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활동과 예술 결합한 프랑스의 거인
        2006년 05월 01일 07: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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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11월 9일 프랑스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은 모든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국민가수이자 국민배우인 이브 몽땅(Yves Montand 1921∼1991)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비롯해 그의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울려 퍼졌고 텔레비전에서는 그가 출연한 영화가 방영됐다.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해 "그와 함께 우리시대의 위대한 목소리와 배우로서의 뛰어난 재능이 사라졌다"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샤를 드골 사망 이후 프랑스는 다시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브 몽땅은 이처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였지만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편에서 좌파 정치활동을 벌여 온 것이었다. 프랑스 공산당(PCF)의 당원이자, 정치영화의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정치활동과 예술을 결합시킨 프랑스 최고의 좌파 예술가였다.

    이탈리아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

       
     

    이브 몽땅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지오반니 리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오반니 리비는 이탈리아 농노 출신으로 1921년 당시 급부상하던 사회당의 급진적 다수파가 결성한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해 중부 토스카나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해 10월 그의 셋째 아이 이브 몽땅이 이보 리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당시 이탈리아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들불처럼 번졌지만 1차대전 이후 반동의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앞세운 파시스트당이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2년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과 검은셔츠단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무솔리니는 집권 후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는데 지오반니 리비는 1924년 파시스트당에 소환돼 "협력을 하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로 피신했다. 그는 원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미국 이민법의 개정으로 이민이 불가능해지자 마르세이유에 정착해 1929년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11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빵공장에 다녀야 했던 이보는 15살 때부터 누이인 리디아의 미용사 일을 도우며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 프랑스로 건너와서도 공산당 활동에 열성이던 아버지와 공산당에서 전업활동가로 일하던 형 길리아노의 영향으로 인해 이보는 약자의 편에 서있는 좌파가 정당하다는 인식을 점점 굳혀갔다.

    제철소에 노동을 하던 1938년 17살의 이보는 우연히 마르세이유의 한 밤무대에서 공연 전 분위기를 잡는 가수 역할을 하면서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예명을 이브 몽땅으로 지었다. ‘몽땅’은 그가 어렸을 때 밖에서 뛰어놀면 집안에 있던 어머니가 창문가에서 그를 "이보! 올라와(monta)"라고 불렀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 당원 가입

    이브 몽땅은 점차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변두리 극장이긴 했지만 자신만의 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2차대전으로 인해 그는 나치의 강제노역에 동원돼야만 했다. 파리가 함락된 이후 그는 원래 이름 리비가 유태인 이름 레비(Levi)와 비슷해 독일 비밀경찰(게슈타포)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44년 2월 수용소를 탈출해 파리로 간 이브 몽땅은 파리에서 가수로서 명성을 날리게 됐고 1945년 8월 전설적인 샹송가수 에디뜨 피아프와 만나게 됐다. 에디뜨 피아프의 도움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브 몽땅은 영화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할리우드가 그에게 주목하기도 했지만 당시 매카시즘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미국은 가족의 공산주의 전력을 들어 입국을 불허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가수이자 배우로서 몽땅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1951년 그는 당시 인기 여배우인 시몬느 시뇨레와 만나 이듬해 결혼을 했다.

    그가 공산당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쯤이었다. 그는 1950년 원자폭탄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으로 가입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공산당 당원이 된 것이다. 그의 아내 시몬느 시뇨레 역시 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해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몽땅은 가수,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집회에 참가해 연설을 하면서 정치적인 활동을 벌였고 1956년에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탈린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는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이 있었던 이 때부터 소련에 대해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매카시즘의 열풍이 잦아들었던 1960년 그는 아내인 시몬느가 상을 받기 위해 로스앤젤리스에 머무는 동안 마릴린 먼로와 ‘사랑합시다(Let’s Make Love)’라는 영화를 찍었다. 영화보다는 그와 마릴린 먼로와의 염문이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소, 체코침공에 항의 탈당

    1960년대 그는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동참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968년 소련군이 탱크를 밀고 체코를 침공한 것에 반발해 그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 <Z> 포스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좌파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 출신의 정치영화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의 <Z>와 <계엄령>에 출연해 군사독재와 미국의 제3세계 정치개입을 비판하는 한편 피노체트 독재시절 칠레의 민주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산티아고를 방문해 샹송을 부르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또 1980년대에는 폴란드 연대노조 지원에도 힘썼다.

    그가 사망한 지 15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샹송가수나 명배우의 경지를 뛰어넘어 프랑스인들의 가슴 속에 거인으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지칠 줄 모르는 사회적 발언과 활동에 있었다.

    1980년대 프랑스인들은 이브 몽땅을 대통령 후보로 거론하기도 했으나 그는 죽는 날까지 영화에만 전념했다. 1991년 11월 8일 장 자끄 베네 감독의 영화를 찍고 있던 그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다음날 파리교외의 상리병원에서 70세의 인생을 마쳤다. 그는 연인이었던 에디뜨 피아프와 시몬느 시뇨레가 묻혀있는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 라 셰즈에 안장됐다.

    국내 언론에서는 그가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이후 가장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말년에 자서전 <나는 잊지 않았다>에서 회고한 것처럼 일평생 동안 좌파의 길을 지킨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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