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내리교회,
    신망과 열정 위에 세워져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사람들
        2018년 07월 19일 08: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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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마다 교회에 신도들이 꽉꽉 차는데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사랑과 신뢰가 높지 않다면 종교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반대로 신도들이 교회 좌석의 10분의 1만 채워졌지만 그 사회에 전반적으로 사랑과 신뢰가 넘쳐난다면 믿음이 약하다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전자는 대한민국이고 후자는 덴마크다.”(<오마이뉴스> 대표 오연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p. 147)

    오연호 대표는 교회집사로서 한국교회를 진지하게 염려하는데,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인천내리교회의 역사에서 정확한 진단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담임목사들이 보통 2-3년밖에 시무하지 않았고 해방 후에 세 번이나 분열하였는데 어떻게 내리교회가 한국교회의 어머니교회로 존재할 수 있었나?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청일전쟁(1894-95)이 일어나자 내리교회 인근에 살던 주민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너나없이 피난길을 나서게 됐다. 허둥지둥 도망치던 사람들이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교회에다가 귀중한 문권(文券)과 가재도구, 재산 등을 맡겼다가 여러 달 후에 피난살이에 돌아와 보니 모든 재산을 하나도 손상됨이 없이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세인들의 신망을 얻은 교회는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려 급성장하게 됐고, 급기야 아펜젤러가 지었던 White Chapel을 허물고 1년 6개월에 걸쳐서 웨슬리 예배당을 신축하는 단계까지 급성장하게 됐다.”(내리선교 130년 역사화보집, P44)

    그리고 내리교회가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시작한 많은 사역들이 공동체를 든든히 세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891년 한국 최초의 예배당(White Chapel) 건립으로 시작하여 초등학교인 영화학교 설립, 여선교회와 기독청년회 조직, 신학전문지 <신학월보> 발행, 한국인 최초의 목사 안수(김기범 목사)와 해외선교사 하와이 파송, 해외 개척교회 설립이 처음이었고, 휴전 직후 1954년 한국 최초로 헨델의 메시야 전곡을 연주하였습니다. ‘최초’는 관습이나 경계를 넘어서려는 용기와 도전의식, 열정에서 나온 것이기에 참 소중한 역사입니다.

    내리교회(그림=이근복)

    또한 사람들이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인물들이 내리교회를 유지하는 저력이었습니다. “한 교회의 역사는 목회자들만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우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되기에 앞으로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꾸준히 채록되거나 전수되어야 마땅하다.”는 김흥규 담임목사의 역사화보집 발간사와 잘 연결됩니다. ‘내리를 빛낸 인물 130인’을 살펴보다가 눈에 들어온 몇 분이 있었습니다.

    김기범 목사와 딸 김애마 교수

    인천 최초의 조선인 전도자 노병일의 전도를 받아 인천 최초의 결신자가 된 그는 1901년 5월 14일, 목사 안수를 받아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엡웟청년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애국애족의 정신을 드높였고, 주일학교는 크게 발전했으며 자립교회를 지향해 최고의 교회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막내딸 김애마는 이화여대 사범대학 초대 학장 등 42년을 봉직하면서 대한 YWCA 회장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같은 내리 출신으로 총장을 지냈지만 친일에 나섰던 김활란과는 비교되는 고귀한 인품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신홍식 목사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으로 2년 6개월의 만기복역 후 1922년 봄에 내리교회의 9대 담임자로 부임합니다. 엡웟청년회를 재조직했고, 소년 척후대(보이스카웃)를 처음 조직해 교회에 새바람을 일으켰습니다. 1923년에 친필로 기술한 ‘인천내리교회역사’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지조 높은 목회자요, 독립운동가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몇몇 인사들 중에 한분으로 1962년, 대한민국정부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길용 기자

    내리교회가 세운 영화학교 출신으로 배재학당과 일본 도지샤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1919년 철도국에서 근무할 때 임시정부 기밀문서를 전달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시절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하여 투옥되었고 창씨개명 반대로 옥살이하다가 광복으로 출옥합니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는데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습니다.

    이유선 교수

    신학생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는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중략)”입니다. 허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결단이 부담스러워지면 ‘어디든지’를 다른 말로 바꾸어 부르기도 합니다. 이 찬송가를 작곡한 이유선 교수는 내리교회 이익모 담임목사의 아들로 시카고 음악대학원을 수료 후 중앙대학교 음대교수로 20년 근속하며 내리교회 찬양대에서 봉사하였습니다. 40여곡의 성가곡과 가곡 30여곡, 동요 17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조영호 장로

    이 분을 알아보고 참 기뻤습니다. 노동운동과 고난받은 이들의 대모인 조화순 목사님의 부친인 까닭입니다. “나는 무식해서 아무 것도 모르지만, 성경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써 있더라. 그 말씀을 너희들을 위한 교육의 목표로 삼겠다.”고 하며 성경말씀을 교육의 지표로 삼았고, 부부 간에도 큰 소리 한 번 오가는 일없이 온화한 가정생활의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려운 시절 많은 사람들에게 식사 대접하기를 꺼리지 않고, 성경말씀대로 예수님께 하듯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니 이런 삶이 따님인 조화순 목사님에게 이어져, 갖은 고초와 여러 번의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고 평생 가난한 이들과 동행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김흥규 담임목사께서 교회 복도에 걸린 사진들을 직접 설명해주었는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제물포 웨슬리예배당의 고아한 모습, 내리역사전시관, 선교 100주년 기념성전의 생생한 사진들과 파이프 오르간, 폭풍의 언덕의 초기 담임목사 흉상 등에서 매년 팔천 명이 탐방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초기 내리교회가 서해권 선교의 전진기지였듯이, 새롭게 열리는 동북아 시대에 한민족의 공동평화와 번영을 여는데 기여하여 “가장 오래된, 그러나 가장 젊은 교회”의 기치가 빛나길 기원합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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