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마당 반란에 사실상 속수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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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24일 10: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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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향력 있는 학술지 중에 하나인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 1/2월 호의 표지를 장식한 논문의 제목은 “미국은 남미를 잃었는가”이다. 이 논문 필자의 주장은 물론 보수적 논지의 학술지답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만, 학계와 정계에 영향력이 상당한 이 잡지의 도발적 제목 자체가 미국의 남미 정책에 대한 미국 사회 내의 인식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영국 BBC의 인터넷판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어떻게 미국이 남미를 잃었는가”라는 이름의 분석 기사를 남미 특집 섹션에 내보냈다. 최근 몇 년간 남미에서 미국과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비판적인 좌파 정권들이 지속적으로 들어서는 현상에 대해서는 국내 언론에서도 모두 주목하고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중남미 곳곳이 지뢰밭

물론 미국 정부 역시 이러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남미는 거의 친미 일색이었으나, 이제는 미국의 대외전략에 적지 않은 차질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침략만 하더라도 전통적 친미 국가인 칠레의 라고스 정부는 당시 UN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반대했었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이끄는 메르꼬수르(남미공동시장)는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미주자유무역협정(FTAA)에 지금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아르헨티나의 마르 델 쁠라따에서 개최된 미주정상회담이, 회의장 밖에서는 시민, 사회, 민중운동 단체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회의장 안에서는 적지 않은 수의 남미 국가들이 미국의 미주자유무역협정 추진에 제동을 걸면서 향후 일정에 대한 합의조차 없이 끝났다. 하락하는 국내 지지도를 외교적 성과로 극복하려 했던 부시 행정부로서는 상당한 정치적 타격이었다.

WTO 각료회의와 같은 다자협상의 장에서도 브라질이 다른 국가들과 함께 미국의 대규모 농업 보조금을 문제삼고 있어 협상이 몇 해째 난항을 겪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자국 군부와 미국의 군사교육기관 사이의 협력관계를 폐지하기도 했다.

이렇듯,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지역 곳곳에서 들어서고 있는 좌파 정부들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어떻게 바뀌고 있을까? 아니, 바뀌고 있기는 할까?

우선 순위에서 대테러전에 밀려

우선 남미 전략이나 기조의 전환이 이루어지기에는 현재 미국의 대외전략 기조 일반이 제약을 가하고 있다. 취임 직후 부시 행정부는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가 자국의 대외전략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얘기를 했지만,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이에 적극 나서면서 남미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고 이란과 북한의 핵 문제로 인해서 장기간 외교전이 진행되면서 남미를 상대적으로 등한시하게 된 것이다. 정책적 우선순위를 대테러라는 프리즘을 기준으로 선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줄줄이 좌파 정권들이 남미에서 들어서는 것에 대해 각계에서 나온 우려의 메시지가 행정부의 전략상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중남미 담당 강경보수파 일색

물론 그렇다고 이 사이에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시 행정부 하에서 국무부의 서반구 담당 차관보(북미와 남미 정책을 담당한다)는 3번이나 바뀌었다. 1기 부시 행정부에서 첫 남미 담당자였던 오토 라이히(Otto Reich)는 베네수엘라의 반차베스 쿠데타 직후 민주적 정권의 복원을 환영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미국에게 외교적 수치를 안겨준 인물이었다. 그는 반카스트로 진영의 쿠바인 출신으로서, 쿠바 민주화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국무부의 대표적 우익 강경파였다. 이후 그는 하위 직급의 보직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후임인 로저 노리에가(Roger Noriega)도 역시 강경 보수파로 분류되는 인물로서 재임 기간 그의 공격적 발언들로 인해서 차베스, 모랄레스 등과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노리에가는 작년 말, 2년 만에 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직업외교관 출신인 토마스 쉐넌(Thomas Shannon)이 그 직무를 맡게 되었지만, 기조나 전략에 아직 변화가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미 국무부의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이나 캐런 휴우즈(Karen Hughes) 차관과 같은 고위 간부들이 관계 개선을 위한 남미 순방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미국의 정책과 메시지가 명확하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것 같다는 문제의식에서이다. 즉, 미국 정부에서는 남미의 좌파 바람에 대한 가시적 대응의 골자는 아직까지 홍보 강화, 혹은 소통의 활성화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소통부재’ 안일한 판단

그러나 현재 남미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좌파 정치 세력의 약진이 소통이나 전달의 문제라는 판단은 미국의 대외정책, 그리고 미국이 전파하는 경제모델 자체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너무나도 안일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재 남미에서의 “좌파 도미노”는 지역에서 미국이 헤게모니를 상실해가고 있는 거대한 흐름의 반영이지, 어떤 오해나 정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미국의 소극적 대처의 한계가 명확한 것이다.

이런 한계를 반영하듯, 남미에서는 미국에 비판적인 세력의 등장이 멈추질 않고 있다. 페루의 최근 대선에서 좌파 민족주의자인 오얀테 우말라가 대선 1차 투표에서 1위를 했고, 멕시코, 나카라과에서도 좌파 정치인들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차베스의 재선도 확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앞으로도 이런 자세로 일관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계와 가까운 학계 인사들의 분석을 보면 미국은 남미의 좌파 정권들에 대해 선별 대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임 있는 좌파’와 ‘포퓰리스트 좌파’

브라질의 룰라, 칠레의 바체예와 같은 “책임 있는 중도 좌파”들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등의 “인민주의(populist)적 좌파 정권들”을 분류해서 전자에 대해서는 우호적 협력관계를 도모하는 한편, 후자에 대해서는 경계를 하며 적극적 대응책을 주문하고 있다.

일례로 작년부터 미국 국무부는 차베스 정권에 대해 “지역 안정에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베네수엘라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들을 마련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베네수엘라가 콜롬비아의 무장 게릴라 집단이나 타국의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혐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미 군부의 안보 라인에서도 최근 베네수엘라의 군사비 증강이 불안정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처가 시급하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물론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 중 가장 많은 양을 수입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원유 공급이 흔들리는 것이 가장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부분이다.

미국의 딜레마

안정적인 석유 공급이 흔들리거나, 차베스가 공언했던 핵개발을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이 드러난다면, 혹은 볼리비아의 가스 산업 국유화로 미국 기업들이 이해가 보장받지 못한다면 미국은 대응의 수위를 높일 것이다. 1973년 아옌데 정부의 전복에서부터 2002년 차베스에 대한 쿠데타 지지까지, 미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대응이 어느 수준까지 갈 수 있는지를 여러 차례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남미에서 이어지는 좌파 정권들의 등장은 미국이 섣불리 행동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모든 정부들이 민주적으로 당선되었다는 정당성과 더불어, 만약에 현재와 같은 남미의 정치 지형에서 부당하게 개입할 경우 그것이 지닐 지역적 파급력 때문이다.

좌파 정부가 늘어나면 날수록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타격을 받지만, 이미 상당히 왼쪽으로 이동한 대륙에 적극적 대응을 했을 경우 그 역효과와 치러야 할 비용 역시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미국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미국이 처한 딜레마고, 남미와의 미래 관계에서 핵심 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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