견을 실현시키기 위해 집행기구와 대의기관에 일정한 지분을 갖는 제도는 영국을 비롯한 극소수의 나라들에서만 통용되고 잇다. 영국의 경우 당과 노조가 함께 하는 정책협의회를 두고 있으나 이 협의회의 논의와 결정이 양 조직에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민주노총이 여전히 산업별 노조를 만들어 가는 건설기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브라질과 같은 당-노조 동시 건설, 성장형이라 볼 수 있다. 당과 노조의 관계에 있어서 현재까지 민주노총의 역할은 주요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고 조직적 결의를 통해 조합원들의 정당 가입을 ‘권장’하는 수준이다. 대의원대회 등의 결의를 통한 정치적 지지를 넘어서서 집단가입 방식을 채택하는 경우는 개별 사업장 단위에선 있을 수 있으나 그 가능성은 크지 않다. 따라서 ‘민주노총당’으로 평가됨에도 불구하고 창당초기 조합원의 진보정당 가입율은 10%선을 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영국 TUC 조합원의 60%가 노동당에, 스웨덴 LO 조합원의 75%가 사민당에 가입해 있는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당의 의사결정에 노동조합원인 당원이 개인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당의 기본성격과 조합원의 참가율의 괴리를 감안할 때 현재 대의기관에만 적용되고 있는 민주노총 30% 할당제를 집행기구에 까지 확대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7. 진보정당과 선거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부르주아 대의체제 하의 모든 정당들은 선거를 통해 평가받고 선거결과에 따라 영향력의 증대와 쇠퇴를 겪게 된다. 정당인 한 이것은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반성했고 선거를 통해 성장했다는 것은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진보정당으로 성장한 브라질 노동자당의 자기고백이다. 100년을 넘어서는 유럽 진보정당의 역사는 자신들이 취한 정책의 변천과 선거에서 획득한 의석 수의 변화를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진보정당의 선거딜레마

    선거와 관련한 진보정당의 고민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그 하나는 선거를 통해 얻는 최상의 결과로서 집권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보정당의 궁극적 목표인 인간해방, 노동해방을 실현시키는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고민은 선거에서 더 많은 득표를 하기 위해 중간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선거전략이 낳는 문제이다. 노동자들의 지지만으로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가 어려워지면서 취하게 되는 이러한 선거전략은 선거의 승리를 가져오는 대가로 당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당의 지지기반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영국노총(TUC)의 공식적인 지지와 참여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노동당에 투표하는 TUC 조합원이 30% 수준에 불과한 것은 이제 영국만이 아닌 서유럽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진보세력은 다양한 방식의 선거참여 전술을 구사하였지만 98년의 지방선거를 제외한 모든 선거는 매우 부정적인 경험을 남겼다. 선거의 패배가 진보정당의 해산과 당 지도부의 투항으로 이어지거나 이와 달리 보수정당과 제휴전술을 택한 경우에도 선거에선 승리했으나 제휴의 성과를 얻지 못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또 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은 진보정치영역에까지 확산되었으며 여기에 패배주의까지 만연하게 되었다. 최근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2000년 총선에 대해 민감한 반응들이 서둘러 표출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 부정적 체험의 소산인 것이다.

    민주노동당 총선전략의 두 가지 전제

    민주노동당의 경우 총선전략을 수립함에 있어서 다른 나라 진보정당의 고민은 물론 한국의 특수한 경험을 감안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당의 현실조건과 장기적 발전전략에 관한 것이다. 지금 민주노동당의 절대절명의 과제는 어떠한 선거전략을 채택하더라도 2000년 4월 13일 이후에도 당이 유지되고 발전의 동력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제16대 총선에서 전국 2%의 득표를 하거나 최소한 1명의 당선자를 내어 당의 해산을 막아야 한다. 이를 확실하게 담보할 방법이 없다면 선거보이코트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둘째, 당 건설기라는 특수한 조건을 감안할 때, 이번 선거의 경우 선거를 통한 당세 확장보다는 내부 조직 강화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1955년 진보당은 창당발기인대회를 치른 후 5개월만에 조봉암씨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워 216만표 득표라는 선풍을 일으키고 실질적인 선거승리의 세를 몰아 선거 후 6개월 후에 창당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처한 제반조건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선거제도가 진보정당에게 미치는 영향은 노동조합법이 노동조합의 활동에 미치는 그것보다 훨씬 큰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선거제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체적인 선거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선거제도나 정세의 변화에 따라 지금 누구도 예상하지 않는 좋은 선거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논리적으로 배제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총선에 임하는 기본원칙은 처음부터 명확해야 할 것이다. 즉 총선의 성과보다 당조직의 강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당 중앙의 활동, 지역 당조직의 대중사업, 당원의 훈련과 교육 등 모든 방면의 사업이 제 16대 총선이 아니라 장기적 발전전략에 복무하는 방향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초 브라질을 방문한 민주노총과 국민승리21의 활동가들에게 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가 한 다음의 말은 우리의 현실과 고민을 대변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노동조합 활동에서 정치활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한 번에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노동조합에서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도 투표에서는 우리를 찍지 않는 정치적 혼란이 있었다. 정치적 훈련이, 교육이 필요하다.”

    [ 노회찬을 추모하며-1] 1987년~1997년, 10년간의 진보정당운동과 새로운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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