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대의 종묘, 교회협
    그 동행자 ‘서울복음교회’
    [그림 한국교회] 최태용과 복음교단
        2018년 06월 27일 01: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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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2월 15일에 방영된 tvN ‘알쓸신잡2’의 ‘21세기 종묘’에서 유시민 작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1980년대에는 여기가 어마어마한 핫플레이스였어요. 말도 못하는 핫플레이스.”

    “언제와도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공간들 중에서 건축적으로 다른 데하고 좀 뚜렷이 구분되는 그런 공간들(중략), 이런 것들이 21C 대한민국의 종묘다.”

    출연진 일행은 종로4가 종묘를 찾은 후에 “현대에 대한민국을 하나로 묶는 이념과 생각으로 에너지를 낼 수 있는 21세기의 종묘는 어디인가?”라고 운을 떼고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로 갑니다. 문이 모두 닫혀 있어 아쉽게 여긴 유시민 작가를 중심으로 나눈 대화는 교회의 역사적 가치를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가 맨날 여기 와서 시위 계획을 세우고 유인물을 만들고 다 했지. 경찰이 바로 여기 문 앞까지 왔어. 근데 들어오지는 못해. 교회협 총무님이 나가셔서 잘 이야기해서. ‘여기서 소리 지르고 안 그럴 테니까 너희들도 가라’ 이래가지고 타협해서 귀가 신변안전 보장을 받았다. 그러면 지하철역까지 배웅해주시던 총무님.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고맙지.(중략)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이 집에 들어오면 벌써 마음이 막 따뜻해져. 그게 묘하게 다 종교기관인데 왜 그러냐면 종교기관들은 국제적인 조직망을 갖고 있고 정부에서 함부로 하기 어려운 데 있어요. 그래서 그 기관들이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호해줬어. (중략) 소도(蘇塗) 같은 데네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몰라요. 종로5가 기독교회관이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걸”

    인기 있는 TV 프로에서 교회협을 21세기의 종묘(宗廟)이고 소도(蘇塗)로 인정한 것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현재 9개 회원교회(교단)와 CBS 등 5개 단체로 구성된 교회협은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모체입니다. 군사독재정권시절에 민주화운동과 민중선교, 인권신장과 평화통일운동으로 한국교회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드높였습니다.

    특히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구속자가 속출하자 1974년 7월 18일에 시작한 고난 받는 이들을 위한 ‘목요기도회’(나중에 금요기도회)는 독재권력에 의해 쫒기고 고문당하고 투옥당한 이들의 인권의 보루이자, 정권에 희생당한 유가족 등 억울한 이들이 하소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정세분석과 민주시민 교육의 장이었습니다. 이 기도회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보호받고 한을 풀고 용기를 얻고, 신앙양심을 회복하였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홍정 총무가 근래에 심각하게 무너진 교회협의 위상을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서울복음교회(그림=이근복)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멀지 않은 종로6가에 1992년에 건축한 소박한 벽돌교회당이 있습니다. 서울복음교회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교회협 활동의 든든한 동행자로 조용술 목사님과 오충일 목사님이 ‘기독교대한복음교회’(복음교단)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 목사님은 온화하고 조용하셨지만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서 치열하게 활동하셨습니다. 전북의 여러 교회에서 목회했으며 교회협 회장과 기독교농민회 이사장으로 수고하였습니다. 1990년 범민족대회 공동본부장으로서 베를린에서 북쪽 대표들과 접촉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노구를 이끌고 앞장섰습니다.

    오충일 목사님은 열정이 넘치는 분으로 서울복음교회 담임목사와 교회협 회장을 역임하였는데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으로서 6월 민주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습니다. 2007년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최고위원을 맡아 민주개혁중도세력을 통합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뿌리는 복음교단을 세운 최태용 목사님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신학입니다. 1897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출생하여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국비생으로 공부하던 시절, 친구의 인도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1919년부터 2년간 연희전문 농과에서 선생으로 근무합니다. 1921년 일본 동경영어학교에서 유학할 때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 제자가 되어 김교신 선생, 함석헌 선생등과 교제합니다. 1925년 잡지 천래지성을 발간하여 교회개혁과 신앙쇄신을 주창하고, 이듬해 11월에는 YMCA 대강당에서 <신앙혁명선언문>을 발표하여, 교회의 외세 의존성을 비판하며 재정적인 자립과 신학적 독자성을 추구하는 자생적인 조선적 교회 설립을 주장합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자유로운 학풍의 동지사대학과 청산학원에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라고 3대 표어를 주창하며, 무교회주의와 결별하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조선복음교회(현 기독교대한복음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선교사의 대부분이 갖고 있던 근본주의적 내세적 신앙성향과 3.1혁명 이후 선교사들의 비정치화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으로 조선교회를 독립하고자하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을 위한 조선의 신학으로, 조선인들의 고백에 의해, 조선을 구원할 조선의 교회로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는 참된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과 사회의 변화와 적극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했습니다.

    8.15 광복 후에는 기독교신앙으로 새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독립촉성국민회의 총무부장을 맡기도 하고, 국민훈련원 원장 등으로 농촌운동에 헌신하다가 한국전쟁 때에 북한 공산군에게 순교합니다.

    서울복음교회의 뒷마당에 최 목사님의 동상과 기념비가 있습니다.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창립한 시남 최태용 목사’라는 흉상에는 약력과 함께 본인이 주창한 삼대 표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옆에는 ‘岩上小松(암상소송)’이 적힌 시비가 서 있습니다.

    “거대한 바위/ 한 모퉁이에/ 한 웅큼 되는/ 모래위에 서 있는 너 작은 솔아(중략)/ 네가 가진 생명/ 네가 받은 권능/ 바위틈에 내리는/ 신비한 너의 뿌리/ 점점 깊어지고/ 차차 굵어져서/ 마침내 거암을/ 무너뜨리고 말/ 定命(정명)을 가졌도다/ 아/ 위대할거나/ 너 작은 솔아”

    시 아래 새긴 문장처럼 적지만(少) 순수한(純) 복음교단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분이 1935년 12월 설립하여 1945년까지 섬긴 서울복음교회는 그동안 복음선교와 더불어 에큐메니칼운동과 생명·환경운동에 진력해왔습니다. 박선진 담임목사의 담담하고 깊이 있는 신학적 설교는 복음교단에 면면히 흐르는 신학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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