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테이아의 총구
[노동·문예 노트] 시와 시적인 것의 동시대성에 대한 비평적 전망
    2018년 05월 24일 11:13 오전

Print Friendly

이 글은 『시와 반시』 104호, 2018년 여름호에 발표되는 글이다. 필자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

포에지의 통념 부수기

시는 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다. 근대적인 대중독자를 열광시킨 문학장르는, 허구와 현실의 역리 관계 속에서 서사적 흥미소와 이념성을 발명한 ‘소설’이라는 재현 양식이(었)지만, 문학의 급진적 언어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여전히 ‘시’라는 표현 양식이다.

동서양 시학의 사례를 열거할 것도 없이―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이나 아리스토텔리스의 ‘시학’, 혹은 동양의 「시경」 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문학의 언어적 정수는 시이다.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지렛대로 삼는 산문과 달리, 시는 언어에 대한 탐구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시는 모국어를 통해 구현되는 언어예술의 정수인 까닭에, 다른 문학 장르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시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는 특정한 문예 스타일에 대한 편파적 선호가 아니라, 시가 지향하거나 추구하는 새로운 언어 경험의 창조성과 변혁성을 재확인하는 말이다.

시는 사물과 언어 사이의 통속적인 관계 맺기를 거절하는 데서부터 시적인 가치를 발아한다. 그러나 모든 시가 창조성과 변혁성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가 이미 삼십 여 년 전에 간명하면서도 명쾌하게 정리한 바와 같이, 시 이해의 즐거움과 정도(正道)는 시의 소재나 형식이 아니라 ‘시적인 것’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의 토대가 되는 것은 시적 언어의 창조와 향유이다. 여기에서 시적 언어는 유종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포에지’라고 명명한 것, 다시 말해 “일상언어로부터의 거리와 거기서 유래한 상대적 모호성 또는 기계적 유창성”을 “거절”하는 “말의 반짝임과 울림”을 의미한다.

그의 말처럼, 일상언어와 시적 언어 사이에 놓인 감각적 차이를 감지하는 것이 포에지에 대한 통념이다. 하지만 포에지(poesy)는 단순히 일상언어의 미감이나 정취를 쇄신하는 수사적 기술 혁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와 상징이 차이의 감각을 발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생경한 메타포가 반드시 시적인 것은 아닌 까닭이다.

시인(들)의 작품 창작 과정에서 급진적 언어 실험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은―시적 언어에 대한 탐구가 시적인 것의 결정적 요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적인 것의 의미나 가치가 획일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 창작 과정에서 요구되는 수사적 연마는 시적인 것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시적 언어는 사물과 언어의 클리셰한 공모 관계에 파열음을 내는 능동적 의사소통 행위이며, 시적인 것의 가능성 역시 그러한 향유 경험으로부터 발아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시적인 것의 필요성과 동시대적 과제가 완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의 탐문은 보다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밥 딜런과 장정일의 역설: 시적인 것의 탈규범성

시에서 언어적 연마는 중요하다. 그러나 시적 언어에 대한 혁신 의지나 성과가 곧 ‘시적인 것’의 가치를 확고부동하게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시적 언어에 대한 연마 과정을 무시하거나,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노력(Defamiliarization)에 게으른 시인/독자는 시적인 것을 포착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여기에서 시(詩)와 시적(詩的)인 것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양자는 매우 친연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시는 시적인 가능성이 열려 있으나, 동시에 모든 시를 시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제도화된 시의 관습이나 규범은 시적인 사유나 경험을 방해한다. 심지어 시를 공부하면 할수록, 시적인 것에서는 더욱 멀어지기도 한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문학개론이나 시(창작)론 입문에서 학습한 시의 개념과 특징, 이를 테면 시의 함축성, 음악성, 회화성 등에 대한 이해와 관념이 오히려 시적인 것의 사유와 발현을 막아서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문학의 한 갈래나 학문 분과로서 개념화되고 관습화되는 시의 ‘장르 규범’이야말로, 시적인 것의 융기를 차단하는 문화적 임계(시의 장르≠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밥 딜런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적절성 논란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문학적 관습과 장르 관성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며, 또 반(反)시적인 것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문화적 증례이다. 적지 않은 시인과 평론가들이 밥 딜런에게 왜 ‘문학상’을 주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였고, 이에 대한 비아냥거림과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르 보존적 태도야말로, 문학적인 것의 범주와 의미를 협소하게 결박시키며, 현대시가 추구해야 하는 시적인 것의 가치와 정신을 보수화한다. 밥 딜런의 삶과 음악이 ‘시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수치고는 꽤 문학적이라거나 한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생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딜런은 당대 사회의 주류 문화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것을 정치적 진영 논리 속에 포섭하고자 하는 프로파간다와도 지속적으로 싸워 왔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가 밥 딜런의 음악(예술)이 ‘시적인 것’에 근접했다고 판단한 근거는, 1960~70년대 그의 음악이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담론으로 기능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노래가 특정한 예술의 장르 규범을 공고히 하는 데 끊임없이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딜런은 음악이 대중 정치적 도구로 전유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 인간과 음악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에 대한 갈등과 쟁투. 이것이야말로, 그의 노래가 시적일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밥 딜런은 포크음악이 민중음악으로 도식화되는 정치적 틀을 거부하였다. 손광수는 딜런의 음악이 “아방가르드 미학”(「음유시인 밥 딜런」, 한걸음더, 2015)이자, 시적 실천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시적인 것이란 문학 장르로서의 ‘시의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습적 질서를 재생산하는 상징체계에 대한 도전이자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시적인 순간을 꿈꾸며 산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사소통 규칙과 단절하는 ‘역설적 만남’의 과정이다.

장정일의 글은 이를 잘 보여주는 문화적 예이다.

시를 쓰고 있는 현역 시인들은 시집을 읽어야 한다. 당연히 그들의 연구자들도 시집을 읽어야 한다. 앞으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도 시집을 읽어야 한다. 그 외의 사람들은 시집 같은 걸 읽을 필요가 없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삶의 지혜와 우주의 비밀에 귀의하기 위해, 그리고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많은 방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학도 종교도 그 어떤 시민운동도 좋으며 젊은 혼을 바쳐 탐구할 만한 일이면 또 다른 무엇도 좋다. 시는 그 방편 가운데 극히 작은 일부인데도 총명하고 집념 있는 젊은이들이 모조리 시인을 꿈꾸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처럼 시집을 지천으로 읽는 청년이 많은 나라는 미래가 없다. 알 듯 말 듯한 걸 읽으며 거기에 생을 거는 청년이 많을수록 요기가 많은 인도처럼 저주 받으리라. ―장정일, 「시집」(「생각」, 행복한책읽기, 2005)

유명한 탐독가이자 소설가인 장정일은 “시집을 읽어도 좋은 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누가, 왜 시(집)를 읽고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예의 그 유쾌하면서도 기발한 문장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시집을 읽어도 좋을 세 부류에 대한 통찰, 저 깊이 있는 문필가의 문장에 담긴 역설(paradox)을 제대로 독해한 이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시집」과 「시인」이라는 짧은 글에서, “시집이란 대개 그 분량이 얄팍하고 크기가 작”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으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하거나 친구를 기다릴 때 혹은 통유리로 둘러싸인 패스트푸드점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위해 사용”한다고 말했다. “한 권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쁘띠 부르주아적인 “지적 허영과 교양인의 대열에 끼어 면피나 했다는 포만감”을 남길 뿐이기 때문에, 청년(들)이 시를 읽거나 쓰는 일로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다.

이는 시인이나 청년 독자를 직접 타격하는 독설이 분명하지만, 장정일의 의견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그리 분노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골몰(“봉사”)해야 하는 청년(들)이 ‘시’라는 “저주”에 걸려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독설에는―혹은 시를 쓰거나 읽는 이들이 자기만족감과 허위의식에 빠져 있다는 시니컬한 비판에는―, 그저 괴팍한 비주류 문사의 기행(奇行)적 발언으로만 치부하고 넘길 수 없는 역설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집’과 ‘시인’에 대한 장정일의 냉소와 불신은―「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나 「길안에서 택시잡기」의 시적 언어 전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역설적이게도 시적인 것의 잠재적 심상(archetype)이 무엇인지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독설의 분노 효과는 함정이다. 이 글의 핵심은 누가 시집을 읽고 써야 하는지, 혹은 시(집)의 사회적 가치나 효용 여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적인 것이 애매모호함(“알 듯 말 듯한 것”)의 독(毒)을 품고 있다는 패러독스이다.

장정일은 청년(들)이 “삶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 과학도, 종교도, 시민운동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에 열광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시는 허무맹랑한 상상이나 자기 과시일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현실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불명확한 언어의 마법(“알 듯 말 듯한 것”)과 지배질서의 규범을 넘어서는 상상의 도약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시대의 청년(들)은 아직도 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횔덜린의 비가: 좌파 하이데거주의와 시적인 것의 탈은폐성

두 사례에서 보듯, 시는 탈규범적이다. 현대시가 자아와 세계의 조화로운 합일을 추구하는 동일성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김준오의 「시론」에서와 같이 “동일성에 대한 열망”이 “질서와 안정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이러한 화해 의지는 언제나 분열될 수밖에 없다. 시론 연구나 강단 비평에서 배운 ‘동일성(identity)의 시학’은 그래서 실제 시 창작이나 비평 경험 속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 아니 시적인 것은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구속하는 상징체계와 끊임없이 대립한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의 모색은 세계와 자아의 아름다운 조화(harmony)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와의 지속적인 불화(trouble) 과정 속에서 융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가 분열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생의 조건/인식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history)가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통해 이미 시적인 것의 핵심을 포착하고 통찰한 바 있다.

비가(Elegie)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귀향」이 대표적인 예이다. 횔덜린의 비가(悲歌), 혹은 「귀향」의 슬픔은 일종의 고향 상실(감)이다. 하이데거에게 시인이란, 세계와 분리된 인간의 근원적 상실감을 지각하거나 감각하는 존재이다. 그가 말하는 「귀향」은 물리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 감각이나 망향(望鄕) 정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상실(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횔덜린의 귀향은 자신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하라도 완결되지 않는다.

「귀향」이라는 詩는 즐거운 귀향길을 묘사하는 포에지(Poesie, 詩歌)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근심(sorge)’이라는 말에 조음(調音)되고 있는 마지막 연에는 아무 근심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의 즐거운 기쁨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이 詩의 마지막 낱말은 준엄하게도 ‘않으리라(nicht)’이다. 그러나 알프스 산맥을 명명하는 첫 연은 그 자체가 시구(詩句) 중의 산맥이긴 하지만, 아무런 매개도 없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고향적인 것이 가져다주는 환희의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고향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한 ‘광활한 일터’의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중략) 성스러운 것은 과연 나타나지만, 신은 멀리 머물러 있다. 찾아야 할 귀한 것이 비축된 상태로 숨어 있는 시대, 그 시대는 신이 결여되어 있는 세계 시대(dsa Weltalter)이다. 신의 ‘결여(Fehl)’는 ‘성스러운 이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근거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신상희 옮김, 「귀향―친지에게」「횔덜린 시의 해명」, 아카넷, 2009)

하이데거가 귀향의 불가능성을 노래한 횔덜린을 위대한 시인으로 호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귀향은 언제나 미완이다. “고향은 얻기 힘든 것”이며 “닫혀 있는 것”이다. 이는 “고향의 근원은 그에게 닫혀 있기에, 고향을 찾으려는 시인의 노력은 언제나 헛된 수고가 되고 만다”는 문장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횔덜린의 귀향론은 소박한 회귀주의나 시원을 향한 과거 지향적 탐색에 있지 않으며, 현대인이 상실한 신성의 회복(동일성의 회복)과도 관련이 없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신의 결여”는 “결핍”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혹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낭만적 언술 행위를 통해 인간 생의 결여를 메꾸거나 치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각자에게 기입되어 있는 결여를 가까운 곳에 두고 이를 사유와 성찰의 계기로 삼는 존재(“결여에의 가까움 속에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고향에 가까이 있지만 가까워질 수 없다는 근원적 슬픔, 혹은 그 간극을 사유하는 것이 ‘비가(悲歌)’인 셈이다. 시적인 것이란 그 귀환의 불가능성을 인간 존재의 유한성 속에서 탐문하고 또 발견하는 계기이다. 그러므로 시 혹은 시적인 것을 고향 상실에 대한 결핍을 극복하는 치유와 화해(‘귀향’)의 여정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동일성의 시학’은 제고되어야 한다. 실제로, 하이데거에게 ‘시 짓기’란 문학의 하위장르로서의 ‘시 창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적인 맥락에서 말하는 ‘포이에시스’에 가까운 것이다.

시의 본질은 예술의 본래적 활동과 다르지 않으며, 그래서 창조적인 것은 모두 그 자체로 시적인 것이다. 이처럼, 하이데거의 시론은 횔덜린의 「귀향」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실제로, 저명한 하이데거 연구자인 티머시 클라크는 인간 본질로서의 ‘귀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관점이 우파 하이데거주의와 좌파 하이데거주의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우파 하이데거주의 역시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의 근원적 결여와 소외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각 개인의 존재를 의미 없는 차이로 환원함으로써 ‘부분의 총합을 초월’하는 일자(一者)로 전체화한다. 독일민족의 숭고화를 통해 열등한 타자를 발명하고자 했던 나치즘은 그러한 결속성(동일성)을 폭력의 근거로 삼은 극단적 사례이다. 이와 같이 우파 하이데거주의는 귀향의 수사학을 전체주의의 이론적 틀로 전유한 역사적 사례이자,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해석의 정치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이와 달리, “사회 비판의 기초로서 하이데거적 해체의 힘에 더 관심을 갖는”(「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 앨피, 2008) 입장이 좌파 하이데거주의이다. 하이데거는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과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 그리고 폴 드 만의 ‘탈구성적 텍스트’ 이론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하이데거의 시론에 주목하는 것은, 시적인 것이 “지시하면서 개방 가능한 방식의 어떤 말함”(김동규,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그린비, 2009)이기 때문이다. 개방 가능하다는 것, 다시 말해 시적인 것의 개방성은 획일화된 세계관에 의해 추상화되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인식’과 ‘사태’의 관계를 지각하고 재구축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사건임을 의미한다.

즉, 하이데거에게 시적인 것이란, 형이상학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인 진리가 아니라 존재의 드러냄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알레테이아(aletheia)’, 혹은 탈은폐의 과정인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시의 본질을 두고 “개진과 은폐”, 혹은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김수영 전집 2: 산문」, 민음사, 1990)이라고 말한 것도, 그 속에 시적인 것(사건)이 잠재적 계기로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시적인 것의 봉기: 바로, 괴물을 마주하는 시의 역능

시와 시적인 것은 가까운 관계이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시적인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의 규정 방식이나 장르적 속성을 부수고 초극하는 방식으로 난폭하게 출현한다. 시적인 것은 세계와 자아의 합일을 통해 상처 받은 존재의 결핍과 상실감을 치유하는 동일성의 형식이 아니라―그러므로 서정시를 동일성의 형식으로 개념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타자의 고통이나 빈곤을 은폐하고자 하는 세계와의 갈등 과정이다.

시인이라는 존재는 지배질서에 의해 오염된 언어적 관계와 표상 체계를 어긋내는 존재이며, 시는 언어적 혁신을 통해 그러한 언술체계와 불화하는 문화적 실천이다. 대중독자와의 가슴 찢어지는 결별을 감내하면서도, 지금까지 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기술적 모더니즘과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서정시의 존재 양상이 심각한 언어적 해체 작업이나 장르 실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탓이다. 시는 언어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함께, 우리가 보지 않으려는 것, 혹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것(들)을 다시금 감지하고 사유하게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제작주의적 예술관, 다시 말해 모방/재현 예술로서의 시를 거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는 소외된 사물과 장소를 감각하고 가시화하는 것이지, 이상적이고 완전한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시는 기술이나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올바르게 정초하는 동시에, 세계의 ‘낯섦’을 발견하는 실천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현실 속에서 진리처럼 모사되는 사물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화된 인간 삶과 풍경을 언어 속에 ‘사건화’하고자 한다. 그래서 시적인 것을 성취한 시는 탈규범적인 동시에 탈은폐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언어/사유의 이해 속에서, 시적인 것의 가능성은 새롭게 구성되고 또 봉기할 수 있다. 최근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이례적인 주목을 받은 「괴물」이라는 시를 예로 들어볼 수 있을 듯하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괴물」(「황해문화」 97호, 2017년 겨울호)

최영미 시인이 「황해문화」에 발표한 「괴물」이라는 작품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한국 문단을 뒤흔든, 아니 한국 사회를 뒤집어엎은 스모킹 건이 된 것은 시적 완성도 때문이 아니다. 눈 밝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의 시적 구성이나 미적 성취는 그리 대단치 않다. 시적 언어의 차원에서도 수사적 부림과 생경한 표현(Defamiliarization)보다는, 오히려 사적 사연을 진술하는 이야기시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언어적 혁신을 통해 낯선 감각을 발명하고자 하는 현대 서정시의 수사적 전략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이라는 시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작품이 시적 허용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허용이란 지배질서의 규범 체계와 담화 구조 속에서는 발화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언술 방식이다. 그러므로 시적 허용은 단순한 문법적 오류가 아니라, 지배적 규범 체계 속에서는 발화될 수 없는 언어적 ‘사건’을 창안하는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학교에서 배워온 시적 허용은 사실 시적인 것의 봉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 허용이 속류 상대주의나 단순한 문법적 일탈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시적인 것은 혁명처럼 난폭하고 전복적이다. 어떤 규칙이나 치안 유지자도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괴물」이 ‘폭풍’처럼 도래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En”이라는 지시 대상이 특정 개인을 상상하게 한다고 하더라도―한 개인에 대한 도덕적 응징이나 비판과 무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시적 전략은 사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남성중심주의와 권위주의적 문화 풍토를 타격하는 시 「괴물」은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 ‘괴물’을 탈은폐하는 혁명의 언어이다. 이 시가 시적인 것에 근접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최영미 시에 대한 문학적 오호를 떠나서, 그녀는 시대적 고비마다 시인이 감당해야 하는 시적 책무를 회피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녀의 시 세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점만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듯하다.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거대 담론의 시대가 저물어가던 시기에도―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하고 민주화가 시작되던 시점에도―, 여전히 혁명의 후일담에 빠져 있던 이들에게 역사의 종언을 선언(“잔치는 끝났다”)한 시적 사건이다. 그래서 당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세간의 주목과 비난을 함께 감당해야 했다. 근자에 발표한 시 「괴물」에 대한 문단의 반응이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시적인 것은 ‘시’ 속에서 발현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시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도구적 이성과 합리적 규범이 지배하는 근대 체계의 바깥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양심을 시험한다. 지금(contemporary)도 여전히 시적인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생의 회복을 희망하는 미적 갈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위장된 모순과 적폐를 폭로하는 ‘진실(aletheia)의 총구’를 격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필자소개
문학평론가,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