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아이에게 행패를 부리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40] 어떤 소동과 반성
        2018년 07월 25일 12: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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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40회로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 연재를 마무리한다. 필자의 SNS 등으로 출간된 책의 나머지 분량도 다 공개할 예정이다. 그동안의 연재에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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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 9시 50분경이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딸은 집에 혼자 있다 했다.

    “아빠 어디야? 언제 와?”

    “사무실에서 글 쓰다가 자정쯤 들어갈까 했는데…….”

    나는 딸의 입시산행 일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음~ 알았어. 그럼 더 일하다 와.”

    괜찮다는 딸의 음성은 밝았으나, 마음엔 여운이 남았다. 전화를 끊은 즉시 가방을 쌌다. 동네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딸 몫으로 떡볶이에 치즈김밥, 내 몫으로 순대를 샀다. 현금이 없는데 카드가 안 되는 가게라 외상을 달았다.

    “아빠 이거 봐. 나 치마 샀다. 내일 결혼식에 입고 갈 거야.”

    집에 들어서자마자 딸이 자랑했다.

    “다리통이 굵어서 더 뚱뚱해 보이지 않겠냐.”

    “흥! 아니라고! 치마가 가려 줘서 더 날씬해 보인다고.”

    내 농담에 딸은 새초롬하게 아양 떨었다. 그리고선 내가 음식을 펼치는 동안 치마를 입어 보였다.

    “봐. 보라고. 날씬해 보이잖아.”

    “정말 그러네. 이쁘네.”

    나는 장단을 맞췄다. 우리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니 아내가 들어왔다. 딸내미는 건성울음으로 매달렸다.

    “엄마, 엉엉~. 아빠가 다리통 굵어서 치마 입으면 안 된대. 아빠 좀 때려줘.”

    아내는 나에게 때리는 시늉을 했다. 셋은 두런거리며 음식을 나누다 각자의 세계로 들어갔다. 아내는 컴퓨터 앞으로 갔고, 나는 막걸리 마시며 TV를 봤고, 딸은 내 옆에 기대어 휴대폰을 들었다. 얼마큼 흐른 뒤에 시간을 보니 자정 30분 전이었다. 그때껏 딸은 휴대폰 삼매경이었다. 그냥 놔두면 마냥 갈 것 같았다. 한 번 빠졌다 하면 두어 시간은 뚝딱인 아이였다. 걱정스러웠다. 최근에 딸은 거의 매일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며칠 전엔 방학 중에 진행되는 방과 후 학습 1교시를 빼먹기도 했다. 가끔은 못다 한 과제 탓에 등교 직전까지 애를 먹기도 했다. 이제 그만하라 했다. 딸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만 하라니까.”

    나는 재촉했다.

    “…… 응.”

    대답했으나, 눈과 손가락은 휴대폰 속에 있었다.

    “가시나. 이럴 거 같으면 시험 끝나고서 점수 안 나왔다고 징징 짜지나 말든지.”

    나는 잔소리를 했다.

    “좀 쉬면 안 돼? 피곤해서 그런다고! 1시간도 안 됐는데 아빠는 왜 그래?”

    딸이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에 심사가 뒤틀리고 말았다.

    “너 스마트폰 살 때 뭐라 약속했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검색에 빠져들지 않는다고 했잖아!”

    딸과 나는 서로 쏘아보며 말싸움을 했다. 그러다 딸이 벌떡 일어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하면 될 거 아냐!”

    딸은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고, 나를 힐난하며 흐느꼈다. 아내가 따라 들어가 달랬다. 내 딴엔 저를 생각해서 숙제를 하든지 일찍 자든지 그러란 건데, 내가 심하게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아빠한테 어찌 저럴 수 있나,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저 공부시키려고 어떡하고 있는데…….’

    최근 상황까지 겹쳐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운동가의 삶을 살아오면서 어떤 것에도 비굴하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운동이 나를 요구하면 감옥도 궁핍도 마다하지 않았다. 3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운동에서 악착같이 버티는 나의 자긍심이었다. 전태일재단에서 일하던 1년 6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활동비를 반납하는 무모함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어려운 곳에서 오라고 해도 주저했다. 가족의 생계, 특히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가장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기본 책무임에도, 거기에 묶여 있는 난 최근의 내 자신을 서글퍼하고 있는 중이었다.

    민주노총에서 호흡을 맞췄던 신승철 위원장의 임기가 연말에 끝났고,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섰다. 나는 당연히 사표를 제출했다. 여기까지는 과거와 다름없는 행보였다. 깨끗이 털고 가면 그만이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았다. 그러나 나는 민주노총 부위원장 출마를 저울질했다.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라도 생계비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바로 그 고민 때문이었다. 또다시 여기저기 손 벌리면서 버텨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그런데 부위원장 출마는 내가 운동에서 스스로 맹세하고 세운 삶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차원의 문제였다. 나는 내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출세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운동이든 정치든 경선 자리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해 왔다. 내가 변치 않고 밑바닥 국민들만 바라보면서 운동할 수 있도록 만든 동인이었다. 그것을 스스로 깰지도 모르는 불길한 상황이었다. 난 그런 자신이 비굴하고 서글퍼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딸아이의 툴툴거리는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난 폭발하고 말았다.

    “당장 그치지 못해!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울고 난리야!”

    소리를 버럭 지르며 손에 쥐고 있던 TV 리모컨을 닫힌 방문을 향해 냅다 내동댕이쳤다. 리모컨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성난 멧돼지마냥 난 씩씩댔다. 아내가 다급하게 거실로 나와 만류하며 깨진 조각을 치웠다. 딸아이 방에선 더 이상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기세에 눌린 듯했다.

    난 할매가 없는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깔았다. 생각할수록 딸의 태도가 괘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격하게 성깔부린 내 자신이 후회되었다. 초라하고 한심했다. 신체에 매를 대진 않았지만, 분명 폭력이었다. 다신 매를 들지 않겠다던 스스로의 다짐을 어긴 것이나 진배없었다.

    딸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세 번째로 감옥 가기 전이었으니, 네 살이었다. 어느 날 아이가 심하게 고집 부렸다. 옷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입겠다고 버티는 옷은 빨아서 마르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것만 입겠다고 고집했던 것 같다. 다른 옷들은 계속 거부했다. 할매는 씨름하며 다투다 포기했다. 아내도 쩔쩔맸다. 나는 타일렀고 나무라기도 했다.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저렇게 커선 안 되겠다 싶었다. 아이 팔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찰싹,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렸다. 아이는 태어나서 가족에게 처음 맞는 매였다. 할매도 아내도 때린 적이 없었다. 아이는 울면서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나는 점점 감정이 실리면서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은 사납게 바뀌었다. 잔뜩 겁먹고 질린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울며불며 제 엄마와 할머니를 찾았다. 난 문을 열었고, 할매와 아내가 번갈아 아이를 달랬다. 그날도, 이후도, 마음이 몹시 언짢았다. 크게 잘못한 거였다. 당장 설득하지 못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타일러야 하는 일이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감옥에 들어가선 다신 매를 대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편지까지 썼다. 그래 놓곤 매에 버금가는 폭력을 행사했다. 부위원장 출마 고민에서 비롯된 내면의 갈등은 딸아이 잘못이 전혀 아니었다. 딸이 나더러 운동하라 한 적도 없었다.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고민에 휩싸이라고 한 적도 없었다. 내가 오히려 운동을 한답시고 아이의 학원 요구도 들어주지 못했고, 어린이날 선물도 사주지 못했고, 용돈도 적정하게 주지 못했고, 이래저래 딸을 힘들게 만들었다. 리모컨은 내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끙끙대며 뒤척였다. 쉬이 잠들지 못했다.

    아침이 되었다. 1월 24일 오늘은 특별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딸내미 진외가요 내 외가이자 할매 친정에 결혼식이 있었다. 외사촌 이수정의 결혼이었다. 딸애는 고모뻘인 수정에게 언니라 부르며 잘 따랐다. 오늘의 결혼을 앞두고선, 사랑하는 언니를 빼앗겼다고 무척 섭섭해 했다. 간밤에 한바탕했던 딸과 나, 그리고 아내는 분주하게 출타 채비를 했다. 할매는 어제 이미 가 있었다.

    딸아이는 치마를 차려입었다. 표정에 노여움이나 섭섭함은 없었으나, 내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제 엄마와는 태연하게 수다를 떨었다. 한편으론 맹랑하고 한편으론 흡족했다. 간밤의 격한 충돌로 속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의연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딸아이는 갈등의 여진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처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차고 넘치던 친구 관계와 친인척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현하고 있구나. 어느새 다 컸구나. 험한 세상 잘 대처하며 살아가겠다 싶었다. 우리는 남산 소월길 보성여중고 입구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이제나저제나 화해 기회를 엿보던 나는 슬그머니 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뚱띵.”

    “흥! 난 아저씨 몰라. 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 납치범인가 봐. 빨리 경찰에 신고해.”

    “가시나야, 넌 모르는 아저씨한테 반말 하냐?”

    아내와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사이 402번 버스가 왔다. 강남역까지 가서 전철로 갈아탄 뒤에 분당 야탑역에 도착했다. 가벼운 대화들에서 아이 마음이 많이 풀린 듯했다. 우리는 결혼식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네가 잘못 한 게 뭔지 알아?”

    무겁지 않게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아빠한테 함부로 행동해서 화를 부른 점과 스마트폰에 빠져드는 문제를 지적하려던 참이었다. 잘 타이르면 사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다.

    “징징 짠다니까 화났잖아. 내가 잘못했으면 불러서 혼내면 되지, 왜 그렇게 화를 내. 평상시 안 그랬잖아. 아빤 왜 그래?”

    아차, 이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딸의 지적이 백 번 옳았다. 더구나 딸아이는 한창 예민한 고교생 아니던가. 하루하루가 스트레스 자체인 고3을 목전에 두고 있는 아이였다. 공부감옥에 갇힌 불운한 대한민국 학생이었다. 느닷없이 화를 낼 수도 있고 까닭 없이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는 처지였다.

    “가시나, 미안해.”

    멋쩍게 웃는 것으로 딸내미와의 한바탕은 싱겁게 끝났다. 나는 졌다. 아니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간밤의 한바탕은 내 밑천이 형편없다는 것을 딸과 아내에게 들키고 만 소동이었다.

    소정과 누리는 결혼하는 수정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딸내미는 예식장에서 소정을 비롯한 아이들과 어울려 해맑게 웃고 인사하고 떠들고 먹으면서, 수정의 결혼을 축하했다.

    필자소개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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