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민보호는 국제법 의무
    정부, 난민 혐오·차별 조장
    난민협약 가입 25주년, 난민법 5년
        2018년 06월 20일 07: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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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분쟁을 피해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예멘 난민 수용 문제를 둘러싸고 혐오 발언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정부가 이를 방관하면서 사실상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난민네트워크가 주최하고 난민인권센터가 주관해 20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난민의 권리 보호는 정부가 약속한 국제법상의 의무임에도 오히려 정부는 국내 거주 난민을 외면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6월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기도 하다.

    회견엔 난민인권센터,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한국이주인권센터,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이주민공익지원센터 감동, 공익법센터 어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피스모모, 세이브더칠드런 등이 참석했다.

    난민네트워크의 기자회견(사진=유하라)

    한국은 1994년 난민제도 시행 이래 유엔난민협약 가입 25주년, 난민법 시행 5주년을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와 제72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전 세계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도 있다.

    그러나 최근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오히려 난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예멘 난민에 대한 혐오 발언이 극에 달하고 있는 와중에 법무부가 지난 1일 ‘무사증 입국 허가국’에서 예멘을 제외해 예멘 난민 추가 수용을 불가능하게 한 방침이 대표적이다. 난민 혐오 세력의 주장을 정부가 수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정부, 난민문제에 무능 무책임 비겁함 보여줘”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현재 난민문제와 관련해 정부는 부실한 제도를 더더욱 부실하게 운영하면서 난민의 인권보호를 방치하는 무능함, 이 모든 문제를 사실상 난민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함, 일부 국민들의 외국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 뒤에 숨는 잔인하고 비겁한 태도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질타했다.

    발언하는 황필규 변호사

    박정형 한국이주인권센터 상담팀장 또한 “(예멘 난민 입국한 후에) 민간 영역에서는 긴급히 대책위가 구성되고 제주도 내 영어강사 등으로 있는 외국인들이 이들을 돕겠다고 자발적 모금 및 구호활동을 하고 있어도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며 “정부는 제주도민과 난민에 대한 편견을 가중하는 방식으로 16년간 유지했던 예멘 국적자들의 무사증 입국을 간단히 폐지하고 이를 홍보했다”고 비판했다.

    법무부는 더 나아가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전날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난민 보호의 의미와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이 난민 신청이 급증하고 있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며 “경제적 이주와 체류 연장의 방편으로 난민제도를 이용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관련 심사를 더욱 엄정하게 하는 한편, 허위 난민신청 알선 브로커 단속 활동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황필규 변호사는 “인권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정부라 하더라도 세계 여성의 날, 세계 장애인의 날에 여성과 장애인의 인권보호의 의미와 필요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 여성범죄의 급증, 장애인 부정수급의 급증과 그 대책만을 논하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다”며 “법무부는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사실상 난민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난민 신청자의 수를 들먹이며 위기의식을 부추기고, 엄정심사와 브로커 단속이라는 입장만을 밝힘으로써 사실상 외국인혐오, 난민혐오를 조장했다”고 덧붙였다.

    청와대의 예멘 난민에 관한 방침도 마찬가지다. 이날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순찰을 강화하고 범죄 예방에 집중적으로 나서 불필요한 충돌이나 잡음을 방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순찰 강화와 범죄 예방의 경우 제주 도민들을 중심으로 걱정과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며 “예멘 난민들이 위험한지 아닌지에 대한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난민 보호를 위한 제대로 된 방침도 없는 상황에서 범죄예방에 나서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등 예멘 난민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예멘 난민들에 대한 혐오는 근거 없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예멘의 조혼 문화와 관련한 비난 역시 현재 예멘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나오는 것들이다.

    나영 지구지역네트워크 활동가는 “한국의 여성인권이 붕괴되고 난민들이 한국 여성들을 성폭행할 것이라는 그 글들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반복되어온 혐오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며 “세계 어느 곳, 어떤 사회이든 심각한 문제가 있고,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한국에 많은 미국인들이 살고 있지만 우리는 누구도 미국의 사회문제나 미국에서 일어난 범죄를 이유로 미국인들이 모두 이 땅에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미국인 모두의 문제라거나 그것만으로 그 사회를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영 활동가는 “두려운 마음을 무시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며 “많은 이들이 예멘의 조혼이나 할례, 명예살인 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예멘에서 어떠한 이유로 조혼이 급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는 “전쟁 이후 80%의 가구가 막대한 빚에 시달리고 있고 더 많은 어린이들이 빈곤에 허덕이면서 소년들은 전쟁터로 끌려가고 소녀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문제로 인해 강제 결혼에 내몰리고 있다”며 “15세 이하 소녀들의 조혼 비율은 전쟁으로 인해 급증한 것이다. 2006년 14%이던 15세 이하 조혼 비율은 전쟁 이후 45%까지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예멘 여성들의 피해 사례를 타자화하여 우리의 공포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하는 것은 오히려 매우 윤리적이지 못한 행위”라며 “우리가 지금 할 일은, 한국에 온 예맨 난민 여성과 아이들이 한국에서는 좀 더 다른 삶을 찾고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난민과 범죄 연계 이미지 강화하는 비윤리적 보도

    난민 혐오를 선동하는 세력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보도하는 일부 언론의 비윤리적 행태에 대한 비판도 쏟아졌다.

    정신영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한국의 난민 수용에 관한 유례없는 수의 언론 보도는 이슈에 대한 이해도 증가가 아닌,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보도로 인해 제주도에 온 난민들에 대한 첫인상은 ‘가짜난민’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인 무슬림 국가 예멘 출신’으로 고착화됐고, 난민들은 잠재적인 범죄자라는 메시지까지 심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 변호사는 대표적인 예로 지난 18일 SBS 뉴스가 예멘 난민 문제를 ‘케냐 젓가락 살인사건’과 연관 짓고 제주도가 예멘 난민 숙소로 변했다고 주장한 보도를 꼽았다. 2016년 케냐 출신 난민이 젓가락으로 한국인을 살해했던 사건으로, SBS는 이 기사에서 예멘인들 수백명이 제주도로 몰려오면서 과거 외국인 난민이 한국인을 살해한 ‘케냐 젓가락 살인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더 나아가 가해자가 ‘난민’이라는 점을 부각하며 당시 케냐인이 한국인을 어떻게 살해했는지 자세히 묘사했다.

    정 변호사는 “기사 제목부터 내용까지 일관되게 난민들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며 “무엇보다 난민과 범죄를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기사를 통해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 대한 인상이 왜곡될 수 있음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무사증으로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인은 561명으로 68만명 이상의 제주 총인구의 0.082%에 해당하지 않는 수임에도 제주도가 ‘예멘 난민 숙소’로 변했다는 비논리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을 통해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수의 난민들이 제주도에 왔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고 과장·왜곡 보도에 관한 문제도 지적했다.

    정 변호사는 “언론은 난민들이 잠재적 범죄자라는 잘못된 인식의 확산과 난민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조성하는 것을 즉시 중단하고, 예멘인들의 난민신청이 증가하게 된 배경에 대해 정확하게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랍 출신의 난민인권활동가는 “예멘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나라를 떠나는 것이다. 폭탄 때문에 집이 파괴되고 가족도 죽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안전한 나라이자 민주적 나라라고 생각하는 한국을 선택하고 있다”면서 “모든 아랍 사람들이 전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다. 한마음으로 예멘 사람들을 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난민인권단체들은 이번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를 계기로 정부가 ‘난민과 싸우기’보단 난민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2017년 기준 한해 9,942명의 난민신청이 있었지만 심사 공무원은 전국 38명뿐이다. 1명의 공무원에게 주어지는 심사 검수는 300건 이상이다. 난민 신청자들은 평균 7개월을 기다려 1차 심사 결과를 받을 수 있고, 심사 절차에 대한 상세한 안내도 없으며 통역도 준비돼있지 않아 허위통역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난민 신청자에 대한 생계비지원제도 등 처우 문제도 열악하다. 난민 신청자에게 신청 초기 6개월 간 지원되는 생계비지원제도는 6개월 이후에 취업허가가 가능한 신청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산이 없어 전체 난민 신청자이 3.2%에게만 돌아갈 뿐, 나머지 97%의 난민 신청자는 취업도, 생계비 지원도 없는 6개월을 보내야 한다.

    황 변호사는 “난민문제와 싸울 의사나 능력이 없는 정부는 난민과 싸운다”며 “난민 탓과 국민 탓을 오가며 난민에 대한 학살을 방조하고 난민에 대한 인권유린을 사실상 교사하는 무능, 무책임, 잔인하고 비겁한 태도의 정부는 우리의 정부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꿈꾼다는 현 정부에서 난민들의 보호에 어떤 전향적인 입장과 태도를 취해야할지는 자명하다”고 강조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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