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경제우선 노선,
    중국 개방 모델보다 베트남 ‘도이 머이’?
    [세계는 지금] 북한식 개혁개방 추진에 주는 시사점
        2018년 05월 23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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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회담과 한미회담, 그리고 아직은 성사될 가능성이 많은 북미정상회담 등 한반도의 정세가 격변하는 상황이다. 여러 가지 주목해야 하고 살펴야 할 지점들도 많지만, 북한의 이후 행보 중 ‘경제우선 노선’과 관련하여 중국 모델과 베트남 모델이 주목을 받고 있다. 최백순 레디앙 기획위원이 베트남 모델에 대한 북한의 관심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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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미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밀고 당기기가 한창이다. 회담 개최 여부의 불확실성도 공존하는 상황이다. 한미 공군연합훈련인 맥스선더가 진행되자 북한이 예정되어 있던 남북군사고위급회담의 무기한 연기를 통보하며 반발했다. 북한이 북미회담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다급해진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정권의 안정”을 거듭 약속하며 리비아모델은 검토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요컨대 핵(시설) 폐기이후 리비아처럼 정권을 무력으로 와해시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라고 재차 확인했다. 눈여겨 볼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개방을 전제로 경제모델은 남한, 즉 자본주의를 대거 수용하는 쪽으로 가야하는 것 아니냐고 언급한 대목이다. 북한이 전면적으로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개방을 단행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북미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개방을 전제로 경제제재 해제를 확답 받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내놓을 모델은 무엇일까.

    지난 3월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을 앞두고 중국을 방문했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 도중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차례의 주요회담을 앞두고 해석하기에 따라 민감할 수도 있는 덩샤오핑의 노선을 왜 언급한 것일까? 중국 방문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경제우선 노선”을 천명한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것일까? 핵 폐기 카드와 개혁․개방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군정치를 전면에 내걸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유사한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개방론자인 김영일 총리 당시에 대규모의 대표단을 베트남에 파견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김영일 총리 일행은 베트남의 개혁․개방노선인 ‘도이 머이(Doi Moi. 쇄신이라는 뜻의 베트남어)’의 실태를 집중적으로 둘러본 것으로 보도되었다. 북한의 경제위기가 장기화되자 김정일 위원장은 도이 머이 모델을 북한식으로 도입하려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지만 결국은 고난의 행군으로 선회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도이 머이 모델을 포기한 것은 양국의 조건이 다른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미 중공업으로 전환한 북한과 달리 베트남의 개방노선의 핵심은 ‘농업’이었다. 선친이 포기한 노선이지만 그럼에도 김정은 위원장이 추진할 개방노선의 방향은 중국식보다는 배트남식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어느 정도는 중국식의 장점도 포함될 개연성도 존재한다.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베트남 모델에 중국 모델의 장점을 혼합한 북한식 모델을 도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현재로서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베트남공산당 전당대회(위) 모습과 등소평의 개방정책을 강조하는 사진

    도이 머이, 가난을 나누는 사회주의

    1976년 통일전쟁 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했지만 경제는 황폐화되어 있었고 장기간에 걸친 인도차이나반도 전쟁의 후폭풍도 극심했다. 베트남은 (국가)사회주의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했지만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86년 제6차 당대회를 앞두고 당의 최고의결기구인 중앙집행반(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개방노선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배트남의 도이 머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2대 총비서인 쯔엉찐과 3대 총비서인 응우옌반린 두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초대 총비서인 레주언이 10년간 지도자로 당을 이끌고 있을 때 쯔엉찐은 덩샤오핑의 개방노선을 사회주의의 일탈이라고 비판하는 강력한 원칙주의자였다. 반면에 응우옌반린은 초기부터 개방노선을 주장하다 한차례 중앙집행반에서 탈락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다. 차기 총비서로 호명되던 쯔엉찐은 레주언이 사망하자 총비서에 오르면서 정치운명을 건 승부수를 띄웠다. 당대회에서 개방노선을 채택한 후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배수진을 치며 반대파를 진압했다. 6차 당대회에서 개방노선이 채택되자 쯔엉찐은 총비서를 사임하고 후임으로 응우옌반린을 지목한 후 이선으로 물러났다.

    또한 총비서의 임기는 한 차례(5년)로 제한하고 국가주석과 겸임하지 못하는 전통을 수립했다. 6대 총비서인 농득마인이 연임을 하면서 전통은 깨어졌지만 중앙집행반의 합의를 통해 선임하는 총비서와 국가주석이, 다른 (국가)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전권을 가진 지도자가 아닌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를 운영하는 총리의 재량이 훨씬 넒은 독특한 일당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 개방노선의 설계자는 응우옌 쑤언 오아인 박사다. 새로운 변화라는 뜻의 도이 머이라는 용어를 제안한 것도 그였다. 응우옌 쑤언 오아인 박사가 주목한 것은 3모작이 가능한 베트남의 농업이었다. 집단농장체제인 농업의 단위를 농가(가족)로 전환하고 여분의 쌀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도이 머이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일정량의 쌀을 국가가 일정가격에 사들여 수출하고 농가는 여분의 쌀을 시장가격에 처분해 추가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20년 동안 상속과 매매도 가능하도록 함으로서 사유재산이나 마찬가지의 권리를 부여했다. 매매가 가능하도록 열어두자 토지의 질과 생산력이 급증했다.

    농가들은 일한 만큼 소득이 늘어나자 토지 관리에 집중했고 매매가 가능해지자 토지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다양한 농법을 개발했다. 자본주의의 성과제의 다른 방식이었다. 베트남의 쌀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오늘날 전 세계 수출 3위국까지 올랐다.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람에 날린다는 안남미는 생산원가는 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도이 머이의 핵심인 농업의 개방으로 국내경제와 민중들의 삶을 확연히 개선되었지만 응우옌 쑤언 오아인 박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국제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집단농장을 해소한 것을 넘어 경제부문에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한 것이다. 도이 머이의 절정은 외국인투자법과 외국환관리법을 도입한 것이다.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외국기업의 투자를 허용해도 송금을 자유롭게 보장하려면 외환제도를 손보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외국기업의 투자를 허용하는 것은 국민소득을 높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통일베트남 건설 이후 미국은 베트남에 대해 강력한 경제제재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투자유치와 외환제도의 정비는 경제제재조치를 해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미국은 경제제재조치를 해제하는 것으로 화답했고, 베트남은 아시아개발은행(ADB)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베트남은 아시아개발은행에 가입하면서 대규모의 기술원조와 좋은 조건의 차관을 받아낼 수 있었다. 개발도상국들이 단기간에 경제성장을 이루는 방법은 거의 유사하다. 일정기간의 세금면제 등 외국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 기업을 유치한 후 협력업체나 하청회사를 설립해 소득증대와 고용을 늘리는 방식이다. 얼마나 빠른 시간에 외국기업의 기술을 흡수할 것인가에 따라 경제성장 속도와 규모가 달라질 뿐이다. 남은 것은 개발도상국들이 기업을 설립할 자본이다. 베트남은 중국의 흑묘백묘를 뛰어넘는 도이 머이를 통해 아시아개발은행의 원조로 이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도이 머이가 남긴 그림자

    베트남의 산업별 DGP 기준으로 한때 80%에 육박했던 농업의 비중은 현재 20% 미만으로 축소되고 그 자리를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차지하고 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다는 뜻이다. 지난 30년 동안 베트남은 명목기준으로 GDP가 세계 40위권까지 뛰어올랐다. 반면에 1인 기준의 GDP는 여전히 130위권을 밑돌고 있다. 이런 수치가 증명하는 것은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트남의 개방정책인 도이 머이는 ‘가난을 나누는 사회주의’라는 수사로 불리었지만 현실은 부는 증가했지만 ‘나누는 사회주의’는 실종된 것이다.

    도이 머이의 출발이었던 농업 중심은 쌀 수출국 세계 3위가 되면서 가난을 나누는 사회주의의 출발은 유의미한 측면이 있었다. 차관과 기술원조로 제조업이 급성장하면서 도이 머이의 정신은 소득격차와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민중들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대립을 불러왔다. 10차 당대회를 앞둔 2005년 대규모의 공적자금 횡령사건이 터지면서 당과 지도부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1990년대 베트남은 ASEAN에 가입하면서 개발도상국들이 제공받는 공적자금(ODA)의 대상에 포함됐다. 공적자금은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는 사회간접시설로 제한되었고 사용목적도 특정되었다. 그런데 일본이 제공한 거액의 공적자금을 고위관료들이 횡령하여 도박과 유흥비용으로 사용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이 공적자금이 교통이 낙후된 지역의 도로를 건설하는 비용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민중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고위관료들이 구속되었지만 당의 지도부들이 연관되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10차 당대회를 앞두고 포문을 연 것은 당의 원로인 보 반 끼엣 전 총리였다. 끼엣 전 총리는 도이 머이로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당내 민주주의가 실종되면서 공적자금 사태와 관료부패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끼엣 전 총리가 대안으로 들고 나온 것은 최고지도자의 선출방식을 직접투표로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베트남의 최고지도자는 15인으로 구성된 상설최고의결기구에서 ‘협의’를 통해 선출했다. 과두정과 유사한 이 방식은 당과 민중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토론을 통해 논란 없이 선출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당의 공식 최고의결기구인 당대회를 추인기구로 전락시켰다.

    또한 인사권을 놓고 협의가 가지고 있는 폐단이 그대로 나타날 우려가 있었다. 이를테면 총리임기가 끝나면 총비서로, 총비서는 국가주석으로 이동하는 방식이 호치민 사후 관례화되었다. 끼엣 전 총리는 이런 방식이 당과 국가의 관료화를 심화시켰고 도이 머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끼엣 전 총리는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개방정책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주장은 큰 반향을 불러왔고 언론은 보기 드물게 자유선거와 도이 머이가 가져온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중앙집행반의 논의는 겉돌았고 이례적으로 대의원들의 토론으로 방향을 결정하자는 방안을 제시하며 후퇴했다. 당 내외 논란이 가속화되자 당의 분열을 우려한 끼엣 전 총리가 농득마인 총비서에게 향후 대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하며 자유선거 의견을 철회했다.

    집단농업에서 가족농업 허용으로 전환한 도이 머이의 결정은 ‘가난을 나누는 사회주의’라는 호명에 걸맞은 순기능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다. 토지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20년 동안 소유할 수 있게 한 것과 상속을 허용한 것은 가족농업 허용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

    도이 머이의 순기능을 훼손한 것은 매매를 허용한 부분이다. 부동산은 공시지가를 벗어나 매매가와 호가가 기승을 부리는 순간, 시장은 시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단기간에 토지가격이 상승하면서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생산원가는 오히려 올라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생산원가를 통제하기 위해 저임금 농업노동자들이 대량으로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20년 동안 두 자리 숫자에 육박하던 GDP 성장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해 절반 수치까지 떨어졌다. 세계금융위기와 경제침체로 인한 탓도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 외국기업투자에도 불구하고 자체 기술개발능력이 따라잡지 못할 경우 개발도상국에서 생기는 일반적인 현상에서 베트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조업이 정체를 보이기 시작했고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축소됐다. 사회기반시설이 확대되고 외국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서비스 비중은 오히려 늘어났다. 부의 편중과 소득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경제성장마저 한계에 다가오면서 도이 머이는 새로운 전환과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북한식 개방정책과 장마당의 경험

    계획경제인 북한에서는 별도의 시장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국영상점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생필품은 국가가 배급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계획경제가 부분적으로 작동을 멈추면서 생필품이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기본적인 생필품이 공급되지 못하자 농민들은 남은 땅이나 텃밭을 이용해 채소나 닭 등을 키워 이를 내다 팔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규모가 커지게 되자 일종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북한 주민들은 이를 ‘장마당’이라고 불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장마당을 허용한 이유는 고난의 행군으로 인한 일시적으로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도 장마당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고난의 행군 시절을 겪은 ‘장마당 세대’들이 주류세대가 되면서 향후 개방정책이 도입될 때 이들의 행보가 시금석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시장을 경험하지 못한 체 개방정책을 도입한 베트남과 피부로 체감한 세대들이 주류를 이루는 북한은 보완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장마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중국의 값싼 채소와 돼지고기 등이 흘러들어와 시장을 교란시키며 잠식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했다. 북한이 중국식 개방정책을 모델로 하기 보다는 다른 (국가)사회주의 국가들을 모델로 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것도 이런 경험들 때문이다. 북한이 장마당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 모델의 장점을 흡수해 그들만의 모델을 도입하는 것은 과연 현실화될 수 있을까?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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