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의 모내기철,
    피 말리는 전쟁을 마치고
    [낭만파 농부] 김매기의 ‘황홀경’?
        2018년 06월 25일 09: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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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낮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니 창밖이 이글거린다. 창문 너머로 훈김 같은 뜨거운 공기가 흘러든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섭씨 32도를 찍고 있다. 아마 올 들어 가장 더운 날이지 싶다. 열대야를 낀 7월의 미친 더위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이 정도면 들일을 하기가 버겁다. 그저 시원한 곳에 몸을 부리고 쉬는 게 장땡이다. 하지만 ‘농번기’ 한복판에 선 농부한테는 이 강요된 여유가 거북하기만 하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모내기철이 지나고 있다. 모내기를 끝낸 건 열흘 전이지만 그에 앞선 모판 나르기와 뒤 공정인 모 때우기(보식)까지가 포함해 그렇다는 얘기다.

    50마지기 논을 제대로 때우자면 일주일도 휙, 열흘도 후딱인 게 모 때우기지만 그러기엔 몸에도, 농사 일정에도 무리가 간다. 해서 언제부턴가 ‘구석진 부분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절대 논에 들어가지 않고 모판을 들고 논두렁을 걷다가 너무 하다 싶은 곳만 골라서 때운다’는 ‘철칙’을 세웠다. 결주(포기가 빠진 곳)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게 ‘농심’인지라 그걸 억누르기가 쉽지 않다. 해서 ‘철칙’을 지키고 나서야 작업이 사나흘에 그치는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 모 때우기를 마무리한 게 어제다. 그러고 보니 올해 모내기는 여느 해보다 애를 먹었다. 안밤실 열세 마지기 때문이다. 모내기를 닷새 앞두고 갑자기 저수지 수문이 고장나는 바람에 논갈이와 써레질을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그 바람에 애초 설정했던 ‘벼농사두레’의 작업 일정이 틀어졌다. 첫 순서였던 안밤실은 맨 뒤로 밀쳐두고 급히 차례를 조정했다. 두레의 전체 경작지 예순다섯 마지기를 심는데 사흘이 걸린다. 모내기 작업은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마음은 콩밭, 온 신경은 물을 대지 못하는 안밤실 쪽에 가 있었다. 현장진단 결과 수문을 여닫는 연결쇠가 부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걸 고치자면 저수지 물을 모두 퍼낸 뒤 용접작업을 해야 하다는 것이다. 수문도 수문이지만 나로서는 화급히 내 논에 물을 대야하는 처지다. 목마른 놈이 샘을 판다고, 군청으로 면사무소로 종종 거리며 어렵게 양수기 두 대를 얻어냈다.

    어렵게 얻은 엔진양수기 2대

    휘발유를 한 번 채우면 두 시간 동안 돌아가는 엔진양수기다. 이앙기 작업에 모판을 대주랴, 두 시간에 한 번 씩 4키로 남짓 떨어진 안밤실에 가서 연료를 채우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 덕분에 애먼 이앙기 조작자가 스스로 모판을 대가며 작업을 하는 시간이 많았다.

    이렇듯 ‘피를 말리는 전쟁’ 끝에 이앙기 작업시한 하루 전에야 겨우 써레질을 할 수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무척 당황스러웠고, 논갈이-써레질을 맡긴 트랙터 작업자와도 일정조정을 위해 씨름을 해야 했다. 그나마 벼농사두레 도반들이 있어 위안이 되었다. 근수 형님은 군청 쪽에 선을 대 상황을 파악해주었고, 병수 형님과 명호 씨는 그 무거운 양수기를 저수지 제방까지 함께 옮겨 설치를 도와주었다. 하다못해 막판 써레질 성사를 위해 다들 안밤실 쪽에 ‘기’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모인 기가 아마도 트랙터 작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말고.

    못자리에서 모판 끌어내는 모습

    하긴 처음 모농사 단계에서는 모든 일이 술술 풀려나가 웬일인가 싶었다. 그런 불안함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는데, 그게 다 이런 ‘고난’을 예고한 것이었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모내기철은 그렇게 끝나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 모 때우기를 마무리했으니 지금은 ‘제초작업’으로 넘어가는 국면이다.

    모내기 직후 제초용 왕우렁이를 들여보냈다. 한 마지기에 4키로. 물높이를 잘 맞춰 주면 우렁이는 제 구실을 잘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만은 않다. 논배미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니 집중관리가 힘든 탓이다. 몇 군데 논에는 벌써부터 피와 물달개비 같은 논풀이 수북이 올라와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비춰보면 그나마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논풀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가늘고 여리다. 사나흘 지나면 손으로 김을 맬 수 있을 만큼 몸피가 커지게 된다. 그 때까지 물높이를 최대한 높이고 우렁이가 끝까지 제 몫을 다하기를 기다린다. 그래도 안 되면? 뭐 있게나, 논배미에 뛰어들어 맨 손으로 김을 매는 수밖에.

    김매기. 벼농사에서 가장 고단한 노동은 뭐니 뭐니 해도 김매기다. 물론 제초제를 뿌리면 간단히 해결된다. 하지만 그렇게 땅을 죽이고, 생태를 망칠 거였으면 처음부터 농사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엔진제초기를 쓰는 방법도 있지만 아직 그럴 만큼 논풀이 번성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김매기 노동은 힘든 만큼 묘한 매력이 있다. 드넓은 논배미에 홀로 들어서 논풀을 한 가닥씩 뽑아내다 보면 어느새 깊은 삼매경에 빠져든다. 나는 그걸 ‘황홀경’이라고 얘기한다. 어찌 그러냐고? 어디 한 번 직접 해보시라.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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