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일랜드 국민들의 정의로운 선택
    [기고] '낙태금지 헌법 폐지' 국민투표와 한국의 현실
        2018년 06월 11일 09: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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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5일 아일랜드에서 실시한 낙태 금지 헌법 폐지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낙태 금지 폐지 찬성이 66.4%로 반대 33.6%를 압도했다. 따라서 낙태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 아일랜드 수정헌법 8조(1983년 통과)는 35년만에 폐지될 예정이다. 폐지될 예정의 현행 아일랜드 헌법에서는 여성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은 경우에만 낙태가 허용되고 강간, 근친상간, 태아 이상징후의 경우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강석주 젠더교육연구소 연구원의 기고글을 싣는다. 한국에서도 낙태 이슈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몰카 사건에 대한 경찰의 성차별적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집회가 지난달 20일에 이어 6월 9일에도 2만여 명이 집결하는 등 여성들의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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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연수를 하던 2009년,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놀란 내게 어떤 아이리시(아일랜드) 친구는 “한 시간이면 영국에 가서 수술 받을 수 있는데 미처 가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해주며 패배감 어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관광명소로도 유명한 트리니티 칼리지의 화장실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도 붙어 있었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도 뜻밖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도 같은 내용의 검은색 스티커가 붙어 있는지 칸마다 문을 열어 확인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대 초반의 여대생들이 피임 실패 여부를 처음 확인할 수도 있는 공간에서 마주해야 하는 메시지의 폭력성 때문에 식은땀이 났다. 당시는 임신중절시술을 했다는 이유로 의사가 의사를 고발하여 한국이 낙태 논쟁 국면으로 들어서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바다 건너 멀리까지 와서 경험하는 이 이질적인 풍경들이 우리의 문제가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지난달 25일 아일랜드 유권자의 2/3가 찬성한 국민투표 결과로 헌법상 낙태금지 조항을 폐지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써 임신 12주 이내의 중절 수술을 예외 없이 허용하고, 수술 전 3일간 숙려기간을 두는 입법안이 제출될 전망이다. 가톨릭 종교 전통이 뿌리깊은 문화로서 존재하고 개인의 삶의 양식을 지배하는 공간에서 국민의 다수가 낙태금지 반대를 원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제들의 잇따른 성폭력과 조직적인 은폐가 가톨릭 전반에 대한 위상과 신뢰를 낮추기도 했고, 시민의회 제도를 통해 꾸준히 토론하고 민의를 성숙시켜온 결과다.

    5월 26일 압도적 찬성에 환호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출처=ionline.sapo.pt)

    이미 아일랜드는 2015년에도 국민투표를 통해 동성결혼 합법화를 이끌어낸 경험을 갖고 있다. 강고해 보이던 종교적 전통과 보수적 인식을 시민들의 결집으로 거듭 균열시켜 내고 있는 아일랜드의 변화를 전 세계가 흥미롭게 주목하고 있다.

    특히 31세 치과의사였던 사비타 할라파나바르(Savita Halappanavar)가 생명이 위독했음에도 태아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는 이유로 낙태 수술을 거부 당하다 사망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죽은 사비타와 그녀의 부모를 위로하는 노인들의 “Grandfathers for Yes” 캠페인도 화제가 되었으며, 이는 이번 투표에서 세대별 고른 찬성표로 증명됐다.

    개신교나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천주교가 유독 낙태 이슈에 완고한 이유는 성모 마리아를 모범적 신앙인으로 공경하는 신심 행위에서 비롯된다. 미혼이었던 마리아가 정혼자 요셉과의 관계 밖에서 생긴 뜻밖의 아이를 낳기로 한 어려운 결정이 없었다면 예수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톨릭의 교리이다. 즉 성모 마리아의 행동과 결정이 그리스도교의 출발을 가능하게 했을 만큼 중요했다는 의미 부여인 셈인데, 이것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 다른 여성들을 박해하는 표상으로 오용되는 것은 복음의 측면에서도 정의롭지 못하다.

    이것은 마치 죽을 각오로 성폭력 상황을 모면하려다 죽음에 이른 여성을 추켜세움으로써, 죽지 않고 성폭력을 당하게 된 피해자 여성을 비난하는 구조와 동일하다. 낙태에 엄격할수록 여성들이 사지로 내몰리는 것은 자명하다. 가톨릭은 “내 자궁에서 묵주를 치우라”는 세계인의 요구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아일랜드, 폴란드, 칠레, 필리핀 등 가톨릭이 득세한 나라에서 여성들의 인권과 건강이 얼마나 위협받아 왔는지 직시해야 한다.

    지난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키비아 타마킨(Civia Tamarkin) 감독의 다큐 <Birthrights: A War Story, 2017>가 상영됐다. 이 영화는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결정 이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낙태를 비범죄화 했지만 지난 40년간 꾸준히 이를 뒤집어온 판결들 때문에 여성들의 건강과 재생산권이 어떤 방식으로 박탈당해 왔는지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도 특별히 가톨릭을 위시한 종교계가 문제가 됐다. 가톨릭 의료 네트워크의 공고함은 임신중절수술을 하는 병원들이 평판을 두려워하게끔 하는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산부인과 전문의의 의료행위를 위축시키고 결과적으로 적절한 서비스가 필요한 여성들의 접근권을 제한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을 낙후된 인식으로 단순 배제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들이 법 위의 권력집단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피임을 낙태의 여동생” 쯤으로 여기는 프레임을 만들어 부도덕한 일로 매도하는 위험한 인식을 사회에 전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초급 수준의 성교육을 통해 교정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낙태를 형법에서 죄로 규정하고 있고, 이에 대한 위헌 심사가 진행 중이며 9월 안에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한다. 정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명분을 찾고 있기 때문에 낙태죄 폐지에 미온적이고, 한국 천주교는 100만 서명운동으로 헌재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가 인정하듯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은 여성이 가져야 할 기본권이다. OECD 가입국 중 80%의 나라에서 임신부가 요청하면 주수를 고려하여 낙태가 가능하다.

    한편,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야 한다거나, 실제 인공임신중절을 수행하는 인구가 많아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거나, 여성과 의사만 처벌하고 남성을 예외로 두는 것이 차별적이라는 문제제기는 중요하면서도 본질적이지 않다. 수정되는 순간부터 태아의 보호권이 발생한다고 보면서 이를 국가가 대신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임신한 순간부터 여성의 몸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괜찮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권 침해적 발상이다. 태아와 여성의 삶을 가장 종합적으로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은 임신부 당사자이다. 임신과 출산은 삶의 가치관과 에너지를 송두리째 전환시킬 수도 있는 막대한 사건이며, 여성은 임신한 순간부터 약 10개월 동안 계속되는 몸의 변화를 겪고, 양육의 과정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주양육자로서 몇 십년의 돌봄노동을 감행한다. 따라서 국가는 당사자 여성의 결정을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신뢰해야 하며, 이들이 가장 종합적인 고려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제반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무엇보다 국가는 국민들이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요즘 같은 4차산업 기술혁명 시대에 아직도 완벽한 피임법이 개발되지 못했다는 것이 매우 모순적이지만 이는 사실이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발간한 사례집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2011)』를 보면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콘돔을 착용했음에도 임신하게 된 경우가 있다. 운이 나빠 피임에 실패한 사람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이들이 임신 철회를 하나의 가능한 선택지로 고려할 수 있게끔 돕는 안전하고 믿을만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책임은 국가에 있다. 그러나 현행법 시스템에서는 불법 낙태약의 부작용, 높은 시술 비용, 관리 받기 어려운 후유증, 믿을 만한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 헤매다 임신주수가 늘어나는 문제 등을 여성 개개인이 오롯이 떠안고 있다.

    우선은 헌법소원심판 결과가 중요한 국면이 되겠지만, 이와 별개로 사회문화적인 논의가 활발히 진전돼야 한다. 우리도 미국과 같은 후퇴적 상황을 맞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2016년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가임기 여성지도에서 드러났듯이 국가가 그동안 여성들을 어떤 존재로 상정해 왔는지에 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가발전과 경제성장의 도구로 여성의 재생산권을 사유하던 기존의 관점이 총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개별 여성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놓여진 경제적 상황 및 사회적 위계가 공론화되어야 하며, 임신중단을 경험했거나 고려하는 여성들의 사연이 그들의 처지와 상황, 맥락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들이 낙인 없이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다양한 피임법을 포함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교육과 피임 실패 시 접근할 수 있는 안전한 의료서비스에 관한 정보가 투명하게 양성화돼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존재의 재생산 정의라는 이슈로 확장돼야 한다.

    여성들이 낳지 않을 권리를 하나의 선택지로 갖지 못한다면 공적 노동에 참여하여 활약해야 할 시기를 놓쳐 경제적, 계급적인 지위 상승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성평등한 사회가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만이 태아를 앞세워 여성의 인생을 막을 수 있다.

    필자소개
    젠더교육연구소 ‘이제(IGE)’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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