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200년, 짧은 질문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시효는 끝났나
[서면 인터뷰] 마르크스의 삶과 사상, 현재적 의미
    2018년 07월 02일 11: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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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5월 5일은 어린이날인 동시에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건 아마도 그가 사회와 역사에 끼친 어떤 영향력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자는 뜻일 거다. 여전히 그의 탄생 20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주의는 존재하고 또 유효한 사상이라는 점에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 특히 대한민국의 지적 사회적 현실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그 영향력이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쇠락하고 축소되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그런 쇠락 자체도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적 시각으로 분석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상의 시효는 여전히 유효하고 끝나지 않았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레디앙은 남종석 선생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마르크스의 삶과 생애, 그리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쟁점, 현실적 의미, 사회주의 운동의 전망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한정된 짧은 지면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넓고 깊은 사상적 의미를 제대로 짚어 낼 수는 없다는 고백은 해야 할 거 같다. 마르크스라는 인물의 탄생이 200년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또한 200년이라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 지적 실천적 역사의 흐름, 쟁점, 다양한 갈래들을 살필 능력이 안 됨은 당연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라는 게 전문가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운동·사회운동·진보운동의 실천적 무기라는 점에서, 우리 나름의 생각과 고민들을 진솔하게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용기 있게 이 주제를 다뤄본다. 다소 길지만 나누면 글의 맥락이 잘 전달되지 않을 듯하여 한 번에 게재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이후 등을 고민하는 이들의 일독을 권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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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연히 독자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먼저 칼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간단한 브리핑을 해줬으면 한다. 마르크스의 생애와 그의 사상이 뗄 수 없기에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정립 과정을 중심으로 짚어주는 게 필요할 거 같다.

마르크스의 생애를 짧게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1818년 독일 트리에시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에서 유명한 유대인 법률가셨죠. 마르크스는 본 대학에 입학했다가 보다 자유로운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법과 철학을 연구했으며 18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학위 후 그는 당시 급진적 자유주의자이자들이 주도하던 청년헤겔운동에도 깊이 관여합니다. 또한 1942년 『라인신문』 편집장을 맡으면서 독일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썼는데 그 이유로 그는 독일에서 추방됩니다. 파리 시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독일망명자들과 어울리고 파리의 사회주의자들과 적극적인 교류하며 『독불연보』를 발간합니다. 1840년 파리는, 발터 벤야민식으로 표현하자면, 유럽의 지적 수도였습니다. 유럽의 모든 급진주의자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사회혁명의 가능성이 꿈틀거리는 도시였습니다. 추방당한 혁명가들의 안식처이기도 했구요. 여러 만남들 중에서도 그의 영원한 동지 엥겔스와의 만남이 마르크스에게는 결정적 사건일 것입니다. 엥겔스에게도 마찬가지이죠.

엥겔스는 영국에 거주하면서 산업혁명이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삶을 파괴하는 가를 현실에서 체험했으며 이와 같은 현실 인식은 마르크스가 철학비판에서 경제학 비판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합니다. 1844년 그 최초의 결과물이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입니다. 같은 해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서술합니다. 두 책 모두 학술적인 면에서도, 두 혁명가의 지적 성장과 변화에서도 결정적인 책입니다. 마르크스는 이제 급진적 자유주의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변모합니다.

파리 시절 마르크스는 망명한 독일 혁명가들과도 긴밀하게 어울리며 국제공산주의자동맹에도 개입합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의 주류였던 블랑키주의자들, 푸리에주의자들, 푸르동주의자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논쟁합니다. 184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파리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융성합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고자 했던 신성동맹의 반동이 끝나가던 시절입니다. 이 변화된 기운은 1848년 세계혁명으로 귀결되는데 혁명적 정세 속에서 쓰여 진 짧은 텍스트가 『공산주의자 선언』입니다. (이때까지의 맑스와 엥겔스의 삶을 다룬 것이 영화 ‘청년 마르크스’이다. ‘청년 마르크스’에 대한 영화평 링크)

1848년이 만들어준 짧은 해빙기에 마르크스는 독일로 복귀하지만 곧 독일 공국들 군대들의 영향력이 회복되면서 영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혁명의 실패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공산당 선언』에서 표현했던 낙관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합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장기적 과제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현실을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경제학철학 수고』 의 비판을 확장할 필요성을 느낀 거겠지요. 마르크스는 정세로부터 벗어나 연구 작업을 지속하게 됩니다. 때로는 정치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연구자가 사회운동의 성장에 더 크게 기여하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론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지요. 1950년대 경제학 비판 연구의 결과가 1959년 발간된 『자본』 제1초고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으로 알려진 세 권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1864년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가 창설되며 마르크스는 총평의회 의장을 맡습니다. 흔히들 제1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총평의회 의장이 되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협회의 다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아직 소수파에 불과했습니다. 협회는 노조주의에서 블랑키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의 공동실천의 공간이었습니다. 1867년 마르크스는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을 출간합니다다. 이 책이 『자본 Ⅰ』이며 마르크스가 감수한 판본들이 여럿 있습니다.

1970-71년 독불전쟁과 파리코뮨은 마르크스에게 또 다른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뮨이 실패할 것을 예상했지만 그는 혁명 전사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파리코뮨 이후 마르크스는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자본Ⅱ』, 『자본Ⅲ』을 완결시키지 못합니다. 지병도 있고, 작업의 의지도 과거와 같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본 Ⅱ』, 『자본 Ⅲ』은 마르크스의 초고들을 엥겔스가 재구성해서 발간한 책입니다.

파리코뮨의 실패에서 마르크스는 경제적 비판이 혹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혁명적 실천 혹은 승리를 장담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인식합니다. 파리코뮨은 노동자들의 ‘장송행진곡’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역사가 어떤 목적을 향해, 어떤 승리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주의의 필연성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것이 마르크스의 최후의 정정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2. 한국전쟁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금기어였다. 마르크스의 책은 물론이고 심지어 막스 베버라는 정반대의 결을 가진 학자의 책도 금서 취급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있었던 때가 있었다. ‘공산당 선언’ ‘자본’은 그래도 이름은 들어본 이들이 많을 거 같다. 그외 마르크스의 주요 저작들이 어떤 것이 있으며 그 의미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줬으면 한다.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가 성장하는 시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초기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은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입니다. 초고는 마르크스의 자필 원고만 남아 있고 당대에 발간되지 않았습니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는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텍스트이자 마르크스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이 텍스트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노동하는 주체들인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소외를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노동하는 자들이 생산수단과의 관계, 다른 노동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소외되고, 노동 그 자체로부터도 소외되며, 노동의 결과물로부터도 소외된다고 비판합니다. 노동은 인간의 창의적 활동이자 그 산물이기도 한데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오히려 노동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것이 마르크스 비판의 요지입니다.

마르크스에게서 또 다른 중요한 텍스트는 『독일이데올로기 비판』과 매우 짧게 쓰여진 「포이어 바흐에 관한 테제」입니다. 『독일이데올로기 비판』은 다소 말싸움 비슷한 텍스트이긴 한데, 이 텍스트가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그 이전 자신이 몸 담았던 청년헤겔학파와 공식적으로 단절하는 선언과 같은 책이며 스스로 유물론자로 재규정한 점에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논문 자체가 유물론적 테제와 관련되는 것이지만 『독일이데올로기 비판』는 이에서 훨씬 진전됩니다. 더불어 역사유물론의 핵심 개념인 생산양식, 토대-상부구조, 이데올로기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 텍스트에서 마르크스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지배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명시합니다. 이데올로기 비판이 문제가 됩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실천의 유물론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정립합니다. 마르크스의 독특함은 노동하는 주체들이 지적-사회적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 점에 있습니다. 마르크스 이전의 철학에서는 포이에스시스 즉 고통 받으며 어쩔 수 없이 노동해야 하는 존재들(피억압자, 여성)과 정치공동체에 참여하는 지적이고 이성적인 시민들의 실천(프락시스)를 구별했지만 마르크스는 노동하는 주체들이 지적-이성적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합니다. 노동하는 주체(피억압자들)가 곧 사회적 실천의 주체(시민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 철학적 인간학의 핵심입니다. 노동하는 존재들이 시민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 철학과 다른 정치철학자들과의 종별성입니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1847년에 서술됩니다. 이 짧은 팜플렛은 1848년 혁명 바로 전에 쓰인 것으로 혁명적 낙관주의라고 표현해야 마땅한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임박한 위기, 그 덕분에 모든 국가에서 자본가계급을 물리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혁명적 전망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1848년 혁명은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 선언』은 흥미로운 텍스트인데, 편견과 달리 이 유명한 팜플렛은 공산주의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고 ‘근대성과 부르주아의 혁명적 역할’을 매우 인상적인 문장으로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마샬 버먼의 책 제목이기도 한 ‘모든 단단한 것은 허공 속에 사라지고’로 시작되는 마르크스의 명문장은, 근대성(변화가 일상이 된 시대)을 압축적으로 묘사하며 부르주아들이 성취한 혁명의 성격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성취한 것에 대한 찬양이기도 합니다. 그 착취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말이죠.

마르크스가 서술한 정치학 텍스트는 많지 않습니다. 본격적인 분석텍스트도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 플란에서 국가라는 장을 하나의 텍스트로 쓰려했지만 이 계획은 변경-무산됩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빼어난 텍스트들이 있습니다. 『루이 보나빠르트 브뤼메르의 18일』과 『프랑스에의 내전』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 『루이 보나빠르트 브뤼메르의 18일』는 1848년 6월 봉기에 대한 군대의 무자비한 학살이 있은 후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아의 힘의 교착상태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보나빠르트의 권력계승을 분석한 것입니다. 경제적 관계와 상대적으로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국가권력의 성격, 정치적 자율성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내전』은 1871년 파리 코뮨의 역사적 성격과 의미를 일반화한 텍스트입니다. 코뮨 정부가 실행한 것들의 의미와 그 의의 객관적 조건의 한계, 이행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할 수 있는 권력기구 및 국가장치들의 역할에 대한 생생한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두 텍스트는 꼭 읽어야 합니다.

1959년 발간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도 주목할 만한 텍스트입니다. ‘요강’이라는 것은,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보여주는 글이라는 의미인데, 이 텍스트는 『자본』 제1초고라고 보는 게 정론입니다. 『자본』은 이 초고와 함께 국내에서는 발간되지 않은 1861-1863년 제2초고, 1865년 제3 초고가 있습니다. 『요강』은 1950년 초반부터 재개한 경제학비판 연구를 잠정적으로 종합하는 최초의 저서이자 자본 저술의 계획을 구체화한 저작이기도 합니다. 초고들이 진척되면서 마르크스의 작업과정은 많은 변화를 겪지만 제1초고는 그 자체로 고유한 독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자본』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텍스트라고 말해집니다. 그 외 마르크스의 텍스트 가운데 중요한 것들이 많지만 생략합니다.

3.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나오는 표현 중에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는 구절이 있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실천적 운동, 또는 운동적 실천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끊임없이 노동운동 등 실천운동과의 결합을 모색했고, 다양한 조류의 사회주의 운동의 정신적 자원이 되어 왔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실천적 행보, 공산주의자동맹과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에 참여하게 되었던 그 과정을 살펴보자.

앞에서 썼듯이 마르크스는 박사학위를 쓴 후 대학에서 자리 잡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급진적 자유주의 신문인 『라인신문』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잡지는 1943년 곧 폐간됩니다. 이유는 급진적인 논설문이 당국의 검열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그는 생계를 해결하면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독불연보』에서 기자로 있으면서 두 편의 유명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저널리즘에서의 글쓰기는 마르크스가 개입하던 정치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가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이며 다른 하나는 위에서 인용하고 있는 「헤겔법철학 비판 서문」입니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에서 마르크스는 시민혁명 이후에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체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부르주아 국가는 그 구성원에게 공적인 시민권(주권자)을 주지만 사적인 영역 즉 시민사회(이 시기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시민사회는 경제적 관계가 지배하는 곳입니다.)에서는 소유권만이 인정됨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헤겔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전도된 관계를 비판합니다. 헤겔은 시민사회의 갈등을 해소하는 수단이 국가이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정치적 지배의 뿌리가 시민사회에서의 부르주아의 지배에 있음을 주장합니다. 「헤겔법철학 비판 서문」에는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환된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 이후 마르크스는 부인 예니 마르크스와 함께 브뤼셀로 이주합니다. 여기서 그는 ‘브뤼셀 공산주의자 연락위원회’를 만듭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마르크스는 이미 청년헤겔파들과 결별하고 공산주의자로 변모합니다. 그 지적 청산작업을 대표하는 것이 『신성가족』, 『독일이데올로기 비판』,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였다면, 이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독일 망명자들과 브뤼셀에 있던 벨기에 공산주의자들, 급진주의자들과 교류하며 공산주의자들의 연대조직체를 만든 것입니다. ‘공산주의자 연락위원회’는 독일과 영국에서도 만들어지며,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및 그 동료들은 ‘의인동맹’과 교류하게 됩니다.

의인동맹은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가운데 한명인 바뵈프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산주의자들 모임이었습니다. 바뵈프의 추종자들은 뚜렷한 이념적, 이론적 토대를 띤 것은 아니었지만 사적소유의 철폐 등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으며 형제에, 공동체주의적 경향을 갖는 이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846년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외 사회주의자들의 영향 속에서 의인동맹의 성격도 변모합니다. 같은 해 의인동맹의 본부는 런던으로 이주했으며 다음해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이에 가입합니다.

1847년 6월 의인동맹은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이름을 개편하고 엥겔스가 작성한 강령 초안을 승인했으며 조직 규약 역시 엥겔스와 볼프 등 마르크스의 동료들이 작성합니다. 1차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다”라는 의인동맹의 구호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변화합니다. 엥겔스가 초안을 잡은 ‘공산주의자 신조’는 문답 형식이었는데 이는 다시 ‘공산주의자 원리’로 수정해서 같은 해 11월에 열린 2차 공산주의자 동맹 대회에 제출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이 강령을 선언으로 집필해줄 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요청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공산주의자 선언』입니다. 이 텍스트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발간된 책입니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1848년 2월 혁명이 진행되는 시점에 1판 인쇄가 시작됩니다. 정세와의 어울림 속에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승리를 예견했습니다. 그러나 1848년 6월 부르주아가 청원한 군대와 노동자 군대의 대결 이후 피의 보복이 진행되면서 혁명은 실패하게 됩니다. 이 패배는 유럽을 휩쓸던 호황의 물결 속에서 묻혀 갔습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과 그 이후 들어선 정치체제를 분석하는 두 논문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과 『루이 보나빠르트 브뤼메르의 18일』을 서술했습니다. 이후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나 팜플렛 집필, 생계를 위한 신문기사 작성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정치경제학 비판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썼듯이 이론의 시간입니다.

마르크스가 ‘정치의 시간’으로 돌아온 것은 국제노동자협회 결성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제1인터내셔널로 알려진 국제조직에서의 활동입니다.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 강령 제정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강령과 규약을 작성하는데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단일 이념과 활동가들로 구성된 조직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협회였습니다. 여기에는 각국에서 온 다양한 경향의 사회주의자들, 영국의 오웬주의, 프랑스의 푸르동주의, 스페인의 바쿠닌주의자들, 독일의 라살레주의자들, 벨기에·이탈리아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개인적인 활동가, 망명한 혁명가, 노동조합 조직 활동가, 조합단위, 조직단위 등 결합 수준도 다양했습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최소규약에 대한 합의를 둔 공동전선 조직이었다. 각 국가별로 지부가 있었지만 그 지부들조차 단일 강령으로 결합된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독일 담당 연락서기, 러시아 담당 연락 서기 등의 역할을 하며 인터내셔널 내부정치에 개입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마르크스의 정치적 활동은 다른 경향들과의 지속적인 논쟁의 과정이자 협력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노조주의자들은 아일랜드 문제에 침묵하거나 무시했고, 푸르동주의자들은 토지의 공공소유를 반대했고, 다른 이들은 토지를 지방의 협동조합이나 자치체가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투쟁전술에 있어서도 내부 이견, 투쟁은 불가피했습니다. 바쿠닌주의자들은 즉각적인 폭력투쟁을 선호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정세가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폭력적 봉기는 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정치적 성과도 크기 않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논쟁에 지친 나머지 18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아예 유럽의 조직을 미국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에 동참하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에게서 정치적 실천은 늘 이론적 입장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의 시간’ 속에서도 언제나 이론을 매개로한 다른 입장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이와 같은 비판은 마르크스의 입장에 있는 활동가들을 자극하고 그들에게 이론적 입장과 정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 동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프루동, 청년헤겔들과의 쟁점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개입했으며, 국제노동자협회 활동에서도 바쿠닌, 영국 노조주의자들, 오웬주의자들과 논쟁하며 자신의 개입을 정당화했습니다. 물론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은 교차하면서 탈구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이론가였으며, 이론을 통해 활동가들이 힘을 형성하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개입한 정치적 현실이었다.

4. 위의 표현처럼 마르크스의 표현 중에는 성경의 구절처럼, 잠언과 교훈적 맥락 아니 그보다는 이념적 실천적 맥락을 담으면서 강렬한 뉘앙스를 전해주는 표현들이 많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들이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고 얻은 것을 세계 전부이다” 등 그런 구절들을 한번 살펴보는 것도 마르크스의 지향을 간결하지만 핵심적으로 짚어보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또한 이런 표현을 통해 소위 ‘대중화’의 문제를 고민하기도 했던 거 같다. 그런 점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대중정당이었던 독일 사민당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짚어봐야 할 거 같다.

앞에서도 썼지만 이 표현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자 동맹을 결성하는 시점에 쓴 것입니다. 1846년 당시 마르크스는 역사의 진보, 프롤레타리아트의 궁극적 승리라는 관점에서 서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1848년 2월 혁명이 발발한 시점에 쓰여진 것입니다. 정치적 맥락 속에서 평가해 보자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점을 지녔다고 봐야합니다. 혁명적 낭만주의는 1848년 혁명의 실패를 통해 일부 교정됩니다. 1848년 6월의 반동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큰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앞에서도 썼듯이 마르크스가 공식적으로 정치무대에 복귀하는 것은 국제노동자협회 참여과정인데, 이 때는 『자본』의 제3초고가 거의 완성된 단계입니다. 제3초고(1863-1865년 초고)는 『자본』과 거의 내용이 같습니다. 국제노동자협회 조직과정에서 이 협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영국노동조합조직을 가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영국 노동운동은 국제노동자협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었습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영국이 당시 가장 발전된 국가였기 때문에 영국노동자들은 형편이 가장 좋았고 지속되는 호황 속에서 노동자운동의 전투성이 사라졌죠. 차티스트운동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시절이었습니다. 영국 노동운동이 전투성을 회복하는 시기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제1인터내셔널 시기 영국 노동운동은 아일랜드 기근 및 영국 제국주의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침묵합니다. 독일의 라살레주의자들이 만드는 강령에는 독일 애국주의가 크게 녹아나 있었죠.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에 대한 자신의 확신에서 점차 멀어져 갑니다.

파리코뮨의 실패로 인한 상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는 프랑스노동자들이 봉기가 정세적으로 이르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봉기가 시작된 후에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참여하지요.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장봉기는 파국을 낳게 됩니다. 봉기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충분히 예측된다는 점입니다. 파리가 고립되었지만 어는 누구도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겠지요.

더군다나 마르크스의 『자본』은 노동자들이 읽기에 너무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본』을 저술했지만 그 이론적, 정치적 함의를 노동자운동이 이해할 수는 없었거든요. 노동자들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명료하게 요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자신은 노동자에게 다가가고자 했지만 그 경계는 결코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저런 것들과 함께 197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의 비관주의는 더 커집니다. 반면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결성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드디어 대중조직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독일사민당은 민족주의 정서가 매우 강한 라살레파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한 정당이지요. 1차 세계대전(정확히 표현하면, 유럽 내전입니다.) 발발과 함께 독일사민당과 독일사민당을 모델로 만들어졌던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사회애국주의로 후퇴합니다. 각 국가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에서 자국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레닌이 있었던 러시아만 예외입니다. 러시아혁명 이후에 국제주의, 우리가 제3인터내셔널 혹은 코민테른이라고 부르는 국제조직도, 소련공산당의 정치적 입장을 개별 국가의 공산주의당이 앞장서서 옹호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면이 있지요.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도 국제주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1968년 세계적으로 번진 반란은 국제주의 정신을 잠시 일깨우는 듯하지만 아시다시피 1980년 이후 대부분의 국가는 우파들이 복귀합니다.

노동자계급이 민족국가라는 틀을 깨고 국제주의의 원칙에 선다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전혀 그럴듯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냉정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상식과는 반대로 19세기는 국경의 경계가 엄격하지 않았고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 민족주의 정서도 거의 없었어요.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이 아니라 국사와 같은 민족사에 대한 이해도 없었죠.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교육과정, 미디어 등의 영향으로 민족주의적 정서에 훨씬 크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거기다가 당장의 현실에서는 각 국가의 노동자계급이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아요.

5. 마르크스를 말하면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평생의 동지이자 친구이며 후원자이기도 했던 엥겔스에 대해서도 소개를 해줬으면 한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생애에서 엥겔스 외에도 바쿠닌, 프루동 등 수많은 이들과 교류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사람 얘기가 보다 쉽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 동지 혹은 경쟁자로서 부딪혔던 이들이 누가 있는지 설명해 달라.

엥겔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프록코트를 입은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아버지가 독일 출신으로 영국에서 사업에 성공했고, 엥겔스는 이를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엥겔스는 기질적으로 반항적이었으며 댄디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강제하는 것 즉 사업계승을 매우 싫어했지만 또한 자신이 사회주의자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보다 젊었지만 1840년대 초반 마르크스와의 만남 이후 마르크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또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입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보다 먼저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자가 되고 자본주의 경제적 구조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데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평생 동지로서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굳은 일들을 처리하고 활동가와 이론가의 경계에서 마르크스와 독일노동운동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엥겔스는 이론적으로 중요한 저작을 남깁니다. 1844년에 쓴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여전히 19세기 영국 노동사, 사회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참고문헌입니다. 뿐만 아니라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통해 오늘날 가부장제와 사적소유의 관계를 분석하는 글을 남깁니다. 인류학적인 연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제한된 자료에 근거하여 서술된 점이 한계이지만 19세기 남성저술가가 여성의 억압에 대해서 쓴 가장 중요한 텍스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에 견줄만한 남성들의 작품에는, 제 짧은 상식에서는, 푸리에의 텍스트와 존 스튜어트 밀의 텍스트만 당장 떠오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엥겔스의 기여는 마르크스의 악필 『자본』 초고와 씨름하면서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자본Ⅱ』과 『자본Ⅲ』을 엮는 역할을 한 점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Ⅰ』권만 완성하고 나머지는 초고로 놓아둔 채 이론적 작업을 중단해버립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사후 이것을 면밀히 검토하고 재구성해서 1890년대에 발간합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이후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그 핵심적인 쟁점 가운데 하나가 밤 뵈르크가 지적한 1권과 3권의 논리적 모순입니다. 크게 보아 ‘전형문제’라고도 하지요. 이에 대해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옹호한답시고 엥겔스가 잘못 편집해서 마르크스의 입장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마르크스 연구자들은 그런 주장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엥겔스를 통한 『자본』 완간은 마르크스의 입장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고 『자본』의 내적 모순은 그 자체로 마르크스의 모순이기도 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입니다.

물론 엥겔스의 저작 가운데는 불행한 것들이 있습니다. 당대에 잘못 알려진 자연과학을 토대로 마르크스주의를 일반화시키려던 시도 말입니다. 대표적인 저작이 『자연변증법』이고, 마르크스와 공동작업의 결과이기도 한 『반뒤링론』, 『공상에서 과학으로』라는 책도 문제가 많은 저작입니다. 엥겔스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를 대중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당대의 한계 속에서 작업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자연변증법』이 최악입니다. 변증법의 3대 법칙(대립물의 투쟁과 통일, 양질전화, 부정의 부정)은 헤겔의 대논리학에서 가져온 것인데 엥겔스는 자연세계의 물리적 운동법칙을 변증법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옛날에 변증법을 유물론적 변증법이라고 했는데, 자연이 변증법적으로 움직인다는 전제에서 비롯되는데, 좀 심하게 말하면 변증법이 과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증법을 세계에 적용할 때는 매우 제한된, 엄격한 기준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변증법을 남용하는 것은 지식세계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습니다. 진화론에 대한 엥겔스의 이해도 당대의 틀에 벗어나지 못했는데, 19세기 후반 다윈주의는 말 그대로 진화주의였거든요. 최악은 사회생물학 즉 우생학인데, 인종주의의 진화론적 버전이지요. 백인보다는 황인종이, 황인종보다는 흑인은 진화가 덜된 종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다윈의 사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들입니다.

더군다나 1950년대까지 진화란 진보로 통했어요. 정설이었습니다. 엥겔스 당대의 진화론은 사회주의의 필연적 도래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한다는 것이죠. 진화주의적 목적론이라고 합니다. 엥겔스는 자연과학에 진화주의를 도입하여 마르크스주의적 생산력주의의 시초가 되는 이론적 논의들을 전개하지요. 이것은 나중에 제2인터내셔널을 거치고 스탈린주의로 정립되면서 ‘정통사회주의’라고 알려진 일련의 생산력주의의 토대가 됩니다.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관계와 모순을 일으키고 이 모순으로부터 박탈당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된다는 진화론 말입니다.

마르크스의 정치적 활동에서 가장 큰 경쟁 상대는 프루동과 바쿠닌이었습니다. 프루동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마르크스와 경쟁자였습니다. 프루동은 프랑스어권 당대 노동운동 내에서 큰 영향을 지녔습니다. 바쿠닌은 러시아 출신으로 오늘날 혁명적 무정부주의의 기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마지막 날들, 그러니까 1870-1875년 기간 마르크스는 거의 절망적으로 바쿠닌주의자들과 경쟁합니다. 마르크스가 주도한 협회의 결의안을 바쿠닌주의자들이 뒤엎고 마르크스는 다시 바쿠닌주의자들이나 프루동주의자들을 협회에서 내쫓고자 했지요. 결국 국제노동자협회 지부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데는 프루동주의나 바쿠닌주의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계급 중심의 협회로 국제노동자협회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경쟁하는 당대의 이데올로그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기원 역시 엥겔스의 저작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에서 비롯됩니다. 엥겔스나 마르크스가 자신들의 저작을 과학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를 경제법칙으로 이론화한 것입니다. 개념들의 체계를 통해 자본주의적 동학을 분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지요.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적 이행을 위한 정치적 조건을 분석합니다. 형제애나 설득, 뛰어난 엘리트들의 계획 혹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자본주의가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체계적으로 비판하지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은 계급투쟁과 혁명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국가장치의 존재,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자본가의 물리적 힘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매우 현실적인 분석입니다. 엥겔스는 군사학 전문가라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대의 사회주의자들을 공상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매우 협소한 관점입니다. 일단 푸리에나 오웬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는 것은 맞은 주장입니다. 그리고 형제애가 사회주의로의 변혁을 이끌지 못하지요. 다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실천한다고 생각해보면 오웬주의자들이 주목했던 모델이나, 푸리에주의적 공동체주의가 꼭 공상만은 아닙니다.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 내부의 공동체 그러니까 생협이나 소비협동조합, 생산자 조합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회주의 체제 이후로 그 실천을 미뤄야할 이유는 없거든요. 사회주의를 현실 속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연합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조입니다. 노동조합 내에서 노동자들의 실천, 협동조합 운동, 지역공동체 운동도 다양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연합적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실천들 가운데 마르크스주의만 공산주의적 실천을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6. ‘사회주의’라는 언어와 ‘마르크스주의’라는 개념은, 프루동, 오엔, 생시몽의 공상적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의 주된 비판적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의미와 맥락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서로 연결되고 만나기도 하는 거 같다.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나?

19세기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마르크스의 사상 혹은 마르크스주의는 경쟁하는 여러 사회주의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위키디피아를 보니 사회주의(socialism)이라는 단어는 1830년대에 프랑스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다고 합니다. 오웬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했지요. 모두 프랑스혁명의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자코뱅파의 유산을 잇는 여러 정치사회적 경향들을 사회주의라고 포괄적으로 볼 수 있겠지요. 사회체제에서 사적소유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적, 정치적, 운동적 흐름들을 사회주의라고 포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는 여러 사회주의적 조류 가운데 하나라고 해야 마땅하겠지요.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의 주류로 성장하는 계기는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당 건설 이후입니다. 당대에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이념은 우리가 오늘날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합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은 라살레파와 마르크스주의파의 연합으로 건설되지만 실천적 토대는 라살레파의 영향이 크고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으로 지향합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정당은 마르크스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한 최초의 정당입니다. 노동자계급에 토대를 둔 이념정당입니다. 그 이후 각 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생겨나고 러시아에서도 비합법적인 전위정당이 만들어집니다. 독일 사민당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제2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지배적인 이념이 되지요. 이 시기에 이르면 바쿠닌주의든, 푸르동주의든 인터내셔널에서는 주변화됩니다. 경쟁하는 이데올로기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던 구조이죠.

러시아혁명 이후에는 볼세비키 모델이 보편화됩니다. 전위정당 모델이죠. 제2인터내셔널이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붕괴합니다. 앞에서 썼듯이, 제2인터내셔널에 모여 있던 각국 공산당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사회애국주의로 후퇴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본류는 러시아의 볼세비키 모델이 됩니다. 제2인터내셔널 이후 특히 러시아혁명 이후에 사회주의는 곧 마르크스주의라는 도식이 성립됩니다. 반면 사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 안착하지요. 러시아 혁명이후 만들어진 인터내셔널을 코민테른이라고 하지요. 제3인터내셔널입니다. 코민테른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소련에서 인정된 것만을 인정하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가 됩니다. 코민테른과 관련해서는 ‘한국에서도 80년대 말 90년대 초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등이 번역되기도 했죠. 간단히 요약하면 마르크스주의는 무오류이고 소련공산당은 이런 마르크스주의의 적자라는 거지요. 그리고 국제공산주의 운동도 소련의 지도를 받는 것으로 귀속됩니다. 소련에서 정립된 ‘정통마르크스주의’ 혹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입니다.

그런데 1920년부터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새로운 경향이 만들어지는데 공산당의 공식 마르크스주의 외에 새로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합니다. 제2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서구의 학계에서 성장해오는 마르크스주의를 흔히들 서구마르크스주의라고 합니다. 그 시초는 지르외지 루카치, 칼 코르쉬 등의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입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샤르트르, 자본논리학파, 분석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한 흐름이 생겨납니다.

페리 앤더슨이라는 『신좌파 평론』의 좌장은, 서구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제시합니다. 이들은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등과 달리 혁명적 실천과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학계에 자리 잡은 지식인들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이고, 경제학이나 정치학보다는 철학이나 미학 등에 특화되어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정치-사회-철학 이론들을 접합시킨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아카데믹한 마르크스주의 입니다. 이들과 대조되는 것이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등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입니다. 이들은 혁명적 실천에 참여하고, 정치-경제적 분석에 침잠하며, 지식인이자 활동가였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제3세계 혁명(쿠바, 베트남, 알제리 등)과 68혁명으로 급진화된 유럽의 대학, 라틴아메리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급속하게 확대됩니다. 그 당시는 서구에서조차 혁명이 일정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었지요. 파리와 프라하,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 체게바라의 게릴라 활동이 그런 낙관적인 혁명적 전망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흔히들 ‘희망의 시절’이라고 합니다. 이 때는 서구마르크스주의, 마오주의, 그람시주의 등 각종 주의들이 흘러넘쳤습니다. 이것이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마지막 불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70년대 이후 프랑스를 기점으로 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식 세계에서 밀려나고 각종 포스트주의가 주도권을 행사합니다. 지식인 세계에서는 마르크스보다는 푸코나 들뢰즈가 훨씬 매력적이고, 페미니즘도 한 때 사회주의와 강하게 결합되었지만 그조차도 마르크스주의와 분리됩니다. 역시나 가장 큰 변종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1980년대에 이르면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로 학위도 받기 어렵게 되고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전공하면 지식인들 내에서 조소의 대상이 됩니다. 파리는 ‘유럽의 지적 반동의 수도’가 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영어권 대학들에서 미미한 명맥만 유지되고 지식인 세계에서 매우 약화됩니다. 68혁명에 대한 정치적 반동이 1980년대 신보수주의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있죠. 경기가 침체된 이후 회복되지 않는 상태를 흔히들 ‘뉴노르말’이라고 주류경제학자들이 부르는데, 이것은 기존 이론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세계 전역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자 미국의 대학들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미하겠지요.

이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오늘날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영국 노동당 좌파의 후예이기도 한 제레미 코빈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하지만 그가 꼭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본소득론을 주장하는 판 파레이스 같은 이들이 한국에서 주목을 받는데요, 이 분은 이론적 원천이 시장사회주의자입니다. 마르크스의 분석수단보다는 오히려 주류경제학의 분석수단을 사용합니다. 버니 샌더스는 민주당 소속이지만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민주당 내 좌파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고전적 사민주의입니다. 오늘날 고전적 사민주의를 전후 케인즈주의 경제체제와 복지국가를 토대로 한 계급타협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지요. 오늘날 이들은 모두 사회주의자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제 경향들 가운데 가장 단호한 분파이자 원칙적인 분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을 대변합니다. 제2인터내셔널이나 코민테른 시기 노동운동은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는 혁명이 일정에 올라 있었다고 생각했지요. 한국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해방 후 적합한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여운형이나 박헌영, 김일성이 정치지도자 5위 안에 들었습니다. 공산주의자가 두 명이나 포함되고 여운형 같은 사민주의자가 여론의 지지율 1위를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한 때 한국에서는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라고 생각하는 좌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노동운동의 특정 정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매우 편향된 사고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다양한 사회주의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사회주의와 경쟁하는 이념으로 보는 게 역사적으로도 맞고 현실적으로도 그렇습니다.

1968년 르노 자동차에서의 CGT 조합원들의 파업 결의 모습

7. 요즘 한국의 현실에서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를 얘기하고 주장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80년대에는 마르크스, 레닌 등의 이름이 교조적 권위를 가졌던 것에 비하면 그때가 어떤 짧은 신기루 같은 현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학문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등 다양한 실천운동에서도 마르크스주의를 고민하고 적용하여 그 지향을 현실에서 결합시키려는 노력 자체가 시대에 동떨어진 시도로 취급받는 분위기이다. 마르크스의 사상, 마르크스주의는 그 역사적 시효가 다했나?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등 실천의 영역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나눠보자.

한국의 정치적 변동은 1980년대에 시작됩니다. 학생사회의 급진화도 이 시기에 진행됩니다. 8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수용은 일본어판을 읽거나 영어판을 읽는 게 다였지만 80년대 중반부터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이 번역됩니다. 학생운동의 주요 정파 가운데 주사파를 제외하면 대부분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읽었지요. 지식인들은 유행처럼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을 번역하거나 저서를 남기지요.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91년 소련의 붕괴는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논쟁을 확산시킵니다. 활동가들은 현장을 이탈하고 전향하거나 우파가 됩니다. 1990년대는 알튀세르 등 서구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지만 이조차도 곧 소멸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연구자들에게도 인기 없는 종목이 되지요. 한국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관심이 커집니다.

문학이론이나 역사학, 사회학 등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종들이 판을 치고 좀 더 진지한 이들은 후기구조주의 푸코, 특히 들뢰즈에서 새로운 빛을 발견합니다. 푸코에 대한 열광은 좌파에서부터 우파에 이르기까지 정말 대단했습니다. 경제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없어지고 미학, 문화, 신체, 욕망, 언어에 대한 관심이 커집니다.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들 하지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도 커집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조류들에 대한 관심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늘날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면 누가 푸코를 읽고 들뢰즈를 읽습니까? 한국의 대학생들은 강신주나 유시민 같은 이들을 읽지요. 오늘날 페미니즘의 수준은 강신주를 소비하는 수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들은 연구자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경험을 유럽의 68세대와 비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올해가 유럽의 68혁명 50주년입니다. 유럽이 이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68세대들은 70년대 급진주의로 이어집니다. 그곳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열정은 지나가고 각종 경쟁하는 이념들이 대세가 됩니다. 후기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언어적 담론들이 70년대 급진주의와 이렇게 저렇게 얽히고 ‘개인의 해방-자율성’이 강조됩니다.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흐름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80년대에 68세대에 대한 반동으로 신보수주의가 등장하지요. 대처와 레이건이 그 상징적인 존재들이 됩니다. 신보수주의도 개인을 강조하는데, 이들은 개인의 자율성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앞서도 썼듯이 이 시기쯤 되면 마르크스주의를 전공한다는 것은 조소꺼리가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유럽을 모델로 삼지만 1980년대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국을 모델로 삼게 되지요. 유럽에서 환멸의 시대가 지속된 것입니다.

그런데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유럽은 한편으로 극우파가 등장하고 그와 대칭적인 수준은 못되지만 새로운 급진주의 정치, 좌파들이 등장합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도 일부 살아납니다. 미국에서 특히 그렇죠. 영국에서는 학생운동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보수당의 카메론 행정부가 내국인 대학생 등록금을 세배로 올리거든요. 뿔이 납니다. 노동운동을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는 요구도 미국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지만, 미국과 유럽 모두 극우파가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도 뚜렷한 현실입니다.

한국에서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포스트주의의 광풍은 약해지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2000년대 한국경제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하지만 그만큼 불평등도 심화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률이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호황이라고 하는 시기의 효과는 줄어들고 불황이 오래가는 전형적인 저성장 사회로 진입한 것입니다. 한국은 매우 빠른 경제성장을 할 때 저성장 사회를 전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저성장 사회에서의 불황은 노동자 내부에서 최약자들,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청년들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부활하지 않습니다. 한국은 말 그대로 환멸의 시대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대중의 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가 시효 만료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주장입니다.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은유는 여전히 의미 있습니다. 미학이나 문화비평, 도시공간의 변동을 분석하는 데에도 계급적 관점을 결합시키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환경 위기를 자본주의적 축적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무엇과 연결시켜야 합니까? 금융화는 산업에서의 이윤율 저하에 대한 자본의 대응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경제학 연구자로서 이야기하자면, 저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위기이론이 현실을 설명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융화가 산업의 정체, 투자의 정체, 생산성의 정체를 야기한다는 것은 주류경제학도 인정합니다. 구조적 위기나 이윤율 저하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늘 강조하듯이, 노동운동은 가장 원칙적인 운동이고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가 조직되지 않으면 노동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궁핍하고 피폐하고 무시당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일수록 마르크스주의는 더 유효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다만 속된 말로 ‘정신승리’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운동에 있든, 정당운동에 있든, 급진주의를 정치적으로 대표하면서 다른 사회주의자들, 진보주의자들, 노동운동과 결합해서 작업하고 활동해야 합니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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