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
[역사의 한 페이지-3]전쟁이라는 비극 속의 한 단면
    2018년 07월 18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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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봉출을 만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1952년 1월 추운 어느 날이었다. 보낸 이는 권봉출, 수신인은 경북 예천에 사는 그의 아버지 권주선! 전쟁 중 포로수용소에서 온 편지라니!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오늘 이야기는 이 편지 한통에 얽힌 사연이다.

1년 전 ‘권봉출’이란 인물과 관련된 자료들을 일괄 수집하였다. 자료들의 대부분은 각종 상장이나 졸업장, 또는 성적표들이었는데 내가 이 자료들을 수집한 이유는 그 속에 섞여 있는 한 통의 특이한 편지 때문이었다. 검열인이 뚜렷이 찍혀있는 이 편지는 뜻밖에도 6.25전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권봉출이 고향인 경북 예천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였다. 수용소에 갇혀있는 전쟁 포로들이 고향에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전쟁 포로의 고향이 경북 예천이라는 사실도 놀라운 것이었다.

[사진설명] 권봉출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경북 예천의 그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의 겉면(왼쪽, 박건호 소장) / 편지 겉면 오른쪽 위에 찍힌 검열도장이다. ‘1951년 12월 28일’이라는 날짜도 찍혀있다.(오른쪽)

권봉출은 경북 예천 출신으로 어떻게 인민군 포로가 된 걸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그가 전쟁 발발 전 월북하여 인민군에 정식으로 입대하여 전쟁 발발과 함께 내려왔다가 잡힌 경우이거나, 아니면 전쟁 발발 후 남한에서 인민군에 편입된 경우일 것이다. 그 중 첫 번째 가능성은 매우 낮다. 왜냐하면 그의 자료들에 섞여있는 성적표들을 보면 권봉출은 예천서부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바로 예천공립농업중학교로 진학하여 계속 공부한 것으로 보이는데, 6.25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50년 5월 27일 발급된 통지표가 수집 자료 속에 섞여있기 때문이다. 봉출은 전쟁이 터졌을 때는 분명히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그렇다면 봉출은 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봉출은 어떻게 인민군에 들어갔던 것일까?

6.25전쟁과 의용군

권봉출의 인민군 편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6.25전쟁 때의 ‘의용군(義勇軍)’이란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전적으로 의용군은 ‘국가나 사회의 위급 상황에서 민간인의 자발적 참여로 조직되는 군대’로 정의된다. 의용군하면 보통 우리들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학도의용군’을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6.25전쟁 때 또 하나의 의용군이 있었는데, 북한 인민군이 남한을 침략했을 때 남한에서 징발한 청장년으로 구성한 부대도 ‘의용군’이었다. 이름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군대로 되어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강제로 징발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북한이 남한의 청년 학생들을 징발한 결정적 이유는 남북한의 인구수가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광복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 중 38선 이남의 남한 인구가 2천만 명이고, 북한 인구는 1천만 명이었다. 대체로 남북의 인구는 2:1 정도로 보면 된다. 지금도 남북 인구는 남한이 5천만 명이고 북한은 2천5백만 명 정도이다. 그러니 북한 입장에서는 6.25전쟁 발발 초기 남한을 장악해가면서 총을 들 만한 청장년이나 학생들을 징발해 전투력 강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 남한 출신의 젊은이들이 의용군의 이름으로 인민군과 함께 싸우다가 잡히면 그는 영락없이 북한 인민군 포로로 수감되는 것이다. 여기에 6.25전쟁의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푸른 하늘을]이라는 시로 유명한 4.19의 시인 김수영도 이렇게 의용군으로 징발되어 싸우다가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사학자 김성칠이 쓴 6.25일기에는 이런 의용군 모집에 대한 글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는 전쟁 중 석 달간 서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를 겪은 내용을 일기에 꼼꼼히 기록하였다. 먼저 1950년 7월 11일자 일기의 일부 내용을 보자.

“(북한) 당국은 그 조직적인 모든 기관을 동원하여 애국적인 청년 남녀는 모두 의용군의 대열에 나서라고 외치고 있다. 마을에선 동민을 모아 보내고, 학교에선 학생들을 끌어 보내고, 직장에선 종업원을 채찍질해 보내고, 그래도 부족함인지 가두에서 젊은 사람을 붙들어 보낸다 하여 큰 공황(恐慌)들을 일으키고 있다. 이즈음 며칠은 그 때문에 그런지 거리에 젊은 사람의 내왕이 부쩍 줄어들었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96페이지)

당시 인민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자발적이든 강압적이든 다수의 남한 청년과 학생들이 의용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김성칠의 7월 12일자 일기에는 왜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의용군을 지원했는지의 저간의 사정을 짐작케 하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한다.

“몇몇 세포위원들이 번갈아 등단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우리는 이 악독한 미제국주의와 그의 주구들인 이승만 매국도당들을 쳐부셔야 한다”, “우리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전취하려는 이 성스런 대열에서 낙오하려는 비겁한 자는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는 한 놈도 없을 것이다. 만일에 그러한 놈이 있다면 민족의 이름 아래 엄정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하면 대열 중에서 “옳소! 옳소!”하고 더러는 “우리는 먼저 그러한 반동분자와 가열하고도 무자비한 투쟁을 하여야 할 것이요”하고 공중을 향하여 굳센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이리하여 장내는 이상한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사회자가 “그럼 우리는 전원 의용군으로 지원합시다”하면 “찬성이요, 찬성!” “찬성이요!”하는 소리가 빗발치듯 한다. 너무 감격하였음엔지 더러는 한 사람이 두 번 세 번 연거푸 찬성을 부르짖는다. 장내의 분위기는 급각도로 전환하여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살얼음이 돈다.

사회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전원 찬성인 것 같소만 만일에라도 우리의 결의에 반대 의견이 있는 동무는 말해주시오”하고 다짐을 받는다. 그러면 학도호국단 시절의 감찰부원 못지않게 우악스럽게 생긴 친구들이 그 우락부락한 눈망울을 굴리면서 “반대! 반대가 있으면 어디 말해봐”하고 자못 못마땅한 듯 혼잣말처럼 배앝는다.

이리하여 30초 혹은 1분이 지나면, “그럼 반대 의견이 없는 모양이니 만장일치로 가결이오”하는 선언이 내린다. 다음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서명날인으로 예정한 절차를 밟고 그리고는 미리 마련해둔 “00중학교 전원 의용군 지원”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고 그 길로 곧 심사장으로 향한다.

어떤 여학교에선 이러한 절차로 궐기대회가 끝난 뒤 학생들이 서로 붙안고 통곡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건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것이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99∼100페이지)

많은 남한의 학생들은 이런 방식으로 전쟁터로 내몰렸다. 전쟁터도 생명을 걸어야 되는 곳이지만, 이런 분위기의 궐기대회에서 반대 의사를 표하는 것도 역시 생명을 걸어야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청년과 학생들이 의용군으로 지원하면 형식적인 심사를 거친 후 바로 의용군으로 출전을 하게 된다. 그러니 부모형제와 변변히 인사를 하고 떠났겠는가? 그러면 그 부모들은 학교에 나간 자녀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 전시 상황은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를 합리화시켜버린다.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그런 사사로운 감정과 불평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이렇게 부모와 자식은 생이별을 하게 된다.

포로수용소, 또 하나의 전쟁터

다시 권봉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같이 수집된 호적자료에 따르면 권봉출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4월 예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권주선, 어머니는 함경도 갑산 출신의 강만순이었고, 위로 8살 많은 누이 권수기가 있었다. 이렇게 단출한 네 식구로 살아가던 봉출은 해방 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7월 예천서부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예천공립농업중학교에 진학하였다. 6.25전쟁이 터지던 1950년에 봉출은 농업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고, 나이는 17세였다. 전쟁 직후 권봉출은 고향인 예천에서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에 강제 편입되었다. 편입된 과정과 일시, 장소는 편지 내용이나 수집자료로는 알 수가 없다.

[사진설명] 권봉출이 1948년 7월 예천 서부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받은 졸업장이다. (박건호 소장)

편입된 과정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최대한 찾아보는 것이 글 쓰는 대상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자 예의일 것이다.

납북인사 데이터베이스에 혹시 권봉출에 대한 기록이 있을까? 찾아보자.

6.25전쟁 납북가족협의회가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www.kwafu.org)에는 전쟁 중 납북자를 검색해 볼 수 있다. 이 데이터베이스에는 총 11만 2천명 정도의 납북자 명단이 있는데, 그 중 ‘1950년 서울 피해자 명부’는 권봉출과 무관하다. 그는 당시 경북 예천에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있다면 ‘1952년 피납치자 명부’가 가장 유력할 것이다. 이 명부는 1952년 대한민국 정부가 휴전회담에서 납북자 송환을 요청하기 위하여 작성한 최초의 전국단위 납북자 명부로 가장 많은 82,959명의 명단이 수록돼 있고, 특히 의용군 명단이 가장 많이 포함된 명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검색란에 ‘권봉출’로 검색을 해 봤더니 놀랍게도 납북자 명부에 권봉출의 이름이 뜬다. 거기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권봉출(權鳳出)은 17세 학생으로, 주소는 예천읍 청북동 이구이다. 납치일은 1950년 8월 25일, 납치 장소는 경북 예천군 이구이다. 이 편지를 쓴 주인공과 고향 주소가 일치한다. 그리고 같은 날, 같은 마을에서 총 25명이 납치된 것도 이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고 그 중 김종성, 박종진은 17세로 권봉출과 같은 나이였던 것으로 보아 동리의 친구였을 것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봉출의 편지 내용 중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는 장난과 상호간의 정으로서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내고 있다는 부분에서 언급한 고향 친구들도 그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설명] 6.25전쟁 납북가족협의회 홈페이지의 납북자 명부에서 검색해보면 권봉출은 1950년 8월 25일 고향 마을에서 의용군에 강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권봉출의 인적 사항이 편지를 쓴 인물과 정확히 일치한다. (납북가족협의회 홈페이지 캡쳐사진)

이렇게 권봉출은 전쟁이 일어난 지 꼭 두 달 뒤인 8월 25일 동리 친구 김종성, 박종진 등과 함께 의용군으로 강제 징발된 것이다. 8월 말 당시 전황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인민군과 국군·UN군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봉출과 친구들은 평생 처음 잡아보는 총을 들고 국군·UN군뿐만 아니라 전쟁의 두려움과도 싸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9월 28일 서울 수복을 계기로 북한군이 고립되었을 당시 봉출은 포로로 잡힌 것으로 보인다.

편지 내용을 통해 유추해보면 봉출은 잠시 부산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봄이 되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거제도 제62수용소 3대대 4중대 4소대! 이것이 포로수용소 내 소속이었으며 그의 포로번호는 52203번이었다.

이제 포로수용소에서의 봉출의 하루하루를 상상해보자. 그는 대한민국 경북 예천 출신의 학생이었으나 전쟁 중 타율적이든 자발적이든 북한군을 도와 싸웠던 의용군으로 잡혔고, 현재 신분은 전쟁 포로이다. 그런데 인민군 포로라 하더라도 순수 인민군 포로가 있는가 하면, 남한에서 의용군으로 강제 편입되어 포로로 잡힌 이들도 있어 그 성격이 동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어떤 포로들은 인공기를 흔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승만 만세를 외쳤고, 또 어떤 이들은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 흔히 말하는 공산포로와 반공포로로 편이 나뉘어져 연일 싸우고 린치가 가해졌다. 수용소 내부는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이 때문에 수용소 측에서는 아예 포로들을 공산포로와 반공포로로 격리수용 할 수밖에 없었다. 봉출은 반공 포로로 분류되어 수용되었음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사진설명]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모습.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보이므로 공산 포로들로 보인다. (위, 정부기록사진집) / 1952년 7월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태극기를 들고 열렬히 환영하는 것으로 보아 반공포로들로 보인다. (아래, 정부기록사진집)

그런데 전쟁 발발 약 1년 뒤인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에서 이 포로 송환 문제가 가장 큰 쟁점으로 떠올랐다. 군사분계선 문제가 4개월 만에 타결되었다면, 포로 송환 문제는 무려 18개월을 끈 쟁점이었다. 쟁점이 된 이유는 위에서 말한바 포로의 성격이 균일하지 않다는 6.25전쟁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공산군측은 당시 국제적인 관행이었던 제네바협정이 규정한 바 ‘자동송환’을 주장했다. 북한군 복장을 입고 싸운 포로들은 모두 북한으로 돌려받고, 국군 포로들은 모두 남한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것이다. 매우 간단한 방식이다. 그러나 북한군 포로 중에는 반공포로가 있지 않은가? 권봉출 같이 의용군으로 징발되어 싸우다가 잡힌 포로들을 북한군 포로라는 이유로 북으로 보내면 그들은 가족도, 학교도, 직장도 없는 북한에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당시 UN군을 대표한 미국은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확인해서 가고 싶은데 가게 하자는 ‘자유송환(자원송환)’방식을 주장하게 된다.

나중에 결국 자유송환 방식으로 결정이 되는데 전쟁포로는 남쪽을 선택할 수도, 북쪽을 선택할 수도, 그도 저도 싫으면 중립국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 모두를 버리고 중립국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된 것도 이런 결정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중립국에 도착하기 전에 바다에 자기 목숨을 던져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사진설명] 몸에 태극기와 멸공, 애국이라는 글자를 문신으로 새긴 반공 포로. 이 포로에게는 남쪽에 남는 것이 이토록 절박했다.(위, 미국 국가기록보관소 사진) / 남쪽에 남겠다는 포로와 북으로의 송환을 설득하는 북한군 대표. 자유 송환으로 포로송환 방식이 결정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아래, 미국 국가기록보관소 사진)

권봉출의 편지

1951년 12월13일 목요일 포로로 수용된 지 벌써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수감된 봉출은 의용군으로 편입되어 고향 예천을 떠난 후 처음으로 부모님께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는 1년 반이나 떨어져 있던 고향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주소는 모두 한자로 썼고, 편지 내용은 한글이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5개월이 지났으나 포로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양측이 계속 실랑이를 벌이고 있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제 수용소 생활도 익숙해져 큰 어려움이 없다.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도 있어 견디기가 훨씬 편했다.

이 편지의 겉면에는 검열을 거쳤다는 뜻의 ‘Censored’라는 글자의 도장이 찍혀있고 그 밑의 날짜는 12월 28일로 되어있다. 봉출이 편지를 쓴 후 보름 뒤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해를 넘겨 1952년 1월 중에나 그리운 그의 부모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생사를 알지 못했던 그의 고향 부모는 이 편지를 받고 비록 포로로 잡혀있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는 소식에 감격해마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봉출은 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 아닌가?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1952년 새해는 그들 가족에게는 축복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고향 부모에게 전달된 봉출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사진설명] ‘부모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권봉출이 쓴 편지. 연필로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썼다. (위. 박건호 소장) / 권봉출 편지의 일부분 확대(아래)

부모님 전상서

시소(시세?)가 복잡하고 추운 겨울이 닥친 이때 부모님께서는 몸 성히 계시옵나이까?

그리고 팔십이 가까운 할머니는 어떠신지, 단 세 식구의 가족일지라도 누구 한분 벅차게 일할 분 없이 가사에 얽매어 때에 따라서는 갖은 풍파와 고생은 얼마나 계시며 또한 불효 이 자식이래야 단 하나 있는 것 집을 떠난 뒤 부모된 죄로 하루하루에 닥치는 걱정과 생각은 얼마나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집 떠난 이후 아무 몸에 탈 없이 내 고향에서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툭툭한 이불에 적당한 식사의 유엔의 원조로서 몸 건강히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는 장난과 상호간의 정으로서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가까워오는 석방의 기일을 고대하고 있을 따름이니 부모님께서는 아무 걱정 없이 세 식구 둘러앉아 웃음으로 지내는 가정을 이룬다면 타향에 있는 이 불효자식일지라도 손꼽아 비나이다.

그리고 큰집 가족들은 몸 편히들 계시고 작은 형님은 집에 계시는지 걱정이 되며 정다운 큰아버지, 큰어머니, 큰 형님은 몸 편히 잘 계십니까? 부디 저의 걱정은 마시고 몸 편히 계십시오. 작년 겨울은 몸 편히 부산에서 지냈고, 올 봄에 부산에서 거제도로 이동 올 때 부산 계시는 고모와 고모부를 만났을 때 뜻밖의 일이라 무한이 울던 그 얼굴이 지금도 사무칩니다. 피난 내려온 누나도 어떻게 해서 고모네 집에 와 있다는 걸 얼핏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자식의 부탁은 몸 성히들 계시다가 제가 돌아 갈 때는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화락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혼자 있는 아주머니가 그 여식애를 데리고 얼마나 고생이겠습니까? 그리고 정다운 동리 사람들에 안부 드리며 이만 그칩니다. 몸 편히 계십시오.

1951년(4281년) 12월 13일

자식 봉출 씀

봉출은 편지를 쓰며 정든 고향산천과 가족들이 생각나 연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열 일곱 학생이 겪기에는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런데도 편지에는 부모를 위한 마음인지 고생스럽다는 말을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편히 잘 지내고 있다고 부모를 안심시키고 있다. 전쟁은 이렇듯 어린 학생을 의젓한 청년으로 바꿔 놓았다. 그리고 그는 ‘가까워 오는 석방의 기일을 고대’하고 있으며, 돌아가서 다시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될 희망을 적어 놓았다.

봉출이 당시 전개되고 있던 휴전 협상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곧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루 하루를 버텼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의용군으로 싸우다 잡힌 예천 학생 권봉출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이 편지 한 통은 당시 한국인의 일상적인 삶을 파괴해버린 6.25전쟁의 비극의 한 단면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후 그가 이승만 대통령의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 때 탈출했는지 아니면 휴전협정 체결 후 정식으로 심사를 받아 자유의사에 따라 고향 예천으로 돌아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쟁이 끝날 즈음에 탈출 아니면 석방 둘 중 하나로 풀려났을 것이고 비로소 그는 가족과 눈물겨운 상봉을 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수 없다.

혹시나 싶어 ‘예천 권봉출’이란 검색어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2007년도 예천에서 ‘전(前) 이장 권봉출’로 소개된 할아버지 사진이 하나 뜬다. 그가 포로수용소 편지의 주인공이라면 1932년생이므로 70대 중반일 것이다. 나이는 거의 비슷해 보인다. 계속 예천에 살았다면 가능성이 높겠지만, 단정할 수 없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났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을 것이다. 보통 어떤 인물의 일괄 자료가 경매에 나오는 경우는 그 자료의 주인공이 사망했을 때 유족들이 그 자료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폐기하거나 혹은 이렇게 경매에 내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번도 만나 뵌 적은 없지만 권봉출 할아버지의 명복을 빈다.

또 하나의 의용군

권봉출의 편지 이야기는 끝났다. 아쉬워 사족으로 붙이는 글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의용군이라고 하면, 인민군 의용군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이 ‘학도병’으로도 불리는 ‘학도의용군’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학생 신분으로 국군과 함께 인민군에 맞서 전투에 참여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6.25전쟁 당시 인민군과 국군만 서로 싸운 것이 아니라 남북의 수많은 학생과 청년들도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피 흘리며 싸웠던 것이다.

[사진] 인민군들이 의용군의 이름으로 남한 청년들을 끌고 갔지만, 또 한편 남한의 학생들은 학도의용군이라는 또 다른 의용군으로 전장에 갔다. 사진은 학도의용군 모습으로 총에 걸린 태극기가 보인다.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2HBK&articleno=13738597)

이러한 학도의용군이 치른 전투 중 가장 유명한 전투로 포항여중전투가 있다. 이 전투는 1950년 8월 10일에서 11일까지 71명의 학도병이 M-1 소총 한 자루와 실탄 200여발로 군의 지휘와 지원 없이 11시간의 긴 사투 끝에 48명이 전사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2010년 개봉한 [포화 속으로]라는 영화로도 소개된 바 있다.

이 포항전투가 끝나고 현장을 수습하러 갔던 여군 정훈요원은 학도의용군 전사자의 품속에서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수첩의 주인은 동성중학교 3학년 학생으로 전쟁에 참전한 이우근이었다. 이우근은 1950년 7월 25일 대구에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 후 보름 만에 전사하였다. 그가 남긴 수첩에는 매일 매일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적혀 있었다. 인민군 의용군으로 참전한 권봉출의 편지도 소개했으니, 학도의용군 이우근의 편지도 소개하는 것이 공평하고 짝이 맞을 것 같아 소개한다. 게다가 두 청년 권봉출과 이우근 모두 중학교 3학년으로 같은 나이였다.

어쩌면 두 학생은 같은 전선에서 서로 싸울 수도 있었다. 이우근이 전사한 8월 11일로부터 14일 뒤에 예천에서 권봉출이 의용군으로 강제 편입되었으니 둘이 직접 마주쳤을 리는 없었겠지만, 당시 전선에는 수많은 권봉출과 또 수많은 이우근이 있었다. 전쟁의 비극이다. 어쨌든 이 두 학생의 편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육성으로 증언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학도 의용군 이우근의 수첩에 쓰여진 부치지 못한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드려 이글을 씁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 하고 부르며 어머님 품에 털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를 문득 생각 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어머님!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님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왠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개걸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담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사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사진설명]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이 귀국하면서 기념품으로 사갔던 손수건이다. ‘Returned from Hell’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 미군들에게도 한반도는 지옥이었지만, 동족끼리 총부리를 들이대고, 가족끼리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던 이 땅의 민중들에게는 더더욱 끔찍한 지옥이었다. (박건호 소장)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강남대성학원의 역사강사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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