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치 전업농과 논두렁조성기
    [낭만파 농부] 개점휴업 ‘벼농사두레’의 새출발
        2018년 05월 24일 10:31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석탄절 아침. 일찍부터 건너 마을 광배 씨가 트랙터를 몰고 울안에 들어선다. 곧장 트럭에 실려 있는 ‘논두렁조성기’를 끌어내려 트랙터에 장착한다. 내가 농업기술센터에서 빌려온 기계다. 석탄절은 휴무라 하여 엊저녁에 실어왔다. 기계가 무겁고 연결부가 복잡해 장착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논두렁조성기를 꽁무니에 매단 트랙터는 이윽고 한 마장 떨어진 근수 형님네 논배미로 향했다.

    농기계 하나 움직이는데 인물이 셋이나 등장한다? 인과관계는 또 왜 이리 복잡한가 싶을 것이다. 얘기의 가닥을 잡자면 이렇다.

    얼마 전 근수 형님네 논 주변을 측량할 일이 생겼는데 그 결과 토지경계가 논 안쪽으로 밀렸다고 한다. 그 경계선을 따라 논두렁을 다시 쌓아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직장에 다니면서 ‘주곡 자급’ 차원에서 논 세 마지기를 짓는 근수 형님에게 논두렁조성기를 장착할 트랙터가 있을 리 만무하다. 어찌어찌 하여 광배 씨네 트랙터를 쓰기로 했다.

    문제는 논두렁조성기. 이 비싼 장비는 여간한 대농이 아니고는 농업기술센터에서 빌려 쓰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근수 형님도, 광배 씨도 농업인이 아니어서 농기계 임대에 필수요건인 농업인안전재해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결국 논두렁조성기를 임대하는 일은 ‘농업인’인 나한테 맡겨졌던 것이다.

    ‘농업인’이라고는 하지만 나 또한 딱하기는 매한가지다. 보험을 들어둔 덕에 임대권리가 있고, 빌린 농기계를 실어올 수 있는 트럭이 한 대 있을 뿐이다. 트랙터? 그건 나도 없다. 김제나 익산 같은 평야지대에 견줄 바는 못 되지만 근동에서는 나름 ‘대농’이라 불릴 만큼 부치는 논배미가 좀 되는 7년차 ‘쌀 전업농’인데도 말이다. 이러저런 사정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못 말리는 ‘기계치’의 ‘공포증’이라고 해두자.

    논두렁조성기 장착 트랙터

    아무튼 논두렁조성기는 근수 형님네 논배미뿐 아니라 내친 김에 우리 논 한 배미, 그리고 반납하러 가는 길에 딱 마주친 상호 씨네 논배미까지 논두렁을 쌓는 것으로 제 임무를 마쳤다. 여기서 우연히 끼어든 상호 씨까지 등장인물 넷의 공통점은 <고산권 벼농사두레>라는 단체의 회원이라는 사실. ‘건강먹거리’ ‘식량주권’ ‘생태보전’을 기치로 유기농 벼농사를 서로 도와가며 짓는 그야말로 ‘두레’ 조직이다.

    올해로 4년째 함께 벼농사를 짓고 있다. 언젠가도 잠깐 소개했듯이 공식규범도, 체계도, 상설기구도 없는 ‘무정형’의 조직으로 이런저런 일을 벌여왔더랬다. 그러다가 지난해 여름 활동이 벽에 부딪히면서 반 년 넘게 ‘개점휴업’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 사이 여러 성찰과 모색이 이어지면서 책임 있게 모임을 지속하려면 그에 걸맞는 모양을 갖추기로 뜻을 모았다. 결국 지난 5월 5일 못자리 두레를 마친 뒤 창립총회를 열어 회칙을 만들고, 조직체계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오늘 아침 벌어진 복잡한 상황의 인과관계는 시원하게 해명이 되었을 줄 믿는다. ‘없는 자들의 연대’요 ‘가치의 연대’인 셈이니 애틋한 무엇이 있게 마련이다. ‘대농’ 한 명과 ‘중농’ 한 명을 빼고 나면 다들 소농도 못 되는 ‘마이크로농’이고, 자기 벼농사는 한 포기도 짓지 않지만 가치에 공감해 함께 하는 이들이 더 많다. 볍씨파종, 못자리 조성, 모판 나르기, 풀매기 같은 두레작업에 일손을 보탠다. 아울러 백중놀이, 풍년잔치, 대보름잔치 같은 잔치판에서 함께 신명을 풀어내고, 늦깎이들이 동아리를 꾸려 장구가락을 익히기도 한다. 나아가 생태가치를 성찰하고 농사를 배우는 농한기 공부모임까지.

    모판의 부직포 걷어내는 모습

    창립총회 하던 날 모판을 앉힌 못자리에는 지금 싱그러운 모가 쑥쑥 자라고 있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날씨가 더워 모가 웃자라는 지경이다. 해서 보온을 위해 씌워둔 부직포를 좀 더 일찍 걷어내기로 했다. 그게 바로 내일이다. 베일에 싸였던 푸른 융단이 눈부신 자태를 뽐낼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푼다. 어찌 안 그렇겠나. 더욱이 전업농이 아닌 이들에게는 볍씨를 넣고, 모판을 앉히는 작업이 무척 고된 노동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어 모레는 ‘벼농사두레의 활동방향-하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주제로 창립총회 뒤 첫 회원 간담회가 열린다. 어찌하면 ‘벼농사’를 끈으로 재미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생각을 나누는 자리가 될 것이다. 사실 모내기를 앞두고 기운을 돋울 때이긴 하다. 그래도 시원한 밤바람 쐬며 술잔 기울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이 있겠는가.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