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1997년,
    10년간의 진보정당운동과 새로운 도전
    [노회찬을 추모하며-1] 20년 전의 그의 고민과 실천
        2018년 07월 25일 09: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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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정의당 국회의원의 타계 이후 그 파장은 크다. 정당의 차이를 넘어 많은 정치인들이 애도를 표하고 시민사회에서도 그를 기리고 있다. 더 소중한 것은 수많은 평범한 시민들이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하고 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회찬 의원의 뛰어나고 헌신적인 의정 활동과 정당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다. 레디앙은 그 이전의 노회찬, 그의 원초적 고민과 생각과 사상이 담겨져 있는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려 한다. 20여년 전 민주노동당이 출현하기 이전의 진보정치에 대한 그의 고민을 살펴보는 글 두 편을 소개한다. 먼저 1987년~1997년의 시기를 회고 평가하면서 앞으로의 진전을 모색하는 1999년 경의 글을 게재하고 이어서 민주노동당 창당 직후의 고민과 전략에 대한 글을 소개할 생각이다. 물론 이 시기 이후 그의 죽음까지 2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의 고민과 실천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며 변화하고 진화했을 것이지만 그의 원 고민을 살펴보는 것도 그가 타계한 이 시점에서 의미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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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상엽 작가의 페이스북

    지난 10년간의 진보정당운동과 새로운 도전

    노회찬(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

    들어가는 말

    1997년 12월,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였던 권영길 대표는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이미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경제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하였다. 특히 그는 이러한 경제위기가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계급을 첫 번째 희생물로 삼으려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전 민중의 단결과 투쟁만이 다가오는 고통을 최소화시킬 뿐 아니라 이러한 경제위기를 낳는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권영길 후보와 국민승리21은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싸우고 이를 위해 진보정당을 건설할 것을 국민들에게 약속하였다. 이처럼 최근의 경제위기가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제기하는 정치적 과제는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강력히 맞서 싸우면서 국가정책의 근본적인 수정을 실현시키는 일이며 장기적으로 진행될 이 투쟁을 위한 진지-진보정당을 건설하는 일이다.

    그런데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1997년의 총파업투쟁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는 왜 아직 실현되고 있지 않은가? 이 의문에 답하는 것은 곧 정치세력화를 위한 지난 10년간의 노력을 재검토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지금 한국의 진보세력들에게 부여된 정치적 과제를 실현할 방도를 찾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1987년은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변화를 이룬 한 해로 평가되고 있다. 17년간 지속되어 온 군사독재체제를 와해시킨 6월항쟁과 7,8월의 노동자 대파업투쟁은 이같은 변화를 초래한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그리하여 이 해에 버금가는 정치적 격변이 이뤄진 1960년 4월혁명 직후와 마찬가지로 1987년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출현하게 되었다.

    1960년 4월 이후 출현한 진보정당들이 내분과 5.16쿠데타에 의해 소멸된 것과 달리 1987년 이후 등장한 진보정당들은 보다 온건한 장애-법률적 제약과 대중적 거부감에 의해 생존을 위협 당해 왔다. 1988년의 민중의 당과 1990년의 민중당은 각각 생존에 필요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해산되었으며 1992년의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비롯한 일련의 창당시도들은 결국 수포에 그치고 말았다.

    1987년 이후의 변화, 특히 노동운동의 유례없는 활성화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정치세력의 결집과 진출은 불가능한 것인가? 그리하여 진보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보수정당들의 퇴행적인 경쟁구도는 탈냉전의 시대에도 한국정치의 특성으로 유지될 것인가? 1987년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정세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그 후 5년간 거듭된 실패는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회의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진보세력들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새로운 노력을 재개하고 있다.

    이 글은 1987년 이후의 변화 속에서 진보정당건설이 실패하고 있는 요인을 분석해내고 그것들이 현재의 정치조건 속에서 극복될 수 있을 것인지를 살펴 볼 목적으로 씌어졌다.

    1. 진보정당운동의 전사(前史)

    한국전쟁 이후 50, 60년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진보정당은 1956년에 진보당, 1957년에 민주혁신당, 1960년 4월 혁명 직후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사회혁신당, 통일사회당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정당들은 한국전쟁 이후 새롭게 형성된 한국 사회, 한국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기보다 이미 정치적, 사상적으로 단절된 40년대 좌익의 잔존세력과 그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진보당

    진보당은 1956년 1월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대통령후보가 216만표를 얻는 성공을 거둔 뒤 이를 바탕으로 1956년 11월 창당되었다. 진보당은 중도좌익과 한민당계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일부 우익 등 복잡한 인적 구성으로 출발하였으며 평화통일을 내세운 통일정책을 제외한다면 당시의 보수정당과 정책상 별 차이를 갖지 않았다. 주로 조봉암 개인의 정치력에 바탕한 상층연합의 성격이 강했던 진보당은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의 성과를 대중적 기반의 확대로 발전시키지 못하였으며 (진보당 사건의 공판기록에 의하면 57년 말 현재 당원 수는 1천명이 안 된다) 1958년 1월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조봉암이 검거되자 두 달 만에 와해되었다.

    제2공화국의 혁신정당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사회혁신당, 통일사회당 등 1960년 4월 혁명 직후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나타난 4개의 혁신정당들도 급진적인 통일 정책 외에는 별다른 실천력을 보이지 못했으며 인물 중심의 상층 정치활동과 고질적인 분파 대립으로 일관하다가 7.29선거에서 참패하고 결국 5.16 쿠데타로 소멸되고 말았다. 그후 합법적인 활동공간을 잃은 이들 잔존 좌익들은 분산고립 되거나 지하당 건설로 나섰으며 1, 2차 인민혁명당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해방전략당 사건, 남민전 사건 등으로 불리우는 집중적인 탄압으로 전전(戰前)세대는 사라져 갔다.

    군사독재정권 하의 혁신정당

    진보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으로 시작된 5.16 쿠데타 이후 1967년에 통일사회당, 1981년에 민주사회당, 1982년에 신정사회당, 1985년에 사회민주당 등이 혁신정당이라는 명분으로 건설되었으나 이들은 과거 진보정당운동의 맥과는 단절된 세력이었으며 군사독재 정권의 외교적 필요에 의해 배려된 정치적 장식물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분단의 고착화와 한국사회의 생성은 이념과 조직 양면에서 일체의 진보적 정치활동의 유산과 전통의 맥을 단절시켰다. 그러나 30년이 넘게 계속된 독재정권 아래에서 진보정당운동이 암흑의 시기를 보내는 동안 한국 자본주의는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가면서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싹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토양을 형성시켜 갔다.

    1. 진보정당건설 시도의 배경

    1987년 이후 전개된 진보정당건설을 위한 새로운 시도는 바로 그 해를 정점으로 이뤄진 국내외 정치환경의 변화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며 이는 다음 세 가지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첫 번째 요인은 6월항쟁으로 인한 군부독재세력의 퇴각과 민주화의 진전이다.

    1987년 1월부터 시작된 반정부 투쟁은 그해 6월 전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수백만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반군부독재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두환 군부통치에 반대하는 이 연합에는 도시 중간층으로부터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보수야당으로부터 급진적인 변혁세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광범한 정치세력이 결집하였다.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적인 해결보다 정치적 양보를 통한 해결을 택했다. 권력경쟁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가 수용되고 몇 가지 정치적 통제의 완화가 약속되었다. 이로써 군부통치세력은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새롭게 전개되는 권력경쟁의 참가자 지위를 보장받았다. 보수야당과 중간층도 이 타협에 만족하였으며 반군사독재 연합은 와해되었다.

    비록 이 연합이 다양한 요구를 내세운 광범한 세력의 결집에 의해 이뤄졌지만 이 연합의 공동요구는 군부의 권력독점과 강압적인 통치행태를 제거하는 것으로 제한되었으며 이 제한적인 요구는 ‘6.29선언’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에 따라 수십 년간 지속된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는 붕괴하기 시작하였으며 진보 대 보수의 새로운 대립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정치적 발전을 이뤄내자는 정세 인식 위에서 진보정당 건설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국가보안법 등 급진세력에 대한 정치적 규제와 이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은 지속되었지만 헌법개정을 통한 보장된 권력경쟁의 자유는 급진세력을 포함한 다양한 정치세력들에게 합법적인 영역에서의 정치활동의 가능성을 열어놓게 하였다. 비록 부족하나마 이미 확보된 정치적 자유를 바탕으로 ‘아직 덜 확보된’ 부분을 쟁취하며 나아가자는 것이 이들의 기조였다. 이리하여 1961년 쿠데타에 의한 박정희의 집권 이래 단절되었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시도가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요인은 노동운동의 고양이다. 3천여건의 파업과 천 2백여개의 노동조합 결성이라는 수치가 말해주듯이 87년 7월에서 9월에 이르는 석 달 동안 한국 노동운동은 폭발적인 고양기를 기록하였다. 1960년 4월혁명 이후의 1년간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인 1980년 봄의 수개월간을 제외한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초보적인 권리마저 행사하지 못한 채 사실상 무장해제 상태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왔다. 이들의 무장해제는 경제발전이라는 개발독재의 논리로 합리화되어 왔지만 실제 이들은 자신들의 무장해제가 하나의 주요 요인이 되어 이뤄진 급속한 경제발전의 성과 배분에서도 소외되어 왔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경제적 불만은 경제성장과 정비례하여 증폭되어 왔으며 1987년의 6월항쟁과 뒤이은 군부통치세력의 퇴각은 억제되어온 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리게 한 것이다.

    1987년 여름 3천건이 넘는 파업이 발생하였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는 임금인상과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기본적인 수준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기본적인 권리와 요구마저 경찰을 동원한 정부의 고압적인 태도와 기업주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면서 파업투쟁의 폭발적인 고양기는 91년 말까지 30여개월에 걸쳐 지속되었다. 이같은 장기적인 노동운동의 고양 속에서 노동조합의 활동은 유례없이 활성화되었으며 이는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라는 다음 단계의 과제를 조심스럽게 타진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단체행동에 대한 규제가 차츰 완화되면서 이들을 주요 조직기반으로 하는 진보정당건설의 시도도 활기를 띄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요인은 동북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이다. 한국에서 노동운동이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고양기를 맞이하는 30개월 동안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진영의 붕괴가 이루어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를 규정해 온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종식된 것이다. 한반도는 여전히 마지막 냉전의 섬으로 남았지만 사회주의진영의 몰락은 역사 오랜 한국의 반정부 운동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정부 운동 내부의 급진적인 분파에게까지도 소련은 더 이상 모델이 될 수 없었으며 갓 보급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이념은 재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교조적인 사회주의 이념이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반체제 운동은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가 차지했던 자리에 체제개량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비합법 지하조직은 정부의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무관심으로 인해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급진적인 변혁을 추구했던 세력의 다수는 자신들이 목표한 변화의 속도와 폭을 줄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결국 민주화의 진전과 노동운동의 고양,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의 정세변화는 각각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합법적이며 공개적인 대중정당, 교조적 사회주의를 배제하며 이데올로기적 개방을 정치 지평으로 하는 진보정당의 건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1. 계속되는 시도와 실패

    급변하는 정세의 여러 측면으로부터 동시적으로 요청되면서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시도는 더욱 고무되었다. 그러나 1987년 직선제 개헌에 따라 12월 시행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임박해서도 진보블럭은 창당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무소속후보를 출마시키는데 그쳤다. 1988년 3월 진보블럭은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민중의 당을 창당하였다. 1961년 쿠데타 이후 1967년 통일사회당, 1981년 민주사회당, 1982년 신정사회당, 그리고 1985년 사회민주당 등 스스로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세력들이 출몰을 거듭하였으나 이들 대부분은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처음부터 포기한 정치서클이었거나 군부집권세력의 공작에 의해 만들어진 장식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1988년의 민중의 당의 창당은 수십년간 단절되었던 진보정치운동의 재개를 알리는 역사적 의미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민중의 당은 당시 진보적인 정치역량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은 아니었다. 30개 지구당에 1천여명의 당원이 참가했을 뿐이었다. 민중의 당이 보다 급진적인 젊은 세대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출신자로 이뤄진데 반해 거의 동시에 창당된 한겨레민주당에는 진보블럭의 보다 온건한 일부 세력들이 참가하였다. 한겨레민주당도 60여개 지구당에 2천여명의 당원을 규합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민중의 당은 1988년의 총선에서 의석을 획득하지 못함으로써 50여일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지만 출마한 15개 지역구에서 평균 4.3%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연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선거 이후 민중의 당은 민중정당재건추진위로 전환하였으며 88년 9월 한겨레민주당과 통합하여 진보정당 결성을 위한 정치연합을 건설하였다.

    첫 번째 시도인 민중의 당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반정부 운동 내부에서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시도는 점차 활기를 띄고 있었다. 두 번째 시도는 한국 최대의 반정부운동조직이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내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반정부운동세력 다수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들은 1990년 4월 민중의 당, 한겨레민주당을 추진했던 세력들과 함께 민중의 정당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창당을 앞두고 보수야당과 통합하자는 파와 먼저 진보정당을 건설하고 보수야당과 연대해가자는 파가 대립하여 결국 통합파가 이탈한 가운데 90년 11월 민중당을 창당하였다. 51개 지구당에 2천여명의 당원이 참가하였다.

    민중당은 1991년 지방선거에서 42명이 출마하여 1명의 당선자를 내었다. 적은 출마자와 더 적은 수의 당선자로 민중당은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다. 13.27% 라는 꽤 높은 출마지역 득표율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민중당은 좌로부터는 무원칙한 유연성으로 비판받고 있었으며 우로부터는 과격한 이미지로 경계 당하고 있었다.

    1991년 새로운 시도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합법적인 노동자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1992년 1월 한국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5천여명의 노동운동가들이 결집한 이 세력은 노동자 등 하층계급을 자신의 조직적 기반으로 하되 다양한 이념의 공존을 인정하는 대중정당 건설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민중당이 노동자 등 하층계급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별도의 정당을 만들었으나 1992년 총선을 앞두고 결국 민중당과 통합하였다.

    민중당은 1992년 3월 선거에서 51명이 출마하여 출마지역 평균 6.5%의 득표율을 기록하였으나 한 석의 의석도 내지 못한 채 법적으로 해산당하였다.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의 패배로 민중당이 해산된 후 4년 만에 실시된 1996년 제 15대 총선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은 재건되지 못했다.

    1. 실패의 배경

    26년 만에 재개된 민주주의의 진전과 노동운동의 고양이라는 호조건 속에서 한국의 진보세력들이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것은 여러 요인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그러나 보다 핵심적인 요인은 주체형성의 문제, 지지기반 특히 노동운동의 문제, 정치적 환경 등의 문제로부터 찾을 수 있다.

    (1) 주체형성의 문제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시도는 반정부운동 내부에서 첫 번째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다. 진보정당운동은 오랜 세월 동안 반독재운동에서 형성된 진보적 성향의 정치세력들을 최대한 규합하는데 실패하였으며 이는 곧 진보정당 건설 동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87년에 이뤄진 일련의 변화들 특히 국내 정치상황의 변화로부터 반정부운동에 참가한 진보적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모두 동일한 결론을 끌어내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1987년 이후 반정부운동 내의 진보블럭은 이른바 독자정당파와 민주연합파로 크게 양분되었다. 교조적 사회주의분파와 트로츠키파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미미한 존재였다. 독자정당파와 민주연합파의 분열과 대립은 우선 6월항쟁 이후의 정세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부터 비롯되었다. 물론 이러한 정세인식의 차이는 보다 깊은 연원-한국자본주의와 정치권력, 북한정권 등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의 차이-을 갖는 것이었다.

    독자정당파는 6월항쟁과 군부통치세력의 퇴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갈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리고 이는 성장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요구이기도 하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는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민주주의와 반독재투쟁을 중심하는 과거의 반정부운동은 목표를 수정하여 이미 진행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개혁의 폭과 속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대립구도를 형성시켜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정세인식에는 민주주의적 개혁에 있어서 보수야당의 역할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평가가 첨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보다 많은 민주주의, 보다 빠른 속도의 개혁을 위해 집권 여당만이 아니라 민주적인 야당과도 대립하고 경쟁하는 진보정당의 건설을 필수적인 과제로 제기하였다.

    반면 민주연합파는 군부통치세력의 퇴각을 일시적이며 기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정세가 보다 복잡해졌을 뿐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는 여전히 유효하며 제 민주세력의 연합은 계속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수야당은 여전히 중요한 파트너였다. 보수야당의 상대적 진보성은 높게 평가되었으며 보수야당의 집권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발전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당연히 이들에게 보수야당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힘의 분산이며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진보정당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기 힘들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같은 정세인식의 차이로 인해 독자정당파가 진보정당의 창당을 준비하는 동안 민주연합파는 보수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이후 치러진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와 두 차례의 국회의원선거 그리고 한 차례의 지방의회선거에서 독자정당파는 진보정당 혹은 무소속 독자후보를 출마시켰고 민주연합파는 이들의 경쟁자인 보수야당을 지지하였다. 반독재투쟁의 핵심세력이며 오랜 동지였던 진보블럭의 분열은 진보정당건설을 추진하던 세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자연히 이들은 한국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반정부운동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없었으며 헌신적인 반독재투쟁으로 획득한 도덕적 권위도 독점할 수 없었다.

    (2) 노동운동의 문제

    1987년 대파업투쟁으로 시작된 노동운동의 고양이 진보정당운동에 미친 긍정적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실제 진보정당 건설에 참가한 주축세력은 노동자들이었다. 1992년의 한국노동당 결성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전체 중앙위원 중 절반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이후의 진보정당운동이 고양기를 구가하던 노동운동과 노동자대중의 지지를 받았다고는 전혀 말할 수 없다. 반대로 이 시기의 진보정당운동은 노동자들을 자신의 조직적 기반으로 모아내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이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하층계급의 정당을 표방한 진보정당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이유는 노동운동의 경제주의적 편향이다. 수십 년에 걸친 독재통치 하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이나 임금인상을 위한 파업의 권리를 사실상 박탈당해 왔다. 노동자들의 어떠한 단체행동도 경찰의 물리적인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물리적 억압에 전투적으로 저항하는 노동운동의 전통이 자리 잡아 왔다. 그러나 이 같은 외적요인보다도 내적요인 즉 노동운동과 노동자 의식의 발전은 전투적인 경제투쟁 과정에서 이뤄지며 따라서 경제투쟁에 집중해야 한다는 경제주의적 활동노선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정치적 승리나 정치적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패배주의까지 가세하면서 노동운동의 비정상적인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아직 경제투쟁에 보다 많은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며 ‘정치’는 시기상조라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두 번째 이유는 기업별 노동조합체제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일본 이외에 유례를 찾기 힘든 기업별체제는 노동통제 강화책의 하나로 도입된 것으로서 노동자들의 단결과 단체행동과 노동자의식을 개별 기업 내에 가두는 효과를 발생시켰다. 결국 기업별 체제 하에서 노동운동은 개별 사업주와의 경제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2만여명의 조합원이 참가하고 있는 울산 현대중공업노동조합처럼 해마다 전투적인 파업으로 전국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한국의 대기업노조들은 기업 내부의, 자신과 직접 관련된, 경제적인 이해관계에만 자신의 강력한 조직력을 행사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노조들의 이러한 노선은 노동운동의 경제주의적 편향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경제주의적 편향은 기업별체제라는 비옥한 토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1987년 이후 외형적으로 볼 때 급속도로 성장하고 활성화된 한국의 노동운동은 운동의 발전단계에 맞게 자신의 활동과 영향력을 사회전반과 정치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키지 못한 채 개별기업 내에서의 경제투쟁에만 매몰되는 기형적인 성장을 거듭해온 것이다.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선거에 조직적 참여를 포기하고 오히려 선거가 개별기업의 임금인상투쟁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것을 우려하는 노동운동은 진보정당운동이 당면한 두 번째 장애물이었다.

    (3) 정치환경의 문제

    진보정당운동이 직면한 또 하나의 곤란은 법적, 제도적 장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권력경쟁의 자유가 보장되었다고는 하나 엄격히 말해서 권력경쟁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의 부자유는 주로 신생 정치세력인 진보정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들이었다. 이념과 정치적 신조를 문제 삼아 북한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혐의를 씌우는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기능하였고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며 교사와 공무원들의 조직화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 18세, 19세의 진취적인 청년들에게는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고 있으며 진보정당이 자신의 차별화된 정책으로 지지를 모을 수 있는 정당투표제는 도입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전통적인 금권선거는 각종 법률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환경 속에서 약체인 진보정당은 강자들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경쟁에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1. 국민승리21과 새로운 실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승리21이 권영길후보를 출마시키면서 이 선거에 참가한 것은 1987년 이래의 독자후보운동의 일환이면서도 진보정당 건설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변화와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국민승리21은 무엇보다도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서민대중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형성 즉 진보정당의 건설을 장기적 목표로 하면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 제 15대 대통령선거에 참가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 진보정당운동이 봉착했던 주객관적인 장애요소들이 일정하게 극복되는 의미 있는 변화가 확인되었다.

    가장 특기할 것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 대중조직이 조직적 결의에 의해 진보정당 건설과 선거참가를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전의 진보정당운동이 실패했던 대중적 지지기반 확보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와 진전을 예고하는 것이다. 둘째, 그간 선거전술과 진보정당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견해 차이를 보여왔던 진보진영 내부의 다수가 정치방침의 통일을 이뤄내고 단일한 대오로서 국민승리21로 결집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주체형성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될 수 있다. 셋째,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이 철폐됨으로써 진보정당 건설에 걸림돌이 되었던 법적, 제도적 제약이 완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처럼 1997년을 전후하여 나타나고 있는 변화는 진보정당 건설의 주객관적 조건이 상당 정도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전의 선거대책기구와는 달리 국민승리21은 선거 이후에도 선거운동의 성과를 딛고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고 있으며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이 보장된 최초의 선거였던 98년 지방선거에서 소기의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변화들이 진보정당운동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야 할 미완의 과제들을 더 많이 남겨두고 있다.

    우선 넘어야 할 벽은 폭넓은 국민들의 이해와 참여와 지지를 확보해 나가는 일이다. 이제까지 진보정당운동이 직면했던 ‘국민이라는 벽’은 바로 분단 상황으로 인한 선입견과 오해였다. 이른바 레드컴플렉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1980년 대 후반 이래 사회주의권의 붕괴, 특히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한체제의 약화 등으로 인해 북한에 대한 체제우월감이 확산되면서 레드컴플렉스는 상당히 희석되었다. 따라서 지금 진보진영이 부닥치고 있는 국민의 벽은 정체성, 신뢰, 능력 등의 문제이며 87년 이래 재야운동 전반이 극복하지 못했던 활동방향과 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제15대 대선 참가 결정 이후, IMF체제의 등장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점차 거시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이해를 표현하고 관철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둘러싼 논란은 노동운동이 주요 경체주체로 이미 인정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전 국민적 관점, 전사회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동운동의 노력은 이런 관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증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것처럼 노동운동의 정치참여는 극히 일부 지역의 선진적인 경험으로 국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치제도의 개선에 관한 문제이다.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은 선거제도의 개선이라는 보다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혈연, 지연, 금권 등 퇴폐적인 기득권이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현재의 소선거구 다수대표제 하에서는 정치개혁은 물론 진보세력, 건전한 신진세력의 정치적 진출은 상당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최근 중대선거구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도입문제가 거론되고 있으나 기득권을 상당 정도 포기하게 하는 이러한 개혁법안이 정치적 기득권층에 의해 심의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에도 그 전도는 불투명하다.

    결국 지금 국민승리21이 주도하고 있는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새로운 실험은 재야운동의 구태의연한 활동방식을 극복하고 진보정치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함으로써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일, 정치세력화를 위한 노동운동의 적극적인 참여, 선거제도의 개선 등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어떤 방향으로 개선되는가에 달려 있다.

    1. 전 망

    1987년 이후 시작된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고양은 진보정당운동의 활성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진보정당 건설은 덜 진전된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기형적인 성장이 형성한 벽에 갇혀 여전히 재시도 상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민주화의 진전에 따른 정치환경의 개선과 노동운동의 정상적인 발전은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도 전력을 집중해야 할 과제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제까지 여야를 막론하고 거대 정당들의 기득권은 정치환경 개선의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시간에 맡기지 않는다면 이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은 시민운동, 노동운동 등 조직화된 대중의 캠페인과 압력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결국 진보정당운동은 인적 자원의 충원과 지지기반의 확보만이 아니라 정치환경의 개선을 위해서도 노동운동, 시민운동의 정상적인 성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특히 노동운동이 기업별 분산체제와 경제주의적 편향을 극복하고 자신의 활동을 정치, 사회의 각분야로 확장하는 과정은 곧 진보정당의 물적, 인적 기초를 구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어깨 위에 진보정당의 미래가 얹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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