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석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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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25일 01: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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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 언론인의 역할 모델

    우리 사회 비판적 언론인으로서 하나의 역할 모델을 만든 손석춘이 새 책을 냈다.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 짧은 글들을 묶은 것이지만 어느 한 편도 예사롭거나 그저 그렇게 쓰지 않은,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며 문제들을 돌파해 들어간다. ‘손석춘식 글쓰기’가 갖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요즘같이 미문과 스타일이 압도하는 글쓰기 추세를 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으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갑다는 표현은 어쩌면 부적절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면 푹신한 소파나 안락의자에 앉아 긴장 없이 눈 가는대로만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세를 고쳐 잡아야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읽게 하는 게 손석춘, 그의 글이다. 불편하게 만들지만, 현실과 비판적으로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 아닌가.

    그의 글이 문제 삼고 있는 현실은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대학, 언론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자리하는 실력자들 거의 전체를 망라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언론과 그 사주들, 수구보수 정당의 시대착오적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일본의 지도급 인사들이 보이는 패권적 행태도 피해가지 않는다.

    누구보다 비판의 핵심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개혁’을 ‘개혁’할 때다. 낡은 것으로 고침은 결코 개혁이 아니다. 개혁은 새롭게 고침이다…… 간곡히, 거듭 촉구한다. 이 땅의 민중이 열망해 온 ‘개혁’을 더는 우롱하지 말라. 누가 권력을 주었는지 잊었는가.”

    손석춘이 노무현 정부에게 던지는 이 말 속에 한국 사회의 슬픈 현실이 있다. 민주개혁의 실종과 사망, 그것은 타살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죽음, 곧 자살이었던 것이다.

    냉전반공주의의 뒤틀린 심사를 나타낸 김수환 추기경도 성역일 수 없었으며, 정연주 KBS 사장과 이미 운명을 달리한 정운영 중앙일보 논설위원에 대한 비판 역시 날카롭다. “언젠가 내가 타락할 때 그 잘못을 지적해 줄 후배를 ‘각오’하고 있다.” 오늘의 사회 현실에서 이런 자세를 갖는 언론인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크게 위안 받는다.

    회피하고 싶은 불편함

    손석춘이 비판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오해다. 손석춘은 먼저 흥분하지 않는다. 사태의 앞뒤를 가리고 경중을 따져 문제의 원인과 구조의 얼개를 밝히고 나서야 그는 책임감을 촉구한다. 그런데도 그의 글에 대해 너무 세다고 말하거나, 지나치게 날카롭다고 하면서 회피하는 주변의 평가가 많다. 왜 그럴까? 의아할 따름이다.

    그의 글이 날카롭게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태의 핵심 구조를 집약적으로 아주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없는 큰 장점이고 오히려 부럽기까지 한 일이다. 그는 문제를 돌려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글의 핵심 주제에 다가가는 방식은 직접적이며 초스피드이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이런 저런 관계 때문에 쓸데없이 눈치 보지 않으니 이 역시 좋은 점이다.

    추상적 원리나 외국의 철학 사조들을 경쟁적으로 인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떠벌리는 종속적이고 속물적인 지식인 문화가 압도하는 현실에서, 현실을 말하고 그것도 곧바로 말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받을 일이다.

    “대한민국 자본주의가 오늘 천박한 까닭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비인간적인 살벌한 경쟁에 내몰리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아직 12%에 지나지 않아서다.” 얼마나 간명하고 명쾌하게 핵심을 찌르는 말인가?

    그런데도 손석춘을 불편해하는 분위기는 강하다. 어떤 이는 손석춘이 아무리 오늘의 한겨레가 처해 있는 현실을 실증한다 하면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손석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돌려 묻고, 어떤 이는 그의 글이 너무 선동적이라고 해서 탓한다. 그래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에서 손석춘은 자신이 이렇게 평가되는 것에 대해 정말 애끓게 설명하고 솔직하게 이해를 구하려 한다. “오랜 세월 한국의 부자신문과 친미언론들이 퍼뜨려 좋은 말들에 우리 모두 어느새 친숙해 있어서다. 그 결과일 뿐이다. 저자의 칼럼이 ‘과격’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이도 모자라 그는 “저자의 칼럼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저자가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다짐해본다”고 말하고, “그랬다. 독자에 드리는 서툰 사랑의 편지, 연서였다”라며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이 글이 손석춘의 바람대로 읽힌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는 낙관의 모티브가 된다. 그럴까? “비판을 본령으로 하는 언론인에게 결국 남는 것은 인간적 쓸쓸함이 아닐까”를 끄트머리에 덧붙이는 그의 말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거짓에 대한 비판, 그리고 꿈을 향한 열정이 상실되어버린 오늘 바로 우리의 자화상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우리는 모두 부라퀴들

    ‘부라퀴’. 손석춘이 잘 쓰는 우리말 표현이다. “제게 이로운 일이면 영악하게 덤벼대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 주위를 채우는 사람들, 그가 진보건 보수건 떠나 대체적으로 이런 류의 사람들이다. 무슨 한가한 도덕률을 되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이 그렇다는 것은 뭔가 한국 사회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이다. 손석춘이 강조하듯 “민주주의를 일궈온 우리가 ‘무장해제’ 말아야”했는데, 무장해제 되었다는 말이다.

    손석춘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런 우리 스스로들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심리의 반영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 퇴락에 대해 일말의 공범의식이 있는데 그 불편함을 마주하기 싫다는 표현이다. 그래도 회피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손석춘은 책에서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주장은 하되 ‘거짓말’은 말라.” 우리 모두 그래야 할 것이다. 알맹이 없이 이미지만이 난무하고 참과 거짓이 뒤섞인 오늘의 세상에서 손석춘은 불편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의미가 있다.

    끝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사람들과 더불어 숨쉬고 싶어 하는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에 살짝 수작을 걸어본다. “너, 참 괜찮은 놈이야. 근데 말이야, 왜 읽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면서도 가슴이 저리면서 아파오지? 아직 미련이 남아서일까,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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