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움에의 매혹, 그 이후에 남은 것은?
        2006년 04월 21일 07: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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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근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계단 옆 구석의 2평가량 공간을 막아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고 한쪽 벽에는 책장 가득 사회과학 서적이 들어차 있었던 곳. 출입문에는 “해석에서 변혁으로”라는 모토가 자랑스럽게 내걸려 있던 곳. 그곳 동아리방에서 한 선배는 어느 날 원고 뭉치를 내놓으며 우리를 불러 모았다.

    두툼한 원고 뭉치는 아직 제목이 없었고 누군가의 강연 녹취 원고인 듯 보였다. ‘근대성과 마르크스주의’가 그 선배가 제안한 세미나 주제였고, 원고는 선배가 직접 녹취를 푼, 곧 출간될 <철학과 굴뚝청소부>라는 제목의 책 초고였다. 저자와 출판사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는 그 책을 정식으로 구입한 적이 없다. 선배가 복사해준 두툼한 초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초고를 기본 텍스트로 하여 용감하게도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나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아득함이란… 함께 그 테이블에 모여 있던 우리는 스피노자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경계를 확인하는 이론적 과제를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가 모여 있던 방 건너편 원형 강의실에서는 원고의 저자와 그의 대학원생 동료들이 미셸 푸코의 영어책을 하나씩 들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고 그 열기는 건너편 우리들에게도 전달되기에 충분했다.

    당시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던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어느 구절을 두고 머리를 싸매던 나는 그 열기를 내 것인 양 받아들인 것 같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에 질겁하고, 도통 바닥을 모르겠는 헤겔의 그 깊이에 절망하면서도 우리는 2평짜리 그 방에 계속 모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경계의 사유’는 대학가에서 유행이 돼있었다. 새내기들의 손에 들린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꽤 어울려 보였고, 학생회 선거 포스터에는 ‘탈주’를 재촉하는 문구가 인쇄되었다. 당혹스러웠지만, 우리의 세미나도 어느새 니체와 프로이트를 거쳐 푸코와 들뢰즈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마르크스를 이해하기 위해 거쳐야 할 사상가의 목록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텍스트와 텍스트는 교직(交織)되어야 했고 그 속에서 경계가 발견되고 확인되어야 했다.

    대학에 갓 들어와 읽은 <철학에세이>나 강의실에서 기웃거렸던 근세철학사에 비해서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원고는 무엇보다 새로웠고 다채로웠다. 주객동일성의 인식론이 철학의 금자탑이라 가르치던 종래의 무슨 무슨 유물론이라는 제목의 책들의 무덤 속에서, 내가 보았던 그 원고는 얼마나 새로웠는가! 데카르트로부터 라캉과 푸코에 이르는 사상가들의 계보 안에서 도식적인 마르크스주의는 또 얼마나 초라해 보였던가!

    그 새로움에의 매혹은, 비범한 이력을 가진 저자의 음성이 그대로 문자로 재현된 원고에 밑줄을 그어가며 배가됐다. 그러나 망치로 가차없이 우상을 파괴한 니체를 공부하면서도 녹취 원고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사뭇 또 하나의 우상숭배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숭배행위는 너무도 큰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대학 2학년이 <방법서설>부터 <천개의 고원>까지 어찌 독파할 수 있겠는가! 설혹 금욕의 자세로 독파한다고 해도 구원의 손길이 나를 어루만질 리 있겠는가! 근대와 탈근대의 사상에 대한 지도그리기(mapping)가 어설프게나마 마무리될 무렵 이 책은 대학의 교양서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한권으로 끝내는 서양철학사. 대학가에서 아직은 사회과학 베스트셀러가 존재하던 그 시절에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거의 마지막으로 그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나 싶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원의 석사학위 논문제출자격시험에는 근대의 주체중심적 이성관을 비판한 사상가들 중 2명을 골라 그 입장을 요약, 정리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라깡, 알튀세르, 푸코 중 2명. 이 시험에서 불합격의 고배를 마신 후배에게 전해 줄 책으로 <철학과 굴뚝청소부>가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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