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 정치자금법,
원외·신인 정치인들에 불법 강요
정치자금 입구 넓혀주고 투명성 강화 목소리 나와
    2018년 07월 25일 03: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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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정치자금 수수 의혹에 시달리다가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선택을 했다. SNS엔 온종일 노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올라왔다. 여야 정당들도 충격을 감추지 못했고, 정치적으로 정의당과 가장 반대편에 서있는 자유한국당마저 노 의원의 죽음을 “한국 정치의 비극”이라고 개탄했다. 빈소를 찾은 문희상 국회의장은 노 의원에 대해 “없는 자, 슬픈 자,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선”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고, 민주노총은 “자본에겐 단호했지만 노동자, 민중들에겐 부드러웠던” 정치인으로 그를 기억했다.

보수언론들은 24일 아침 신문을 통해 돈 안 받았다던 노 의원이 유서를 통해 정치자금 수수를 시인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떠들어대며 정치 불신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돈은 받았지만 청탁은 없었다”는 노 의원의 유서 내용을 보도한 뉴스에는 ‘그래도 돈을 받았다는 것 아닌가’, ‘술을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안했다는 건가’라는 조롱과 비난의 댓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노 의원이 정치자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데엔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정치자금법이 있다. 현행 정치자금법이 원외 정치인과 정치 신인들에게 불법을 강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는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다
국회의원이 우리를 대변하지 못하는 이유

4435억 2625만원, 1123억 7739만원, 515억2190만원.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할 이 돈은 더불어민주당 김병관 의원, 자유한국당 김세연·박덕흠 의원의 재산 액수다. 현역 국회의원 중 가장 재산이 많은 3명의 의원은 ‘주식 부자’, ‘부동산 부자’로도 불린다.

뒤이어 박정 민주당 의원 265억1451만원,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 232억9292만원, 성일종 자유한국당 의원 216억685만원, 윤상현 자유한국당 의원 193억8813만원, 강석호 자유한국당 의원 167억5724만원,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 130억4814만원,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 90억9653만원 순이다.

한 달에 150만원, 200만원 언저리를 받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덜 가난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국회라면, 과연 수백억 원의 재산을 가진 국회의원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법을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당 비례대표 공천을 할 때 여성할당제를 둔 것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을 대변하는, 여성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장애인 할당제나 청년 할당제 같은 제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난한 자를 대변하기 위한 가난한 자들은 정치를 할 수가 없다. 유독 국회에 재산이 많은 이들이 몰려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거다.

비현실적 정치자금법이 원외·신인 정치인 등에 불법 강요

후보가 한 번 선거를 치르려면 수 억 원이나 많게는 수십 억 원이 든다. 지역구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을 구해야 한다. 사람들을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자신의 정견도 밝혀야 한다. 선거가 다가오면 현수막도 걸어야 하고 명함도 만들어 돌려야 한다. 여기에 더해 후보 개인의 생활비도 필요하다.

현역 의원들은 이러한 선거비용을 후원회를 꾸려 모을 수 있다. 현행 정치자금법에 따르면, 국회의원, 지자체장 후보, 대통령 후보 등만 후원금을 모을 자격이 부여된다. 국회의원 예비후보의 경우엔 선거 4개월 전에야 후원금 모집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외에서 정치활동을 하거나, 이제 막 정치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정치신인, 지방의원이나 지방의원 후보자들은 후원금 모집이 불법이다. 모든 비용을 후보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노 의원이 드루킹 측에 4000여만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던 시기도, 삼성 X파일 폭로 사건으로 19대 의원직을 상실해 원외 정치인 상태에서 20대 총선을 준비하던 때였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가난한 원외·신인 정치인만 범법자로 만드는 비현실적인 현행 정치자금법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이준석 전 바른미래당 당협위원장은 정치자금법이 “노 의원을 죽였다”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이 전 당협위원장은 “원외에 있는 사람은 (본인 스스로) 돈을 모으지 않으면 정치할 수 있는 길이 없다”며 “(현행 정치자금법이) 정치를 시작한 신인들이나 아니면 원외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법을 강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 의원의 죽음 이후 현행 정치자금법 문제는 조금씩 거론되곤 있다. 최병천 전 국회 보좌관은 23일 현행 정치자금법을 ‘노회찬 의원도 지킬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최 전 보좌관은 “현행 정치자금법은 ‘돈 없는 사람, 인맥이 빵빵하지 않은 사람’은 정치를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혹은 ‘불법을 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가난한 사람 대변하는 정치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정치자금 입구 넓혀주고 투명성 강화해야

‘오세훈법’으로 불리는 현행 정치자금법은 한나라당 ‘차떼기 불법대선자금 사건’에 휘말리자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발의했다. 국회의원 1명은 연간 최대 1억 5000만 원의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다. 선거가 있는 해엔 최대 3억 원까지 가능하다. 법인이나 단체는 정치자금 후원이 현행법상 불가하다. 개인 후원도 국회의원 1명 당 500만 원을 넘어서면 정치자금법 위반이다.

이 법은 지난 선거 때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치권에선 오래 전부터 “오세훈이 다시 국회에 와도 못 지킨다”, “부자가 아니면 정치를 못 한다”며 재·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결과적으로 이 법은 가난한 정치인들에게 자금 압박을 가했고, 후원금이 부족한 정치인들은 쪼개기 후원이나 출판기념회, 강연료 명목으로 편법적으로 돈을 받는 경우까지 벌어졌다.

최 전 보좌관은 서복경 서강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정치자금의 유입(입구), 운영, 사용(출구) 이 3가지 모두를 동시에 규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같은 경우 유입-사용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고, ‘운영의 투명성’을 감시한다. 한국의 경우 유입에 대해서도 엄격하고, 사용에 대해서도 용도가 모두 특정되어 있다”며 “한마디로, 한국의 정치자금법은 지킬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꼬집었다.

정치자금의 입구를 확대하고 투명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 전 보좌관은 “정치를 하다보면 선거에서 떨어지는 것은 상수(常數)에 가까운데, 그때 받는 돈은 (대가성 여부와 무관하게) 죄다 불법에 가깝다. 친구들에게 받는 돈도, 선후배들에게 받는 돈도 불법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가난한 정치인이 계속 정치를 하기 위해선 동료, 친구, 가족 등의 후원금이 필요하지만, 법안을 발의한 사람조차 지킬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인 현재의 정치자금법의 테두리 안에선 그 모든 것이 대가성이 없더라도 불법이 돼버린다는 것이다.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고 노 의원이 당에 남긴 유서의 내용을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거냐’는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다.

최 전 보좌관은 “정치인들은 이슬만 먹고 살지 않는다. 정치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는 정치를 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다. 자신의 생활비가 필요하고, 활동비가 필요하고, 상근자 급여와 사무실 유지비용이 필요하다”며 “현역 정치인도, 떨어진 낙선한 정치인도, 혹은 청년-여성 예비 출마자들도 정치자금에 대해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소개
유하라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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