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냉면만 먹고
    끝낼 일은 아니니까
    [밥하는 노동의 기록] 평화의 나눔은 민족이라는 집합 넘어야
        2018년 06월 07일 10: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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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의 남북정상회담은 오래 남을만한 기억이다. 북의 지도자는 바지통을 펄럭이며 옥류관의 평양냉면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왔고 나는 당장 오늘은 유명짜한 평양냉면집에 가지는 못해도 올해 안에 친구들과 개성 시내 정도는 유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 전에 약속하고 만났다는 두 번째 정상회담 얘기를 들으니 2018년의 유행어는 ‘몰다고 하문 안 되갔구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회담 합의문에서 새로운 합의를 만들기보다는 그 동안 지켜지지 못한 기존의 합의를 돌아보겠다는 의지를 읽었다. 좋은 일이다. 분단도 반목하며 살았던 오랜 세월도 우리만의 의지는 아니었다. 지켜지지 못했던 기존의 합의도 합의 당시엔 빈말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평화와 공존을 위해 ‘민족’이 다시 그리고 여전히 호출되는 것이 싫다.

    오랜 기간 민족에 대해 배웠지만 나를 가르쳤던 사람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가르침은 민족의 정의가 아닌 한민족의 뿌리부터 시작해 한민족의 우수성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나는 혼자 한민족이란 ‘한국에 살았거나 살고 있으면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의 집합’ 정도로 생각했다. 국민학교 중앙 출입문 근처 게시판엔 항상 ‘세계 속의 한민족’ 같은 게시물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왜 미국 살면 교포고 중국 살면 동포인지 궁금했지만 딱히 답을 주는 사람이 없어 한국에서 멀리 살면 교포고 가까이 살면 동포라 결론 내린 적도 있다.

    2006년에 미식축구 선수인 하인스 워드가 내한했을 때 언론의 설레발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부끄럽다. 주한미군이었던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한 살 이후로는 계속 미국에 살았지만 뛰어난 선수라는 이유로 한민족의 자격을 얻었다. 언론이 띄우자 사람들이 그를 보러 몰려들었고 급기야 경호팀은 하인스 워드의 주변에 빨간 끈을 쳐서 접근을 막았다.

    한국에도 안 살고 한국말도 모르지만 혈연 중에 한국인이 있으면서 외국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면 한민족으로 치는 것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저 나는 핏줄에 목을 매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생후 6개월에 프랑스로 입양돼 장관이 된 플뢰르 펠르랭이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 사람이며 생물학적 친부모를 찾을 생각도 만날 생각도 없다’라는 말이 오히려 반가웠다. 내가 유리할 때만 호출하는 개념이라면 누구에게도 도움 될 일은 없다.

    우리 동네는 결혼 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올바른 표현인지 의심스럽지만) 중국 동포, 근처 대학의 교환학생들이 섞여 살고 있다. 밤에 큰 슈퍼마켓에 가면 히잡을 쓴 여학생들이 목구멍을 긁으며 올라오는 발음이 섞인 말로 채소를 고르고 집 앞 작은 태국음식점은 점심시간이 되면 근처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태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높고 둥근 어조로 수다를 떨며 밥을 먹는다. 음식점 사장님은 내 음식이 입에 맞느냐 물어보고 싶은데 태국어를 모른다며 안타까워하는 중이다. 집 뒤 다세대 주택 공사장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이주노동자들의 한국어는 ‘아니, 아저씨, 내가 하는 말은 그게 아니고요’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고 나는 십여 년을 경영하여 간자로 쓴 몇 개의 단어를 겨우 눈에 익혔으며 중국 식재료상의 사장님 덕에 두반장이나 라오깐마 소스를 성조에 맞춰 말하는 법을 배웠다. 전봇대에 붙인 전단지로 미루어 볼 때 체류비자를 위해 예전엔 네일아트 자격증이 인기였는데 요샌 세탁기능사나 버섯재배 자격증이 더 필요한 듯싶다.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올 때 그 평화를 나누어야 할 사람들은 민족이라는 집합에 그친다면 매우 슬픈 일이다. 평화는 반목보다 비싸지만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다. 다만 민족을 앞세워 가져온 평화를 여기서 엄연히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아이를 낳아 사는 나의 이웃과 함께 나눌 준비가 되어있는가 의문이 남는다.

    평양인지 서울인지 어딘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냉면.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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