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벌의 본질적 성격과 개혁 방안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⑧-1] 재벌개혁의 세 방안
        2018년 06월 07일 10: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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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⑦] 한국 재벌의 후진성과 반역사성

    비정규직 투쟁과 관련한 연재의 마지막 순서로, 한국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로 지적된 재벌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관해 논의한다. 이 주제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할 계획인데, 우선 본 회에선 국내에서 그간 논의된 재벌개혁 방안에 대한 소개와 평가를 진행한다. 다음 호에선 현 문재인 정부 하에서 추진되고 있는 ‘지주회사제도’에 대해 다루며, 끝으로 중국을 모델로 한 ‘공유제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에 대해 검토키로 한다. 우선 국내에서 그간 논의된 재벌개혁 방안에 대해 검토하기로 하자. 이와 관련해선 경제민주화론, 재벌과의 대타협론, 재벌국유화론 세 가지가 있다.

    재벌개혁 요구하는 노동자들 모습(사진=금속노동자)

    1. ‘경제민주화론’과 ‘재벌과의 대타협론’

    (1) 경제민주화론

    먼저 ‘경제민주화론’부터 살펴보자면, 이는 간단히 말해서 재벌해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총수일가가 소수의 지분으로도 재벌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계열사 간 상호출자를 통해서이기 때문에, 출자총액제한 등 재벌규제 정책을 보다 엄격하게 실시하면 이 같은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최근 문재인 정부 하에서 ‘지주회사제도’를 통한 재벌개혁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 역시 이 같은 경제민주화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총수일가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만큼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들은 지금과 같은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경영주가 아니라 평범한 대주주로 전락하고 재벌기업들은 진정으로 주주 전체의 기업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이 소위 경제민주화론이 주장하는 ‘주주 민주주의’에 관한 핵심 내용인데, 현재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고 있는 장하성과 현 공정거래위원장인 김상조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경제민주화론의 주장이 관철된다면 한국의 재벌은 해체되고 소위 ‘주주 민주주주의’가 실현될 수도 있다. 또 그런 상황이 온다면 지금의 상황과 비교할 때 일정 긍정적인 측면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첫째, 이들은 자본주의 기본모순인 생산의 사회화와 자본주의적 점유 간의 대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하면 단지 총수일가의 점유를 재벌기업 주식소유자의 점유로 바꿀 뿐, 현 재벌체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재벌기업이 비록 총수일가의 통제를 벗어나 주주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 같은 주식소유자의 의지는 결코 한국사회 대다수 성원의 의지를 대변할 수 없으며 양자 간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재벌기업에 대한 주식소유자는 한국 전체 국민에 있어 여전히 소수 ‘돈 있는 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주주 민주주의란 것도 따지고 보면 ‘1인 1표’가 아닌 ‘1주 1표’를 뜻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몇몇 대주주가 연합하기만 해도 나머지 소액 주주들은 모두 압도당하게 된다. 결국 이 같은 경제민주화란 총수일가의 점유를 사실상 몇몇 대주주의 점유로 대체할 뿐이며, 사회이익과 소수집단 이익 간의 충돌을 여전히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둘째, 설령 이들이 주장한 방식대로 재벌해체가 이루어진들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는 미국과 서구 사회에서 시장 우선주의에 기초했던 ‘신자유주의’의 병폐가 재현될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체로 서구 사회에선 재벌의 해체와 함께 주식 소유에 있어서의 미시적 분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사회적 부가 소수계층에로 집중되는 현상은 결코 근절되지 않았으며,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이 같은 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위의 경제민주화론자의 방안은 결국 이러한 신자유주의를 한국사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셋째, 이 방안의 치명적인 약점은 한국경제가 IMF 외환위기와 한미FTA 협정을 거치면서 이미 ‘전면개방’ 상태로 들어선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국제 금융자본은 현재 한국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으며, 재벌에 소속된 우량기업과 유수한 시중은행 주식의 절반이 이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단순히 재벌해체만을 목적으로 한 조처를 취한다면 분명 한국경제에 큰 재앙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2) 재벌과의 대타협론

    다음으로 ‘재벌과의 대타협론’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의 주장은 대충 이러하다. 국민이 연기금을 동원하여 현재 상장된 재벌기업들의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외국인의 인수합병 위협으로부터 현 재벌 총수일가의 경영권과 지배주주의 지위를 보호해주는 대신, 재벌은 그 대가로 국내 투자를 늘려 경기를 살리고 고용을 높이는 것으로 보답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공통저자인 장하준, 정승일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재벌과의 대타협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현재의 재벌 계열사 간 상호출자 등은 별반 문제 삼지 않는다. 한마디로 현재의 재벌체제가 비록 얼마간 문제점을 지니고는 있지만, 그래도 재벌을 해체하여 국제 금융자본이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상태가 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해주고 그 대가를 얻자는 것이다. 이들은 이 같은 대타협의 실례로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국가의 노사관계를 거론한다. 그 나라에선 재벌체제를 그대로 두는 대신 재벌은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해주며, 또 노동생산성만큼 인금인상을 실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몫을 챙겨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도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화답함으로써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들은 이 같은 사례를 한국에도 도입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경제민주화론과는 달리 외환위기 이후 국제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높아진 한국경제의 현실을 고려한 점에서, 그리고 현재 이미 진행된 생산 집중화의 기초위에서 나름대로 복지사회(이는 이들이 지향하는 최종적인 목표이다)의 대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들 ‘대타협론’자들의 주장은 일정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현 재벌체제를 사실상 그대로 인정한 채 재벌 행위의 변화만을 요구하는 이 같은 ‘대타협론’은, 얼핏 앞서 방안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다음과 같은 중대한 결함을 갖고 있다.

    첫째, 이들이 사례로든 국가들에서 ‘대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은 우선 정치적으로 ‘민주적 전통’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후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재벌체제가 자율적인 해체의 길을 걸었던 것은 이들 국가들의 민주적 전통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영국·미국 사례) 이들 국가들은 당시 밑으로부터 사회변혁의 강한 압력에 부딪혔을 때, 이들 국가들은 자신들의 민주적 전통으로 인해 통치세력인 재벌(금융자본)들이 직접 국가권력을 움직여 노동계급의 반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국가의 경우도 기본적인 사정은 비슷하다. 이들 국가들에 있어 재벌들이 타협에 응하게 된 것은 마지못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재벌들은 현재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한국에는 6·25 전쟁과 반세기 가까운 냉전체제 및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과정을 거치면서 충분히 폭력성을 간직한 국가권력이 여전히 존재한다. 재벌들은 이 같은 권력의 비호 하에 그간 특별히 육성되어 왔으며, 일단 재벌체제를 성립한 후에는 스스로 이 권력을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또 한국의 재벌들은 국내시장을 희생한 대가로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획득하는 축적방식에도 오랜 기간 익숙해 왔다. 이러한 익숙한 축적방식을 버리고 낯선 방식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선 별반 내키지 않는 일일 수밖에 없다. 특히 지구화와 개방화가 이루어진 조건에서 이전보다 치열한 국제경쟁에 더욱 시달릴 수밖에 없는 재벌들로선 그 같은 선택은 매우 모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국가권력을 이용해 일부 예상되는 노동자들의 반항을 힘으로 진압해 가면서 기존의 축적방식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용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그간의 한국사회 노자관계를 통해 주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바이며, 한국 재벌들의 뿌리 깊은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둘째, ‘대타협론’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또 한 가지는 한국의 재벌들은 이미 상당부분 국제독점자본화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 ‘대타협론’자들은 자주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신자유주의는 주로 국제금융(업)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책이라고만 생각하며, 국내 재벌들은 이에 맞설 수 있는 ‘산업자본’의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내 재벌은 그 피해자가 아니라 스스로가 신자유주의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대타협론’자들이 자신의 논적인 경제민주화론을 비판하면서 지적하는 주주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은, 사실은 국내 재벌 또한 이미 국제독점자본으로 변신한 사실을 보여주는 반증인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주주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단기적인 이윤 추구 성향은 사실상 국내 재벌의 국제독점자본적 성격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국제독점자본이 세계시장에서 격심한 경쟁에 처해 있는 보편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단지 ‘주주자본주의'(이들은 이를 ‘금융자본주의’와 동일시한다) 때문에 생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본 작가 미쓰하시 다카야키는 그의 저서 <부자삼성, 가난한 한국>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수많은 경쟁자와 추격자에 둘러싸인 삼성전자 등 한국 글로벌기업들은 조금도 숨 돌릴 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국민의 인건비를 올리고 고용을 늘리고 협력업체와 동반성장을 추구하는 등 한가한 쪽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는 또한 한국 대기업 한 간부의 다음과 같은 불평도 전한다. “우리는 날마다 숨 막히는 경쟁에 쫒기고 있다. 이익이 나왔다고 해서 비난받고 국내 고용과 거래처인 국내 중소기업의 이익을 늘리라고 주문받아도 대처할 여유가 없다. “(위의 책 p109, p131)

    사실 국제 금융자본이 국내 재벌기업들의 주요 주주로 등장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국내 독점재벌의 일정한 성격변화를 보여 준다. 국제독점자본은 이를 통해 한국 기업소유구조 상에 있어서 자신을 실현한다. 즉 이는 국제독점자본이 금융업자본 형태로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면서 손쉽게 다른 국가의 산업자본으로 전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국내 재벌의 지배주주(총수일가) 역시 마찬가지로 이중적 신분을 갖는다. 그들은 국내 재벌기업의 점유자이면서 동시에 또한 국제독점자본가 대열의 일원이 된다. 이들은 삼성에 투자한 국제 금융자본과 함께 삼성의 이윤분배를 통해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면서, 또 금융자유화를 통해 그 자신 언제든지 국제금융자본으로 전화할 수 있으며 다른 나라의 금융 및 산업자본의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신분적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독점자본에 있어 ‘국민국가’가 갖는 의미는, 한편에선 자기가 소속한 국가 이익에 복속해 그들의 전 지구적 이윤추구 욕구를 자제시킬 만큼 충분한 의의를 갖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선 그렇다고 해서 전 지구적 차원의 국제독점자본가계급의 성립을 낙관하여 이제 국민국가라는 보호 장치가 전혀 필요 없을 정도의 미미한 것도 아니다. 그 중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셋째, 다음의 사항은 보다 본질적인데, 이제 국내 재벌기업은 ‘시장’뿐만 아니라 ‘생산’ 측면에서도 국제화하였다는 사실이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지구화시대에는 재벌들이 국내적 자원만을 활용하려 하지 않으며,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유롭게 생산 활동을 하고 시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기왕의 ‘일국적 제한조건’에 갇혀있지 않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여전히 일국적 사정만을 염두에 둔 채 제시하는 ‘대타협론’은 재벌들에게 있어선 그다지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현재 한국의 상위 재벌에게 있어 국내시장과 국내생산은 그들의 전체 경영활동 중의 일부분만을 차지할 뿐이다. 이는 다른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는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연구개발(R&D)과 같은 기업 활동의 상류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상위 재벌의 기업들은 해외의 우수인력을 적극적으로 영입하여 글로벌 R&D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2012년 말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 이스라엘, 폴란드 등 13개국에 18개의 연구소를 설치하여 1만 2000여 명의 해외 연구원을 확보하고 있다.

    ‘대타협론’자들이 제시하는 복지국가를 건립하고 노동생산성 향상에 기초한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모두 상생하는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의 산업구조를 한 단계 끌어올려야만 한다. 그런데 이처럼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려면 우선 그 나라의 자원(생산요소) 구조를 먼저 바꾸어야 한다. 즉 그간 값싼 노동력 위주의 경제에서 새로운 ‘창조경제’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동안 축적해둔 풍부한 자본과 함께 특히 ‘창조적 인적자원’을 많이 갖추지 않으면 안 되며, 이를 위해선 또한 대규모의 교육투자, 인간적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높일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제도의 구축, 환경 등에의 지속적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경우 전 세계가 만약 과거 1950~60년대처럼 케인스주의 사조가 주도하던 복지국가시대였다고 한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지구화와 개방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자본은 우선 ‘국내에서’ 이 같은 인적자원의 양성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독점화한 자본에 있어선, 우선 일국 내 자원구조에 구속되지 않고 지구적 차원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극심한 세계시장 경쟁과 국제금융자본 혹은 소위 ‘주주자본주의’의 단기적 이윤추구 압력 때문에, 이 같은 장기적인 ‘사회 인프라투자’에 전념할 의욕도 능력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과 같은 대외 의존적 경제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이 때문에 과거 서구 국가독점자본주의 전성기에 자원의 일국적 이용이라는 제약 속에서 사회적 투자와 ‘대타협’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도출될 수 있었던 상황과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자본은 이 같은 장기적 ‘육성’ 정책에 의존하기 보다는 각국의 자원구조의 현재적 차이를 활용한 이미 ‘육성된’ 자원의 즉각적 활용을 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며,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지구화는 이를 위한 일정한 조건을 창출한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볼 때도 신자유주의는 각국 자원에 대한 ‘약탈적’이고 ‘단기안목’의 성격이 강하며, 각국의 비교우위를 영속화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어떻든 삼성이나 현대 혹은 LG와 같이 이미 국제독점자본화한 국내 상위 재벌들은 마음만 먹으면 세계 곳곳에 연구기관을 설립함으로써 국내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각국의 인재와 기술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소위 글로벌경영의 기치를 높게 치켜든 이들에게 굳이 백년대계를 내다보아야 하는 ‘국민교육’을 운운한다는 것은 사실 거추장스럽고 사치스럽게 들릴 뿐이다.

    이상을 종합하자면 재벌과의 ‘대타협’은 허구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미 ‘통치 권력화’에 성공하고 국제독점자본으로 성장 전화한 국내 재벌을 이러한 ‘대타협’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재벌개조의 기초를 허상위에 세우는 것과 같다.

    2. ‘재벌 국유화론’

    이제 마지막으로 ‘재벌 국유화론’을 검토할 차례다. ‘재벌 국유화론’은 과거 민주노동당이 훗날 통합진보당으로 바뀌기 전까지 당 강령으로 정식 채택하였던 방안이다. 그것의 유래를 따지자면 1980년대 민주변혁운동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 시기에 다시 재벌 국유화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고 또 이 방안이 재벌문제의 유력한 해결책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재벌 국유화는 재벌문제가 안고 있는 사회이익과 총수일가 이익의 근본적 대립을 가장 철저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는 점에서이다. 앞서의 방안들은 모두 소수 재벌 총수일가가 재벌자산의 점유를 통해 한국경제 전반에 대한 통제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선 모두 불철저한 태도를 취하였다. 예컨대 ‘경제민주화론’은 총수일가의 점유를 마찬가지로 사회적 소수집단에 불과한 주식소유자들의 점유로 바꾸려고 하였으며, ‘재벌과의 대타협론’은 아예 그것마저 포기한 채 현 재벌체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단지 재벌의 행태만을 바꾸려 하였다. 이들은 ‘재벌 국유화’ 방안처럼 재벌기업을 사회의 직접적 통제 하에 놓는 문제에 대해선 감히 생각조차 못한다. 그러나 이 방법만이 그간의 재벌 문제의 핵심인 사회 절대다수의 이익과 소수 점유집단 이익의 대립을 가장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다. 현재 재벌이 점유하고 있는 막대한 사회적 생산력은 전체 공동체의 자산으로 환원됨을 통해, 사회적 생산력이라는 그 본래의 취지에 맞게끔 이제부터는 소수 재벌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사회성원의 복지를 위해 이용되어야만 한다.

    재벌 문제에 대한 유력한 해결방안이 국유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같은 당위적 차원 외에도 이하의 현실적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은 그간 재벌개혁의 경험과 그로부터의 교훈과 관련되는데, 그간 한국에 있어 재벌개혁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재벌 문제는 그 성격에 있어 본질적으로 정치문제이며, 이 때문에 재벌개혁을 이루기 위해선 그 선행조건으로 정치개혁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재벌 국유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1980년대 전반에 재벌체제가 정식 성립된 이래 한국의 역대 정권은 나름대로 수차례 재벌개혁을 시도해 왔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은 反독과점법 정비와 주력기업선정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도 업종전문화를 중심으로 한 재벌정책을 추진하였다. 외환위기 시기에 김대중 정권은 재벌기업 간 상호채무보증을 해소하고 총수책임경영을 통한 독립경영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이후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역대 정권 중 가장 강력한 재벌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후 결과가 보여주듯 이들 정부들이 추진했던 재벌개혁은 모두 실패하였다. 왜 이처럼 역대 정권의 재벌개혁 정책이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 원인을 따지다 보면 결국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재벌의 ‘선단식 경영’이 대외 예속적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자본축적방식에 있어 나름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한국경제에 있어 재벌들은 그것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으며, 애초 자본과 기술이 선진국에 비해 열악한 상황에서 재벌의 선단식 경영은 계열사를 동원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자원을 집중하는데 일정 유리하였다. 또 한국경제가 초보적인 산업화를 완성한 후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에 진출하는데 있어서도 기여하였으며,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위험을 분산시켜주는 역할도 하였다. 재벌체제는 이렇듯 그 폐단과 함께 나름의 긍정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간 한국사회에 있어 일정한 대중적 설득력과 ‘합법성’ 누려왔다고 할 수 있다.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매번 자신들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때마다 재벌들은 국제경쟁력 저하를 들먹이며 그것을 우려하는 사회여론을 조성함으로써 방패막이로 삼아 왔다. 그와 같은 책략이 번번이 먹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실제 객관적으로 그 같은 사회적 조건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위에 열거한 재벌체제의 일정한 합리성은, 바꾸어 보면 한국경제가 대외예속적인 경제성장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며, 또 그 조건 속에서만 유효하였다. 때문에 재벌개혁을 이루기 위해선 먼저 이 같은 대외예속적인 축적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외예속적인 축적체제를 개조하기 위해선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현실에선 다시 그 체제를 떠받치는 재벌에 손 댈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재벌은 그 같은 예속적 축적운동을 담당하는 실체이며, 재벌을 떠나서는 이 같은 한국경제의 근본적 개조를 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시 재벌개혁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처럼 그간의 재벌개혁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만을 되풀이 해왔다. 이처럼 순환논리의 늪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애초 재벌문제를 ‘대외예속적 축적체제’의 여러 요소가 얽힌 ‘정치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경제문제’적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그 차원에서 개혁을 수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위의 역대 정권들이 채택한 주력기업 선정이나 업종전문화 내지는 순환출자를 막기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은 모두 그 같은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정부는 이 같은 정책 및 일련의 관련 법률 제정, 그리고 여신관리제도(1997년에 폐지됨) 등의 수단을 빌려 재벌의 변신을 유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선진국과 같은 기업 전문화의 달성과 오너(대주주) 책임경영제의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있어 재벌문제는 이미 순수한 경제영역을 벗어난다. 재벌들은 지난 호에서 본 것처럼 1980년대 후반 이후 진정한 금융자본으로의 변신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특히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재벌과두체제’를 성립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조건 하에서 정부의 재벌 관련한 정책들은 그 실행에 들어가자마자 곧 ‘재벌과두체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고 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거대한 장벽으로 등장한 ‘재벌과두체제’는 바로 대외 예속적 축적체제 하에서 그간 재벌 진화의 필연적 산물이다. 그것의 작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벌의 제2금융권 장악과 또 금융개방을 통한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자금 조달능력의 획득은, 정부의 가장 강력한 재벌규제수단이었던 여신관리제도의 효력을 상실케 만들었다. 이로써 형식적 법률과 행정 조치 외에는 정부에 있어 마땅한 경제적 통제수단이 없게 되었다.

    둘째, 소수 상위 재벌에 경제력이 집중된 결과 정부의 재벌 상호 간의 경쟁을 매개로한 재벌통제가 어렵게 되었다. 반대로 이들 소수 재벌을 중심으로 담합이 용이해짐에 따라, 재벌들은 국민경제를 담보로 하여 정부 개혁정책에 강력히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정부의 재벌규제가 심해지면 이들은 의도적으로 투자를 줄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경제 불황을 더욱 부추기면서 그 책임을 정부 탓으로 돌린다.

    셋째, 소수 재벌은 거대한 비자금 동원력을 갖추고 정치·관료·사법·언론계 등 자신의 이해와 관련된 분야의 인사들을 광범위하게 매수하고, 사회언론을 조작하며, ‘회전문인사’를 통해 정부의 재벌정책을 내부로부터 직접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현대제국주의 요소 즉 주식시장을 통한 국제금융자본의 한국 기업에 대한 소유와 경영권에 대한 위협은, ‘출자총액제한’처럼 재벌의 순환출자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제도의 엄격한 실시를 저지시키는 좋은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렇듯 자신의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권력에 대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기업 전문화와 책임경영 실현을 바라는 것과 같은 자본주의의 정상적 개혁조차 거부하는 현 재벌체제에 대해선 이제 순수한 경제적 논리가 통할 여지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 같은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한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 여기서 곧바로 ‘재벌 국유화’라는 결론을 끌어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출자총액제한’과 같은 조치는 만약 그것이 엄격히 실행되기만 한다면 여전히 재벌의 순환출자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제도적’ 방안으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대신 국가가 좀 더 과감하게 재벌에 대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 이 경우 문제는 다름 아닌 국가권력 자체에서 발생한다. ‘재벌과두체제’의 성립이 의미하는 바는 재벌이 이미 국가권력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방패막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재벌개혁의 선행조건으로서 ‘국가권력의 민주적 개조’가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즉 재벌개혁의 첫 수순은 현재 이들에 볼모로 잡혀있는 국가권력에 대한 민주적 개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재벌 국유화’ 방안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된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 통로를 통해 이미 국가권력을 통제하고 있는 재벌들은 필연적으로 이 권력을 사용하여 대항하려 할 것이다. 反재벌세력은 이 같은 저항을 분쇄하여야만 재벌개혁을 완수할 수 있다. 결국 국가권력의 통제를 둘러싼 재벌과 反재벌세력 간의 치열한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다. 여기서 反재벌세력의 최종 승리는 단순한 선거를 통한 집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국가권력에 대한 철저한 민주적 개조를 통해 그것을 사회 다수의지의 직접적 통제 하에 놓음으로써만 비로소 그 임무는 달성된다. 과거 노무현 정권이 행정부를 장악하고 나중에는 국회에서 다수의석까지 획득한 상황에서도, 집권기간 내내 개혁에 저항하는 관료들의 복지부동과 검찰의 항명파동에 시달려 제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선례가 있다. 이 같은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약 이들 ‘국가권력의 실체’들을 그대로 둔 채 선거를 통해 형식뿐인 정권을 얻는 것만으로는 재벌개혁은 완수될 수 없다. 이들 관료와 검찰 뒤에는 앞서 ‘삼성공화국’에서 보았듯이 재벌의 손길이 이미 거미줄처럼 뻗쳐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삼성공화국의 위력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있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를 계기로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설립되었던 ‘삼성특검’이 그것이다. 특검은 우여곡절 끝에 4조 5000억 원 이상의 삼성 비자금을 밝혀내고 이를 공표했지만, 그러나 이런 거액 비자금에 대해 비리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이 특검을 이끈 조준웅은 삼성 비리가 ‘기업의 구조적이고 내재적인 관행’이기 때문에 수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과거 군사독재 하에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주장과 같은 논리였다. 한국의 사법정의는 한때 민주화투쟁 덕택으로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성공한 재벌’의 경제범죄는 처벌하지 못하고 멈춰서고 말았다.

    특검의 진행과 이후 삼성비리 재판과정을 보면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체제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강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당시 비자금 운용의 핵심 통로였던 삼성증권은 김용철 씨 폭로(2007년 10월 29일)가 있은 후, 2007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고객 증권 계좌 신청서 43만 개를 폐기했다. 그러나 당시 금감원은 삼성증권에 대한 검사를 별다른 이유 없이 미루다가 해를 넘겨서야 검사에 착수해서 삼성증권에 증거인멸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국세청은 또 어떠하였던가? 국세청은 재벌 계열사에 대한 지분 이동 조사를 가끔씩 하기 때문에 국세청 조사국에는 삼성 계열사의 실질 지분 이동자료가 모두 다 있다. 이런 자료만 잘 분석해도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빚어진 불법 행위를 쉽게 찾아 낼 수 있음에도, 국세청은 이런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세청은 재벌의 탈세 혐의를 파헤치기는커녕 특검의 자료 협조 요청을 번번이 거절하는 등 삼성 비리에 대한 수사를 가로막았다.

    이 밖에 3심까지 재판을 맡은 법관들은 모두 이건희·이재용 부자에게 한결같이 유리한 판결을 내려서 이들의 불법상속을 최종적으로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어 경영권을 보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재벌 비리를 파헤치고 정계와 사법부의 이런 광범위한 불법유착을 고발해야 할 언론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책임에 눈 감았다. 오히려 폭로자인 김용철 씨에 대해 ‘내부고발자’ 운운하며 독자들에게 ‘배신자’라는 인상을 주는 등으로 초점을 재벌비리로부터 지엽적인 것으로 옮기는데 더욱 열중했다. 심지어는 김용철씨를 도와 삼성비리를 용감하게 폭로했던 천주교 사제들도 천주교 본부에 의해 지방 교구로 옮겨지는 등 일종의 징벌성 처벌을 받았다.

    이렇듯 한국사회의 보이지 않는 강력한 벽에 부딪친 김용철 씨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 주류의 질서가 정말 튼튼하구나’하고 느꼈다고 말했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들이 보이지 않는 그물망으로 단단하게 묶여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그물을 쥐고 있는 것은 재벌이다. 이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질서는 너무 안정적이어서, 바깥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바뀌지 않는다.“ (이상은 <삼성을 생각한다>를 참조함. 인용문의 고딕체 강조는 필자가 하였다.)

    이상과 같은 한국사회 내에 강고한 친 재벌세력을 감안할 때, 선거 승리는 反재벌세력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아직 작은 승리에 불과하며, 최종적으로는 재벌체제에 포섭된 현 국가권력에 대한 민주적 개조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관료와 검찰을 비롯한 권력의 실체들이 진정으로 사회 다수의지에 복종토록 만드는 과제가 아직 남아 있다. 이리하여 이 같은 목표가 마침내 이루어졌을 때는 막상 재벌과의 타협은 별반 의미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간 자신들의 반항 때문에 재벌은 이미 스스로의 입지를 상당 부분 축소시켜 상호간의 타협이 요구하는 도덕적 자격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반항이 격렬할수록 더욱 그러하며, 지금까지 역대 정권의 재벌개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재벌들이 그렇게 나올 가능성은 다분하다. 이렇듯 한국의 재벌개혁은 ‘국유화’라고 하는 사회 다수의지의 가장 직접적 관철 방안만이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재벌 국유화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 수단에 대해 잠깐 언급하도록 하자. 그것은 ‘연기금’의 사용과 관련이 있다.

    사실 연기금은 현재도 주요 재벌기업의 최대주주인 경우가 많다. 아래 표2를 보면, 연기금은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3.38%)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5.17%)보다 훨씬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엄격한 순환고리 차단으로 쏟아져 나올 주식을 보태게 된다면, 연기금은 명실상부한 최대주주로서의 자격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연기금을 통한 방식은 2008년 금융위기 때 미국 정부가 연방준비위원회의 돈을 풀어 부실 금융기관과 GM자동차 등을 국유화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운 방식에 속한다. 이렇듯 연기금은 원래 현대 자본주의국가의 복지제도와 관련하여 탄생하였지만,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합법적인 방식으로 지양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참고로 세계 각국의 연기금 관련 사항을 보자면, 2006년 기준 OECD 국가들의 전체 연금자산 규모가 전체 자본시장(주식시장+채권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27% 수준이다.(<외환위기 10년, 한국금융의 변화와 전망>,p136.) 국가별로 볼 때 이 비중이 큰 나라로는 네덜란드(55.4%), 핀란드(40.1%), 스위스(37.3%)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은 2007년 국민연금기금의 운용자산 규모가 200조원을 돌파하였는데, 2015년에는 약 570조원으로 GDP 대비 40%에 이르렀고, 이 같은 증가세는 2043년까지 계속되어 그 때 기금 규모는 2607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경우, 2016년 6월 기준 상장주식 전체 시가총액(코스피)은 1250조원인데(KOSIS통계), 연기금의 2016년 9월 현재 한국 국내주식에 대한 전체 투자규모가 100조 원이므로 혼자서 8%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또 채권시장 규모는 2016년 6월 기준 1545조 원인데, 연기금의 국내채권 투자규모는 2016년 9월 현재 256.1조 원으로 16.6%를 차지하고 있다.

    연기금을 활용한 국유화 방안에 있어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현행 법규가 연기금이 소유주가 되거나 경영권을 갖는 것을 금지하면서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제한 규정은 연기금을 현 재벌체제를 떠받치는 단순한 보조자로 전락시키게끔 만든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기획의 통합에서 보여준 연기금의 납득할 수 없는 태도는 현행 규정의 문제점을 잘 말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 연기금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재벌체제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든지, 아니면 직접 재벌대기업에 대한 소유자로 나섬으로써 재벌개혁의 획기적인 돌파구를 열어주든가 이다. 만약 앞서 언급한 국가권력에 대한 민주적개조가 이루어진 조건에서라면 다수 대중은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당연히 높다.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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