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너나 잘 하세요
        2006년 04월 27일 12: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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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일자 중앙일보 1면

    27일자 중앙일보는 1면에 세계 각국 노총의 노동절 포스터를 모아 놨다. 노동절 기사도 1면에 실어주지 않는 신문이 어쩐 일로 노동절 포스터를 1면 헤드라인에 배치한걸까?

    이 기사는 독일,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노총의 노동절 포스터와 함께 민주노총, 한국노총의 올해 노동절행사 안내 포스터를 대비시키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진국의 포스터는 훈훈하고 따뜻해서 마치 이웃을 보는 것” 같은데 ‘투쟁’을 앞세운 한국 노동 포스터는 너무 후진적이라 비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노동운동이 후진적이라 포스터도 후진적?

    기사를 작성한 김기찬 기자는 우선 민주노총 포스터의 붉은 머리띠를 맨 노동자를 언급했다. 이어서 한국노총 포스터의 망치를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김 기자는 한국의 노동 포스터들이 여성 노동자가 밝게 웃는 모습을 담은 독일노총(DGB)의 포스터나, 캠페인성 내용을 담은 미국노총의 포스터나, 추상미술을 보는 것 같은 네덜란드노총(FNV)의 포스터와 너무 비교가 된다고 지적했다.

    김 기자는 이탈리아 노총(CGIL)의 포스터에 대해서는 “초원을 가로지르는 탁 트인 도로 위에 "헌법을 지키고, 부패를 추방하자(Costituzione, Lotta Alle Mafie)"라는 문구 위에 "발전, 노동, 자유(Sviluppo, Lavoro, Liberta)"를 추구하는 열망을 표시했다”고 설명했다.

    김 기자는 이처럼 포스터를 비교해 보면 한국의 노동운동은 지난 20년간 ‘의식’의 발전 없이 투쟁과 대립의 관행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선진국으로 갈수록 노조는 적대적이고 선정적이기보다는 부드러운 이미지로 국민에게 다가간다”는 장영철 경희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한국 노동운동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충고하기도 했다.

    과연 김 기자의 지적대로 우리의 노동 포스터는 시대착오적이고 후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까. 선진국의 포스터들은 투쟁이 아니라 ‘이웃’과 같은 소박한 내용만 담고 있을까.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헌법을 수호하는 이유

    우선 김 기자가 예로 든 이탈리아 노총의 포스터를 보자. 우선 이 포스터는 기사에 나온 것과 달리 이탈리아 3대노총(CGIL, CISL, UIL)이 함께 제작한 것이다. ‘우리가 함께 만들고 싶은 길’이라는 붉은 색 제목 아래 “발전, 노동, 자유, 마피아와의 투쟁, 헌법”이 적혀 있다. 왜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헌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은 이탈리아 헌법을 읽어보면 쉽게 풀린다.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탈리아는 ‘노동’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이다.” 제3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공화국의 의무는 개인의 발전과 정치, 경제, 사회기구에 대한 노동자의 효율적인 참여를 제한하는 모든 사회적, 경제적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있다”

    국가가 노동에 기반하고 있음을 헌법으로 명시한 나라의 노동절 포스터와, 헌법상의 노동3권조차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나라의 노동절 포스터가 단지 붉은 머리띠 하나만으로 비교될 수는 없다.

    포스터 속의 노동자가 웃음을 잃을 수밖에 없는 현실

    오히려 중앙일보에 되묻고 싶은 것은 왜 한국 노동절 포스터가 해마다 같은 내용을 되풀이 하는지 기사를 쓰기 전에 진지하게 고민해봤는지 여부다.

    민주노총이라고 밝고 화사하게 웃는 KTX여승무원이나 힘차게 걸어가는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 노동자를 포스터에 담고 싶지 않아서 안 쓰는 것이 아니다. 직접고용을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200명이 넘는 조합원이 해고당하는 KTX여승무원들이나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굴뚝에 매달려야하는 비정규직들이 붉은 머리띠를 풀고 웃을 수 있는 사회가 오기 전에 포스터만 밝고 화사하게 만든다고 노동자의 눈물이 가려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노동자들의 투쟁과 고통은 기사로도 취급하지 않다가 난데없이 외국의 포스터까지 동원해 한국 노동운동을 ‘후진적’이라고 폄하하는 신문이야말로 진짜 ‘후진적’인 신문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김기찬 기자는 기사에서 ‘노동절’이라고 표현했는데 혹시 5월 1일은 지금도 법적으로 노동절이 아닌 ‘근로자의 날’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노동절 포스터를 나무라기 전에 노동절을 노동절이라고 부를 수 없는 현실부터 지적하는 게 진짜 언론의 임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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