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격과 절망의 체험,
    트럼프 시대 ‘히어로 무비’
    [영화 이야기]어벤져스 : 인피니티워
        2018년 06월 05일 06:0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이다. 

    ‘어벤져스 : 인피니티워’를 아직 안 보신 분들 계신가요? 아마도 지금쯤이면 보실만한 분들은 다들 보셨을 테고 아직 안 보신 분들은 IPTV에 풀릴 때쯤에나 보실 생각이실 것 같아 스포일러 경고를 앞에 붙이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얘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사실 이 한 편의 영화를 단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죠. 아시는 것처럼 인피니티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라는 이제는 현대 고전의 반열에 든 것 같은 이 거대한 세계관에 종속된 작품이고 그중에서도 3번째 phase(뭐라고 번역하면 좋을까요? 3번째 장?)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영화입니다.

    MCU는 2008년 존 패브로 감독의 아이언맨으로 시작해 20여 편의 영화와 훨씬 더 많은 TV 시리즈로 세계관의 폭을 넓혀나가고 있죠. 이 수많은 창작물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장관을 동시대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감동이 있습니다.

    마블의 최신작인 인피니티워는 애초 인피니티워 파트1, 파트2로 나뉘어 개봉될 것이라는 계획을 수정하여 2019년 개봉 예정인 어벤져스 4(제목 미정)와는 별개의 작품으로 단독 개봉했습니다. 그런데 인피니티워는 지금까지 20편 가까이 만들어진 MCU 기반의 영화들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기존의 영화들은 스토리 안에서 아무리 주인공들이 고난에 빠지거나 갈등을 빚는다고 해도 결국은 영웅들이 그 난관을 헤쳐나감으로써 관객들에게 해방감을 주는 영웅서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히어로 영화들의 정점에 서 있다 할 수 있는 인피니티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수많은 영웅이 이합집산하며 악당 타노스를 쓰러뜨릴 방법을 강구하지만 결국에 타노스는 자신이 원했던바 전 우주의 절반을 손가락질 한 번으로 사라지게 만들고 끝이 납니다. 영웅들이라고 별 수 없습니다.

    기계적 평등에 바탕을 둔 맬서스주의자인 타노스는 앞날이 창창한 영웅들도 가차 없이 소멸시켜버리고 과업을 마친 악당의 허허로운 표정으로 영화가 끝나버립니다. 이 거대한 실패의 서사에서 마블과 디즈니의 창작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물론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화적 쾌락도 역치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MCU의 최종 책임자인 케빈 파이기는 결국 조금 더 많은, 조금 더 깊은 충격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다 그 에스컬레이팅 끝에 악당이 영웅의 위치를 대신하는 영화를 만들어버린 것이라는 답 말이죠. 그도 그럴 것이 마블의 영화들은 언제나 새롭거나 새로운 척하면서 나왔습니다.

    점점 더 큰 스케일을 보여주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 보였던 MCU에 앤트맨이라는 영웅을 등장시켜 미시세계의 영웅 액션을 보여주는가 하면, 파괴하고, 파괴하고, 더 박살을 내는 액션의 최대치에서 닥터스트레인지를 등장시키면서 파괴되고 부서졌던 사물이 다시 원상으로 복원되는 액션으로 관객들의 뒤통수를 쳐 왔었죠.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적인 영웅 서사에 관객이 지쳐갈 때쯤이면 청춘물, 첩보물, 코메디까지 장르를 이종교배하면서 슈퍼 히어로물의 생명력을 지속해 나가고 있죠.

    그래서 인피니티워의 제목이 종전처럼 인피니티워 ‘파트1’ 이었다면 이 영화는 앞으로 나올 어벤져스 4에 해당하는 파트2 의 전반부이기 때문에 서사의 흐름으로는 현재 상황도 결국은 영웅들이 어떤 식으로든 돌파하겠거니 하고 관객들은 안심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마블과 디즈니는 이 영화를 그런 방식이 아닌 단독의 작품으로 이해하길 원한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두 편으로 나뉜 영화의 전반부가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제목도 수정한 것이겠죠. 결국 이 영화는 다음에 나올 해피엔딩을 위한 잠시간의 실패가 아닌 ‘완결된 실패’로서의 배드엔딩 영화인 것입니다.

    트럼프 시대의 공포와 당혹감이 새겨진 영화들

    잠깐 딴 길로 새 보겠습니다. 최근 헐리우드 영화들을 보면 공통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근래에 본 세 편의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 같은 주제의식으로 보이기도 해서 신기하기도 했었죠. 제가 본 세 편의 영화는 기예르모 델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픽사의 <코코>, 스필버그의 <포스트>입니다. 딱 보기에는 크게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작품들이지만 각각의 소제를 다루는 창작자의 자세랄까 하는 것에서 느슨한 공감이 느껴졌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셰이프 오브 워터>는 장애인, 여성, 성 소수자, 흑인, 공산주의자, 비 인류가 힘을 모아 백인-성인-남성과 투쟁하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아름다운 사랑 얘기이지만 소수자들의 연대 모티브가 빠지면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죠.

    <코코>는 어떤가요? 헐리웃이 일찌감치 마약의 수입 루트로, 갱들의 근거지로, 열등한 사회체계의 저등 국가로 타자화했던 남미와 남미의 문화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더할 수 없이 아름답게 그려낸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멕시코 접경에 장벽을 쌓겠다는 현 미국 대통령의 공약이 생각나죠.

    마지막으로 <포스트>는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보 은폐에 대한 보도를 위해 국가의 실체적 위협을 버텨낸 한 명의 여성 언론인과 주위 조력자들의 이야기죠. 국가가 민중의 편이 아닐 때 언론은 어떤 프로세스로 국가를 정상으로 돌려놓는가, 또는 돌려놓아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이 세 편의 영화가 담고 있는 어떤 자세는 이른바 트럼프 시대의 공포가 만들어 낸 영화 창작자들의 도덕적 채무감 같은 것들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기 생각 가진 창작자들은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믿기 힘든 결과 앞에 어떤 식으로든 미국 사회를 돌아보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만합니다.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의 욕망을 들춰보는 거울입니다.

    최근 헐리웃의 주류영화들의 명백한 흐름은 자신들이 믿어왔던 ‘성숙한 리더 국가’라는 미국의 자기 이미지를 산산이 부숴버린 트럼프 당선의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간 상흔 같은 것입니다. 수많은 영웅들의 노력과 협업으로 타노스의 가슴에 토르의 스톰브레이커가 작렬했을 때 미국의 관객들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 안도감은 잠시 후의 핑거스냅으로 우주의 절반이 사라지는 거대한 충격을 증폭시키는 장치였을 뿐이죠. 미국 유권자들의 손으로 직접 트럼프라는 괴물을 당선시킨 그 장난 같은 순간에 미국의 지식인들이 느꼈을 충격을 영화적으로 소환하고 10년의 MCU 역사에서 유일하게 음울한 엔딩크레딧 비지엠이 흐릅니다.

    북미회담을 목전에 두고 예측할 수 없는 종횡의 행보를 보여주는 트럼프의 모습에서 바다 건너 어떤 나라에서는 평화와 통일로 가는 희망을 보고 있어서 참 아이러니하긴 합니다만, 일견 어이없는 이 영화의 결말과 반전은 미국 지식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오만한 인식을 돌아보게 만드는 등짝 스매싱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웅들이 생사고락 끝에 결국 실패하고 악당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스러진 후 결국 자신들을 포함한 전 우주의 절반이 끝장나는 스토리가 이후에 반전을 통한 복수와 수복을 상정하지 않고 끝난 것은 그런 절망감의 체험을 의도한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영화 이후에 두 편의 새로운 영화가 있고 그 후 결국 최종 장의 어떤 반전을 통해 어벤져스 4편이 영웅들의 실패를 수복하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피니티워의 끝에서 어린 스파이더맨이 아이언맨의 손안에서 사라져 갈 때의 그 절망감이 쉽게 잊히진 않을 것 같습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