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불편한 이유
[종교와 사회]'우물 안 개구리' 우화
    2018년 07월 16일 09: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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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경기가 오늘 새벽의 결승전과 프랑스의 우승으로 끝났다. 젊은 시절 축구를 좋아해서 이러 저리 뛰어 다니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넓은 운동장, 시원한 바람, 격한 몸싸움, 통쾌한 골인, 다져지는 동지애 등등, 축구는 특히 남자들에게는 성장기의 필수적인 운동이 아닌가.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지만 축구를 통해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고, 친구나 동료들 간에 깊어지는 우정, 유대감을 통해 사이가 좋아지는 등, 그 좋은 점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을 보면서 축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국가 간의 경기이니 자기 나라의 명예를 걸고 꼭 이기기를 어느 나라나 바라기에, 뛰는 선수들이나 응원하는 국민들이나 그 뜨거운 열기가 이해는 된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반칙과 거짓 몸짓, 불공정한 심판의 판정 등을 보면서 축구경기가 이래서 되겠는가 생각된다.

자기가 봐도 분명히 골인인데 아니라고 우기는 골키퍼, 살짝 손을 댔을 뿐인데 나가떨어지는 과장된 몸짓을 하는 선수, 볼을 차는 게 아니라 아예 상대의 몸을 차다시피 하는 선수, 그럼에도 경고도 하지 않는 심판, 자국의 승리만을 위한 지나친 응원단들의 열광 등등, 종합적으로 말하면 승리를 위해 자기 양심을 속이거나 감추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경기장의 모습에 실망하게 된다.

원래 과격한 운동이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도대체 월드컵의 근본정신은 어디 갔는지, 축구장은 오로지 승리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동물의 왕국으로 변한 것 같다. 내가 사랑했던 축구가 왜 점점 이렇게 되어 가는지 실망스럽다. 승리를 목표로 하면서도 얼마든지 정직하게, 상대 선수를 배려하면서 신사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축구경기라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이런 생각은 철부지들의 것인가 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걱정되듯이 월드컵 행사가 오늘날 지나치게 국가주의를 조장시키는 하나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의심된다. 차라리 월드컵 경기를 하지 않는 게 세계평화를 위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전에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말로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결국 축구가 이렇게 된 것도 경제 때문이라 생각된다.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월드컵 경기라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까? 엄청난 도박의 현장이 된 유럽 축구장의 현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일 것이다. 가장 신사적이어야 할 선수들이 돈 앞에서 맹수로 변하는 축구장의 현실이 말해주고 있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했던 축구가 점점 더 자본주의의 적폐적 현상으로 전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영 불편한 월드컵 경기를 보고 있다.

종교칼럼이니까 종교적인 말로 결론을 내야겠다. 부처는 원래 인간의 고통을 모두 집착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재물을 비롯해 일체의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리라고 했다. 예수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했다. 빵은 인간 삶에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노자도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다고 했다. 계속 욕심을 내는 삶은 불교에서는 아귀(餓鬼)의 삶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장자에 나오는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나 조용히 읽어보면서 생각해 본다.

“자네는 무너진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나? 그 개구리가 동해에서 온 자라에게 말했네. ‘나는 여기가 좋으이. 밖으로 나가면 난간 위에서 뛰놀고, 안으로 들어오면 벽돌 빠져나간 구멍 끝에서 쉬네. 물에 들어가면 겨드랑이까지 차게 하고, 턱을 받치지. 진흙을 찰 때는 발등까지 흙에 묻히고, 장구벌레, 게, 올챙이 모두 나만 못하이. 이 웅덩이 물을 독차지해서 마음대로 노는 즐거움이 더할 나위 없네. 자네도 가끔 들어와 보면 어떻겠나?’

동해의 자라는 왼발을 미처 넣기도 전에 오른쪽 무릎이 걸려 꼼짝할 수 없었지. 어정어정 물러나 개구리에게 동해 이야기를 해주었다네. ‘대저 천리 거리로도 그 크기를 말할 수 없고, 천길 길이로도 그 깊이를 말할 수 없네. 우 임금 때 십년 동안에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났지만 그 물이 불어나지 않았고, 탕 임금 때는 팔 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몹시 가물었지만 바닷물이 줄지 않았네. 시간이 길거나 짧다고 변하지도 않고, 비가 많거나 적다고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일도 없는 것. 이것이 동해의 큰 즐거움일세.’ 무너진 우물 안 개구리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아주 얼이 빠져버렸다네.”

나는 이 이야기가 성서의 다음 이야기와 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부자가 있었다. 밭에 곡식을 심어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큰 수확을 거두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거기에 곡식과 물건을 잔뜩 쌓아두면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리고 가면 그 곡식은 누구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누가복음 12장)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핵심은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과 변화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거듭남’이고, 불교에서는 ‘각성’ ‘해탈’이고, 유교에서는 ‘군자됨’ ‘성인됨’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지금 이대로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바뀌는 엄청난 변화의 체험이 종교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나 성서의 부자나 자기가 설정한 자기만족의 틀거리에서 벗어나 더 깊고 오묘한 궁극적 실재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초월하지 않으면 과연 영원히 행복하게 될 수 있을까?

월드컵이 지나친 국수주의, 국가주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조장하면서 자본 논리의 포로가 되어 양심을 속이고 비신사적 공놀이에 머문다면, 과연 더 깊고 신비로운 세계평화와 생명상생의 세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놀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러시아 월드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필자소개
거창 씨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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