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칼도 뽑기 전에 항복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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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24일 03: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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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이번 독도 수역 해저 측량을 둘러싼 한일 간 마찰이 굳이 승패를 따질 필요도 없이 일본이 자신의 목표를 100%를 달성했다고 지적하고, 한국 독도 외교의 무사안일을 질타했다.

    노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인 난중일기에 ‘조용한 외교는 조용히 끝내야 한다’는 글을 통해서 이 같이 밝히고 청와대가 이번 사태를 ‘원칙을 지켜낸 외교적 협상의 결과’라고 자화자찬한 것에 대해 “이는 국민들이 목격한 현실과는 너무 다르며, 청와대가 이런 인식이라면 독도의 앞날 역시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노회찬 의원이 쓴 글 전문.

    조용한 외교는 조용히 끝내야 한다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측량선의 독도수역 진입계획으로 인해 촉발된 한일 갈등은 22일 양국외교차관의 협상으로 일단 봉합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원칙을 지켜낸 외교적 협상의 결과”라고 자화자찬하는 청와대의 평가는 사태를 예의 주시해온 국민들의 근심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청와대의 인식은 우리 국민들이 목격한 현실과는 너무 다르며 청와대가 이런 인식이라면 독도의 앞날 역시 순탄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말에서 실력행사로, 극우단체에서 일본 정부로

    그간의 독도 도발이 일본 수상, 장관, 대사 등 고위 정치인의 말로 나타났던데 반해 이번 사태의 특징은 최초의 실력행사로 나타났다는 것이고 이 행동이 일부 극우단체가 아니라 일본정부에 의해 충분히 준비되고 계획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상황은 처음부터 일본이 주도해갈 수밖에 없었다.

    4월 17일 일본 외무차관 야치쇼타로는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 측량선의 독도수역 진입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오는 6월 국제수로기구(IHO)에서 한국이 독도 해저 지형의 명칭을 제안할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대안을 제출하기 위해서”라고. `일본 영토인 독도해저 지형에 한국정부가 한국지명을 붙이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를 위해 18일 일본정부 측량선 두 척이 도쿄를 떠나 사카이항에 입항하였다.

    그런데 19일 반기문 외통부장관은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국제수로기구를 통한 해저지명 등재에는 면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다. 관계 부처간 협의를 거쳐 적절한 시기에 지명변경을 추진하고자 한다”. 올해 6월 21일부터 열리는 국제수로기구 회의에 독도주변 수역 18개 한국명을 등록할 예정이었던 정부(해양수산부)계획의 철회를 사실상 천명한 것이다.

    독도 실효적 지배 정말 하고 있는 건가

    상대방이 칼집에서 칼도 뽑기 전에 항복 선언이 나온 것이다. 그러자 일본은 21일 야치쇼타로 외무차관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전리품을 문서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야치 차관을 한국에 보낸 아소다로 일본외상은 “한국이 국제수로기구에 한국식 해저지명 등록신청방침을 바꾸지 않는 한 독도수변 수로측량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고 협상가이드라인을 재차 천명하였다. 결국 이틀에 걸친 양국 외무차관들의 협상 끝에 한국은 “올해 6월 국제수로기구에 한국식 해저지명 등록을 신청하려던 방침을 포기”하였고, 일본 측량선은 도쿄로 돌아갔다.

    청와대는 해저지명 등록을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일본 측량선도 6월 30일까지만 철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7월 이후 한국정부가 해저지명등록을 다시 시도할 경우 일본 측량선은 다시 진입을 시도할 것이고 이번처럼 ‘원칙을 지켜낸 외교적 협상의 결과’에 의해 또다시 해저지명등록을 연기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결국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독도수역의 해저지명을 일본의 방해로 등록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본정부는 목적한 바를 100% 달성했고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목적 달성을 어쩔 수 없이 용인하였다. 굳이 승패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결말이다.

    ‘조용한 외교’의 반대가 ‘시끄러운 외교’ 아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조용한 외교’의 노선전환이 얘기되고 있다. 실제 ‘조용한 외교’의 한계와 허상이 지적된 것은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조용한 외교’의 반성이 곧 ‘시끄러운 외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시끄러운 외교’라면 그것 역시 이제까지 한국 외교노선의 또다른 측면이기도 하였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측이 처음부터 목적을 분명히 하고 냉정하게 이를 관철시켜나가는데 반해 한국측은 집밖에선 유약하면서도 자기 집안에선 강경한 외유내강 외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외통부장관이 일본 요구의 수용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히고(19일) 사흘만에(22일) 이를 문서화하는 하는 동안 대통령은 ‘여야지도부 만찬’(18일)이라 하여 사태의 <진중회의> 같은 것을 소집하여 전의를 다지는가 하면 외통부장관은 한국정부가 계속 부정해온 배타적 경제수역(EEZ) 독도기선을 고려할 수 있다는 깜짝 선언(18일)을 하기도 하였다.

    21일 양국 차관회담에 들어가는 한국 외교차관은 “대한민국이 두 쪽이 나더라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끝까지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을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는데 일본 측량선 두 척이 사카이항에서 정박 중일 뿐인데 마치 임진왜란을 맞는 장수처럼 비장하였다. 물론 그가 말한 ‘어떤 수단’이란 ‘한국측 계획철회’임이 바로 다음날 드러났다.

    독도분쟁에 대한 역대 정부 대응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독도를 실질적으로 영유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 무사안일이다. 우리가 실제 점유하고 있으니 조용히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용한 외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독도도발이 본격화된 1996년 이래 ‘조용함’은 있었지만 ‘외교’는 없었다. 외교를 위한 ‘준비’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정치적 필요에 의해 독도는 ‘천덕꾸러기’ 이하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조용하기만 했지 외교는 없었다

    1980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느닷없이 일본에 대해 60억불의 안보협력차관을 요구했던 대통령 전두환은 다음해 1월 일본 방문에서 40억불 차관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돌아온 그가 한 일은 정광태가 부른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를 방송금지곡으로 묶어버리고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정보기관으로 끌고 가 엄청나게 고문하고 독도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풀어 준 것이다. 홍순칠은 이 일로 화병이 도져 몇 년 뒤 사망하였다.

    1994년 UN해양법에 따라 EEZ 2백해리가 발효 되자 일본은 재빠르게 1996년 독도를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 기점으로 선언하고 그해 9월 하시모토 자민당정권은 독도 영토회복을 총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천명한 김영삼 대통령의 정부는 1년 동안이나 침묵하다가 1997년 7월 독도는 마치 남의 땅인 양 울릉도를 배타적 경제수역 기점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하면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던 것이 ‘조용한 외교’의 본질이었다.

    1997년 12월 일본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 함께 한국에 긴급 협조 융자하는 대가로 독도 문제를 일본에 유리하게 연계시키겠다고 밝혔다. 11월 28일 일본을 방문한 임창렬 부총리에게 그 뜻을 이미 전달했다는 것이다. 결국 독도는 섬이 아니라 EEZ가 적용되지 않는 무인암초이며 그래서 지명대신 좌표로 표기하고 한일양국의 중간수역에 포함시키는 신한일어업협정이 1998년 9월 타결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 다음해 30억불의 차관을 제공하였다.

    역대 정부의 독도 포기 행위들

    <조용한 외교>가 극에 달한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이 발효되면서 그간 간헐적으로 이뤄지던 민간인의 독도 상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2000년 1월 1일 새천년 해돋이 생중계를 위한 방송3사 중계팀은 독도 입도가 금지되어 울릉도에서 해돋이를 중계해야 했다. 부산 아시안 대회에선 남북응원단이 한반도기라 부르는 남북 단일기를 흔들었는데 북측과 달리 남측에서 제작한 한반도기엔 독도를 표시하지 못하게 하였다.

    2002년6월에는 울릉도 어부들이 미역걷이를 나가 독도에 배를 대다가 경비대의 발포와 함께 경고방송을 듣고 혼비백산 도주하였다. 그해 한국통신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정부의 반대로 독도에 기지국을 설치하지 못했고 울릉도에 독도우체통을 설치하는 일도 ‘조용히’ 하라고 정부는 지시하였다. 그러는 동안 2000년부터 5년간 일본 시마네현 의회에선 독도문제가 모두 49건 논의되었다. 영토문제가 17건이었고 어업협정문제가 20여건이었다.

    조용한 외교는 이제 조용히 끝내야 한다. 지난 10년간 점증하는 독도 도발 앞에서 더 이상 일본 눈치보기 외교는 막을 내려야 한다.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아무런 대책도 노력도 없이 일만 발생하면 군대를 보내느니 호텔을 짓느니 하는 헛발질도 그만 두어야 한다. 외교란 소리 없는 전쟁이다. 지난 10년간 소리만 안 난 것이 아니라 전쟁자체가 없었다. 독도 수역 해저지명이 지난 28년간 쓰시마분지, 순요퇴 등 일본식이름으로 통용되어 오는 동안 조용한 정부는 무엇을 하였는가?

    독도문제의 국제정치적 성격

    독도문제에 대한 반성적 고찰은 우리에게 이 문제를 점차 우경화, 군사화 되어가는 일본의 변화에 대한 총체적 인식 하에서 다루도록 요구하고 있다. 후쇼샤 교과서, 야스꾸니 신사참배, 독도, 평화헌법 개정 등의 문제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각각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추동하는 정치세력에겐 모두 밀접한 연관을 갖는 단일 계열의 사안들이다. 그래서 독도문제는 영유권문제이며 곧 영토문제이지만 그것으로 그치진 않는다.

    이제 독도문제는 21세기 동북아 질서에 관한 문제이며 일본의 향후 역할과 지위 그리고 한일관계에 밀접한 연관을 갖는 문제이다. 사건 초기인 지난 17일과 19일 버시바우 주한미대사가 서울에서 한일양국관계자를 접촉하며 ‘동북아균형자’ 역할을 한 것처럼 독도문제는 한미동맹, 미일동맹과도 닿아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남북, 한일, 한미, 한중관계 등 동북아 질서 속에서 한국의 지위와 역할을 스스로 자리매김하고 그 조건을 만들어가는 전략적 고민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 이제 독도문제는 독도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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