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의 영상, 노동자를 설득시켜야한다"
        2006년 04월 26일 06: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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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떻게든 견뎌요. 재정적으로 어렵고 인력난도 겪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으로 먹고사는게 아니거든요. 우리에게 필요한건 노동자 동지들의 끊임없는 지지와 관심, 변혁에 대한 신념과 동지애이죠. 이런 것들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면 노동자뉴스제작단은 끝까지 살아남을겁니다."

    지난 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화에 대한 열기와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성숙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점에 탄생한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이 창단 17년에 접어들었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영상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영상제작 교육을 통해 노동자의 손에 직접 카메라를 쥐어주자는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지난 89년 출범한 뒤, 노동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카메라를 돌린 노뉴단의 활동들은 오늘날 주요 인터넷 언론과 진보진영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미디어 실천 운동의 선구자인셈이다.

    <레디앙>은 십수년이 지나 비슷한 시기에 창단한 수많은 진보진영 단체들이 간판을 내린 상황에서도 꿋꿋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노뉴단의 요즘 근황이 궁금했다.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 노동자뉴스제작단 이지영 대표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자리잡고 있는 노뉴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지영 대표.

    지난 92년 입단해 지난해부터 노뉴단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이 대표는 요즘 근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숨을 한번 내쉰뒤 "정신없이 바쁘다"고 짧게 말했다.

    자체적인 다큐 제작활동과 영상교육을 진행하는 와중에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사내방송인 <열열 프로젝트> 제작과 시민방송 RTV의 <노동자, 노동자>라는 프로그램의 제작활동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직 시간은 좀 남았지만 올해 11월 개최될 예정인 제10회 노동자 영화제 준비를 생각하면 이 대표는 앞이 까마득하다고 한다. 4명에 불과한 인원으로 기획, 촬영, 편집작업을 모두 한다고 하니 그 고충은 익히 짐작할 만 하다.

    "두 프로그램은 노동자 교육의 색깔이 짙어요. 평소 우리가 노동자 교육에 대한 고민이 많았었는데 이 기회에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하게 됐어요. 다행히 반응도 괜찮은 편이고"

    현대자동차 사내방송의 열열프로젝트에서 현재 노뉴단이 제작하고 프로그램은 ‘~와 자본주의’ 시리즈이다. ‘임금체불과 자본주의’, ‘산업재해와 자본주의’ 등 이 시리즈가 담고 있는 것들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불합리의 근간에 자본주의가 있다’는 내용이다.

    "임금체불같은 경우는 임금이 후불로 지급되기 때문에 노동자가 미리 대처하고 있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바꿔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것들은 다 선불이잖아요. 왜 유독 임금만이 후불로 지급되는 것인가. 그런 질문들을 노동자들에게 던지는 것이죠. 이 프로그램같은 경우는 현대자동차측에서 제재도 들어오기도 했어요"

    형식에 연연하기보다는 보다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고민에 어려움도 많이 느끼지만 현장 노동자들과 프로그램을 처음 접하는 방송제작자들이 ‘이런 문제가 있단 말이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는 이 대표.

    "그 맛에 하는거죠. 몇날 며칠 밤을 새고 죽도록 고생해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 현장에서 반응이 좋으면 다 풀어져요. 노동자와 소통한다는 느낌. 우리 단원들이 불평안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꺼에요"

    "노동자 다루는 영상, 노동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VHS부터 현재 디지털레코더 방식에 이르기까지 영상제작 방식 변천을 모두 겪은 노뉴단은 우리나라 진보 미디어 운동의 원천이다. 노뉴단을 시작으로 속속 생겨나기 시작한 진보진영의 미디어 실천가들의 수는 십여년전에 비해 괄목할 정도로 늘었다.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노동운동, 민중운동의 현장을 볼 기회도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일반적으로 동영상 방식으로 접하게되는 진보진영 투쟁 현장의 모습에 이 대표는 고민이 많다.

    "요즘 전해지는 미디어 활동가들의 영상을 보면 뉴스라는 느낌밖에는 안들어요. 매체는 수단이고, 노동자들의 또하나의 무기이죠. 생생하고 빠른 소식도 좋아요. 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노동자의 현실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가야하지 않나 하는 점에서는 우려가 듭니다."

    일각에서는 장시간의 기간을 통해 제작되는 다큐 형식을 고수하는 노뉴단에게 ‘현실운동에서 떨어져서 자기 작품만 한다’는 오해를 하기도 한단다.

    "옛날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데…아무래도 매체가 많이 생겨서 그런 것이겠죠. 그러나 자기 작품만 한다는 지적은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노동자를 다루는 영상은 노동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해요. 노동자들이 노동자라서 당하는 문제의 근본이 뭔가. 그걸 알고 대응하게 해야죠. 노동자의 현실에 깊이 파고 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다큐죠. 그런데 다큐는 아무나 제작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긴시간의 교육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 긴 교육을 못 버티는 경우가 많더군요."

    최고참 미디어 실천가인 이 대표는 "열심히 활동하는 미디어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에 상당히 역동적으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성과가 없어 현실 대응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아쉬워 했다.

    "한미 FTA, 노동자와 어떻게 결합시킬지 고민"

       
     
    ▲ 노동자뉴스제작단 사무실에 벽장에 꽂힌 수많은 영상 테잎들. 노동자뉴스제작단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지난해부터 산별노조와 관련된 다큐를 제작하고 있는 노뉴단은 현재 금속연맹 산별노조의 활동을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또, 올해 노동자 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거기에 빅 브라더가 있다>와 <정종태>의 제작을 마친 상태다.

    <거기에 빅브라더가 있다>는 최근 삼성그룹에서 회사직원의 휴대폰을 도청한 사건을 다루면서 자본과 과학이 결합해 노동자에게 가하고 있는 신종 노조탄압의 실태를 집중 조명했다.

    "자본이란게 진짜 무서운거죠. 삼성의 휴대폰 도청사건은 노동자를 옭죄고 있는 자본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거기에 착안한거죠"

    <정종태>는 인물다큐다. 재능교육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비정규직 철폐 운동에 헌신하다가 지난해 2월 위암으로 사망한 고 정종태 위원장의 삶을 그렸다. <정종태>는 지난 4월 1일 정기상영회를 통해 상영됐다. <거기에 빅브라더가 있다>는 오는 6월 시사회를 가질 예정이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노뉴단에게 기자는 다소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한미 FTA와 관련된 진보진영의 투쟁들을 다룰 의향은 없는지.

    "당연히 다뤄야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내용은 고민해봐야죠. 내부 논의도 있어야 할테고. 한미 FTA 같은 경우는 일단 RTV 프로그램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회 전반적으로 미치는 FTA의 각 사안별 파급효과를 시리즈로 만들어볼까 생각중이에요.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한미 FTA가 노동자의 문제와 어떻게 결합시킬지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에요."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출장을 다녀온 이 대표는 그곳에서 노동자 문제를 다룬 영상을 바라보는 노동자들이 영상과 혼연일치가 되어서 함께 분노하고 함께 결의를 다지는 모습에 깊은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노동자와 호흡하고 노동자와 소통하는 그런 영상을 만드는 것이 노뉴단을 이끄는 힘이죠. 노뉴단이 벌써 17년이 됐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그렇지만 노동자가 살아있다면 노뉴단도 함께 살아서 카메라를 잡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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