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뒤 과연 그들은 만났을까?
    [역사의 한 페이지-2] 사진 한 장에 대한 착각과 상상
        2018년 07월 04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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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후퇴와 학도의용군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나의 머리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보고 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

    공자가 제자 안회를 잠시나마 오해하여 의심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늘 진실이라고 믿을 수도 없고, 진실은 보이는 곳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글도 한 장의 사진 이야기이다.

    작년 이맘때 쯤 심상치 않은 사진 1장을 수집하였다. 9명의 청년이 같이 찍은 기념사진으로 뒤에 다섯, 앞에 네 명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 아래 부분에는 ‘10년 후에 다시 만날 동무’라는 글이 쓰여 있고, 그 밑에 ‘1951.1.5.’이라는 날짜를 넣었다. 처음에는 ‘10년 후에 다시 만난 동무’로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미래형인 ‘다시 만날 동무’로 쓴 것이었다. 경매 사이트에는 이 사진의 앞면만 올라와 있었다. 나는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나름대로 이 사진의 진실과 대면하고자 하였다.

    “10년후에 다시 만날 동무 1951.1.5.”라는 문구가 쓰여진 한 장의 사진(박건호 소장)

    1951년 1월 5일이라….

    이 날은 어떤 날인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6개월이 지나고 있을 때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의 반전을 이룬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에 도달한 것이 1950년 10월 하순이었다. 그리고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한 후퇴! 계속 밀리던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빼앗긴 날이 1951년 1월 4일이다. ‘1.4 후퇴’란 용어도 이 날에서 따온 말이다. 서울을 다시 빼앗긴 1월 4일 바로 다음날 청년 아홉 명이 비장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다.

    왜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 청년들은 10년 후에 만나자며 기념사진을 찍었을까? 같이 피난길을 떠나면서 이런 비장한 사진을 찍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혹시 1.4후퇴의 위급한 상황에서 친구들끼리 학도병으로 입대하면서 기념사진을 찍지는 않았을까?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세상에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감과 전장에서 맞을지 모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의 말과, 공포를 극복할 연대감과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마도 전쟁이 끝나 있을 10년 뒤 평화로운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이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역사의 시간은 10년 전으로….

    그런데!

    얼마 뒤 우편을 통해 받은 수집 사진에 반전이 숨어 있었다. 진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내가 볼 수 없었던 사진의 뒷면에는 사진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먼저 이 청년들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다. 뒷줄에 있는 청년들은 왼쪽부터 ‘정휘진 오우영, 김국현, 현중건, 이성우’이고, 아래쪽에는 왼쪽부터 ‘황성환, 이병무, 박병석’이 앉아있고, 제일 오른쪽은 ‘신혁0’으로 마지막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름을 쓴 부분의 오른쪽에는 흘림체의 다른 글씨가 보이는데, 해독해보면 ‘黃色腕章(황색완장)을 차고’이다.

    황색 완장이라….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다. 청년들의 양팔 어디에도 완장은 없다. 사진에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팔은 제일 왼쪽에 서 있는 ‘정휘진’의 왼쪽 팔 뿐이다. 그가 약간 측면으로 서 있기 때문에 왼쪽 팔이 가려 보이지 않는 탓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정휘진’의 왼쪽 팔에 황색 완장이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 사진의 원래 주인이고, 뒷면의 글씨는 그가 썼을 것이다. 또한 완장을 찼다면 그가 이 청년들의 리더일 것이다. 완장은 아무나 차는 것이 아니다.

    위 사진의 뒷면이다. 청년들의 이름과 기타 설명이 보인다

    순직 표시가 되어 있다.

    ‘황색완장을 차고’라는 글씨 옆으로는 ‘京城驛 壹武軍 待合室(경성역 1무군 대합실)에서’라고 쓰여 있다. 사진을 찍은 장소가 경성역 군인 대합실이란 이야기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서울역이 경성역으로 불린 것은 1923년부터 1947년까지이다. 정확히 말하면 1947년 9월부터 기존의 경성역이 서울역으로 바뀐 터였다.

    그렇다면 이 사진의 ‘경성역’은 무엇인가?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존의 경성역을 써 왔던 관성으로 ‘서울역’으로 바뀐 지 몇 년이 지났지만 그냥 경성역으로 쓴 경우이고, 또 하나는 모든 글자가 한자(漢字)로 되어있으므로 서울역을 한자로 쓰면서 그냥 경성역으로 썼을 가능성이다. 어쨌든 서울역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인데 1.4후퇴 와중에 이런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다소 이상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쌓아올린 ‘진실’을 한방에 무너뜨릴 내용이 이 사진의 왼쪽 제일 구석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그것은 앞면에 적혀 있는 1951년 1월 5일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시간 정보였다. ‘소화(昭和) 16년 1월 5일 사진’! 이것을 서기로 환산하면 1941년 1월 5일인 셈이다.

    이 뜻하지 않은 날짜 때문에 내가 상상했던 모든 시간의 공간은 정확히 10년 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즉 1951년 1.4후퇴 때 학도병 입대를 앞두고 10년 뒤를 기약하며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1941년 1월에 친구들이 10년 뒤인 1951년에 다시 만나자며 경성역 대합실에서 사진을 찍고 한 장씩 나눠 가졌던 것이다. 사진 앞면의 ‘1951년 1월 5일’은 사진을 찍은 날이 아니라 다시 만날 날을 미리 박아 둔 것이었다.

    이제 이 사진을 둘러싼 이야기는 한국전쟁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중일전쟁 시기로 돌아가야 한다. 1941년 1월 사진 속의 이 청년들은 왜 비장한 표정으로 10년 뒤를 기약했을까?

    ‘무군(武軍) 대합실’에 힌트가 있다. 이들은 군대 출정을 앞두고 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1년 1월이면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4년째가 되는 해이고 육군특별지원병제가 1938년부터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아마 지원병으로 가는 식민지 조선 청년들일 것이다. 해군특별지원병제는 1943년 8월, 학도지원병제는 1943년 10월, 징병제는 1944년부터 시행되므로 이들이 1941년 1월에 사진을 찍고 전쟁터에 나갔다면 ‘육군특별지원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지원병들은 출전을 앞두고 경성역 대합실에 임시로 마련된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역 대합실에 원래부터 사진관이 있었을 리는 없으니 군 당국에서 출전하는 지원병 전체를 대상으로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찍게 했을 것이다.

    또한 이 9명의 청년이 고향 친구들로도 보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고향 친구들이 사진을 찍는데 거기에 자기들을 대표하는 ‘황색완장’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자기들끼리 만든 조직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조직, 즉 파견되는 지원병 부대의 최소 단위인 분대별 사진이고 그 중 황색 완장을 찬 이가 분대장일 것이다.

    이런 가정이 맞다는 전제하에 그들이 속해 출전했던 ‘육군특별지원병’이 뭔지 잠시 살펴보자.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구호와 함께 민족말살 통치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고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 창씨 개명 등을 강요했다.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시켜 침략전쟁에 동원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런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내지인만으로 확대되는 전선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지 지원병 형태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1938년 2월 23일 칙령 제 95호로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 같은 해 3월 칙령 제156호로 6개월 기간의 지원병훈련소 관제를 제정하였다.

    당시 총독부가 제시한 지원병 자격 조건은 ‘만 17세 이상, 키는 155cm 이상, 소학교 졸업 혹은 그 이상의 학력에 사상이 견고하고 강건해야 하며, 금고 이상의 형을 받지 않은 자로 군대에 들어와도 일가 생계에 지장이 없는 자’로 한정하였다.

    이 지원병 모집이 알려지면서 친일파들은 우리 조선인들이 내지인과 똑같이 천황을 위해 총을 들고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며 열광하였고 청년들에게 지원병 모집을 독려하였다. 그런데 이런 친일파들의 열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식민지 조선 청년들이 이 지원병 모집에 호응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1938년에는 400명 모집에 2900명이 지원하여 경쟁률이 7.2대 1을 기록한 이후 이듬해 1939년에는 600명 모집에 12,300명(20.5 대 1), 1940년 3,000명 모집에 84,400명(28.1 대 1), 1941년 3,000명 모집에 144,700명(48.2 대 1), 1942년 4,500명 모집에 254,300명(56.5 대 1), 1943년에는 5,330명 모집에 303,400명(56.9 대 1)이 지원하여 경쟁률은 해를 거듭할수록 급격히 늘어났다. 한마디로 지원병 지원 열풍이 식민지 조선을 강타한 것이다.

    사진 설명: 조선인 육군 특별 지원병 훈련소 입소를 보도한 동맹뉴스. 1938년 지원병 훈련소에 일장기를 앞세우고 나팔을 불면서 입소하는 지원병들이 보인다. (1938년 군산동국사 소장)

    왜 이렇게 많은 청년들이 지원병에 나섰을까?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먼저 그 시대 사람 모두가 친일파가 아니었으며, 또 반대로 모두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겠다. 그 중간 지대에 놓여있는 사람이 훨씬 많았으며 그들 다수는 시국을 때로는 이용하고, 때로는 한탄하면서 살았고 그 과정에서 적당히 속물적이며 적당히 타협하며 또는 적당히 정의를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세상을 보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어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지원병에 지원한 조선 청년들을 결코 독립운동가로 볼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다 묶어서 친일파라고 규정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100년 뒤 남북한이 하나가 된 통일조국이 왔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의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를 보고, 분단체제에 적당히 적응해 살면서 학교에서 반공 글짓기대회나 반공 웅변대회에 참가하고,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교련교육을 받고, 게다가 청년기에 군대에 가서 복무한 것을 열거하면서 우리를 ‘반통일 세력’이라고 규정해버린다면 우리는 조금 억울하지 않겠는가? 우리들 다수는 적극적으로 통일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통일 세력이라고 매도당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지원병으로 간 청년들을 싸잡아 친일파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그래서 좀 조심스럽다.

    우리는 이런 지원병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개인 개인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다. 어떤 이는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한 이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지원병으로 전선을 다녀오면 취직에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지원한 이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가난한 가정 형편상 입을 덜기 위해 생계형으로 지원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이도 저도 아니면 친한 친구가 지원한다기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냥 따라서 지원했을 수도 있다.

    더러 어떤 이는 학교 선생의 설득이나 권유로, 더러 어떤 이는 마을 이장이나 애국반장의 권유를 받은 부모의 명으로 군문을 두드린 이도 있을 것이다. 지식인이나 문인들의 연설이나 논설에 감동받아서 지원한 이는 없었을까? 아주 극소수겠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특명을 받은 이가 지원한 경우는 없었을까? 어떤 이는 1938년부터 조선을 휩쓴 이원하, 이인석, 이창만 등의 ‘애국 영웅들의 미담’에 감격해서 자신도 그런 영웅이 되고 싶어 지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애국영웅 이원하. 이인석 그리고 이창만

    마지막에 언급한 이원하, 이인석, 이창만의 ‘애국 영웅’이야기는 좀 보충하고 넘어 가야겠다. 왜냐하면 이 세 명의 이야기는 1930년대말∼40년대 초의 식민지 조선을 이해하는데도, 또 많은 조선의 청년들의 지원병에 나섰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인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일제는 애국심에 불타는 조선인 영웅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38년부터 애국심에 불타는 내선일체형의 조선인 ‘애국영웅들’이 줄줄이 탄생하였고, 그들의 영웅담은 언론이나 영화, 연설회를 통해 조선 전역에 널리 확산되었다. 영웅은 태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애국영웅을 대표하는 이들이 이원하, 이인석, 이창만 등인데 이들이 누군지 한 명씩 살펴보자.

    먼저 ‘애국노인’ 이원하이다. 이원하는 충청도 청주에서 마을 구장 일을 하던 중 중병을 얻었고 1939년 1월 26일 74세의 나이로 죽은 노인이었다. 그런데 깊은 병중에 있던 이원하가 돌연 사라졌고 얼마 뒤 집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런데 극적이게도 그가 발견된 곳은 국기게양대 밑이었고, 일본 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해 꿇어 엎드려 큰 절을 한 자세였다.

    물론 이 죽음에 대해 당시 청주의 관선도의회 의원인 일본인 마쓰기(松本彬)는 “이원하는 원래 청주감영의 이속(吏屬)이었는데 가정불화와 신병 때문에 자식들이 불효하자 분통을 터뜨리고 밤중에 집을 나가 동리 공터에서 쓰러져 죽었을 뿐이다. 애국노인이란 당치도 않은 조작극”으로 주장하기도 하였지만([청주근세 60년사화]),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국기 게양대 밑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고 또 그 자세가 어쨌든 동쪽을 향해 엎드린 모습이었다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절묘한 장소와 자세 때문에 이원하는 ‘내선일체’를 표방하던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게 되고, 일약 ‘애국노인’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연일 신문에는 그의 ‘미담’이 실리고 심지어 교과서에도 그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가 죽었던 국기 게양대는 ‘성지’로 학생들의 참배 장소가 되었고, 국기 게양대 옆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애국심 고양을 위해 조선 13도 방방곡곡에서 상영되었다. 영화의 제목은 [국기 밑에서 나는 죽으리]였다.

    이렇게 식민지 조선에서는 1919년 9월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가 사형 당했던 65세의 강우규라는 ‘애국노인’이 있었다면, 그 대척점에는 죽을 때도 천황과 일장기를 향해 충성을 맹세했던 74세의 이원하라는 또 다른 ‘애국노인’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원하가 죽고 ‘애국영웅 만들기’가 한창 진행되던 때인 1939년 6월 이인석이라는 또 한 명의 조선인 영웅이 탄생한다. 이인석 상병은 지원병으로 중일전쟁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한 최초의 조선인이다. 당시 모든 신문이 그의 영웅담을 대서특필했다. 논조는 ‘지원병 최초의 전사자로 반도인의 영예’라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1940년 2월에 이인석 상병에게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제1급 무공훈장인 금치(金鵄)훈장을 수여했다. 충북 옥천에 있던 이인석의 생가 역시 ‘성지 순례’ 장소가 되었다.

    사진 설명: 지원병으로 출전했다가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 상병(왼쪽, 부인 유서분씨 소장). 육군에 지원한 군인들의 집에 부착한 명패(1940년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이원하와 이인석의 죽음과는 달리 이창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이다. 1940년 강원도 횡성에 살았던 20살 청년 이창만은 1940년 28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지 못하고 지원병으로 뽑히지 못하자 이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두 번의 신체검사에 합격했으나 최종 필기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는데, 평소 ‘일본군인이 된다면 가슴이 터질 것같이 기쁠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지원병에 최종 불합격되자 큰 충격을 받고 며칠간 식사도 하지 않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창만의 죽음 역시 연일 언론에 ‘애국영웅’의 죽음으로 소개되었는데, 그 중 잡지 [삼천리]는 “애국충렬의 귀감, 국가 간성(干城)이 못됨을 한탄하고 자살한 이창만군의 순사(殉死)!”라는 제목으로 그의 죽음을 찬양하였다.

    이렇게 애국영웅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배출되고 칭송되는 시대에 20살 전후의 청년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대일본제국의 신민’이었다. 이미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30세 이하의 조선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일본인’으로 태어났고, 그의 부모들을 통해서만 식민지가 되기 전의 나라 ‘대한제국’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중국에 있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너무도 멀리 있는 정부였을 것이다.

    게다가 1930년대 이후 국내 독립운동세력은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 거의 궤멸상태에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대일본제국의 영광과 전쟁을 찬양하고 전쟁영웅들을 노래하는 나팔 소리는 너무도 컸던 데 비해, 독립을 외치는 소리는 너무도 미미한 그런 상태였다. 해방 이후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시각으로만 지원병들을 바라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거시적 관점에서 그들이 식민통치체제나 침략전쟁에 기여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사진 설명: 조선의 지원병들. 일장기를 든 청년의 어깨띠에 지원병이란 글자가 보이고, 일장기에는 ‘국민정신총동원대산면지부’라고 적혀있다.(위, 박건호 소장) 소화 19년(1944) 10월에 찍은 지원병 사진이다. 사진 윗 부분에 ‘조선반도 특지’란 글이 보이는데, ‘특지’는 ‘특별지원병’을 줄여 쓴 표현이다.(아래, 박건호 소장)

    10년 뒤 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1940년 28대의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지원병 수가 3000명이었으므로, 이 청년 9명도 그 지원병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지원병 훈련소에서 같은 분대원으로 만나 몇 개월간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고, 훈련이 끝나자 미지의 중국 전선에 파견될 날을 통보받았을 것이다. 출발을 며칠 남긴 어느 날 부대원 전체가 분대별로 혹은 소대별로 경성역 대합실에 마련된 임시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게 된 것이었다. 사진을 찍은 후 그들 청년 9명은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미래를 생각하며 ‘꼭 10년 뒤에 보자’는 그러한 문구를 박았을 것이다.

    이렇게 찍힌 이 작은 한 장의 사진 속에는 중일전쟁, 민족말살 통치, 지원병,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전우애, 애국영웅, 이원하, 이인석, 이창만 등 그 시대의 많은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일제 강점기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반영하고 있다.

    사진 설명: 9명의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전쟁터에 나가는 이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다는 마음으로 사진들을 찍었다. 이 사진은 경북 안동의 두 형제가 1943년 10월, 형은 일본 관동군으로, 동생은 일본 해군에 입대하기 전 작별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형은 1944년 전사한 것으로 적혀있다. (1943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그럼 이 9명의 청년들은 이후 어찌 되었을까?

    입대 동기를 알 수 없듯이 또한 그들의 생사와 행방 역시 우리들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명에 대해서는 알 수가 있다. 9명의 이름 중 한 명, ‘김국현’의 이름 위에만 ‘16년 순직(殉職)’이라고 쓰여 있다. 글씨의 농담이 다른 글씨와 차이가 나기에 뒷날 이 사진을 가지고 있던 ‘정휘진’이 가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을 찍은 그해 ‘소화 16년’에 9명 중 한 명인 김국현은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중국 전선의 어느 곳에서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10년 후인 1951년 1월 5일에는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그것 역시 알 수 없지만 만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그 전쟁의 시기에 목숨을 부지했는지도 모를 뿐더러 그들이 어떻게든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만나기로 한 그 날은 6.25전쟁의 격전이 벌어지던 1.4후퇴 때가 아니던가?

    운명의 장난처럼 그들 중 어떤 이는 인민군으로, 또 어떤 이는 국군으로 만나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역사라는 것이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든다. 비장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1941년 1월 5일 그들 아홉 청년은 10년 뒤 경성(서울)이 또 다시 참혹한 전쟁터로 변해 있을지 예상이나 했을까?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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