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의 큰 숲,
    어머니교회 '새문안교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1887
        2018년 05월 23일 09: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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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립 50주년을 맞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의 역사와 증언을 읽으며 마치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하는 것 같은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시대의 아픔과 예언자적 외침을 망각한 채 역사의식도 거의 마비된 듯한 오늘날 이 교회가 한때 활화산처럼 에너지를 뿜어댔다니 믿기지 않는다. 소수의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며 한국교회를 선도해 갔던 것이다. 이 책은 한 교회 대학생회의 역사를 정리한 것 치고는 너무나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만열 명예교수의 <시대의 횃불, 새문안대학생회 민주화운동사> 발간 축사 중에서)

    한국의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새문안교회가 근래에는 존재감이 없었는데, 2017년 1월에 출간한 새문안 대학생회 민주화운동사에서 자랑스런 역사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회는 1967년에 창립(지도/ 홍성현 목사<전 수송교회 담임>, 회장/ 이일영<국경선평화학교 이사장>)하여 젊은 신앙인들의 역사 참여에 대한 고뇌가 시작되었습니다.

    대학생회를 지도한 김종렬 목사, 김용복 목사 등 예언자적인 목회자들과 뛰어난 선배들이 회원들을 바른 신앙과 사회적 책임으로 인도하여, 군사정권 시절 학생운동과 기독청년운동에 투신한 회원들이 줄지어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빈민지역과 공장지대에서 야학을 열어 신앙을 실천하였습니다. 주일마다 언더우드기념관 지하 친교실은 지성적 신앙과 실천적인 고민을 담은 세미나로 열기가 가득했고, 토요일에도 신학, 문예, 사회과학 공부모임이 열렸습니다.

    대학생회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사건이 1973년 11월 27일, 제17회 언더우드학술강좌가 끝난 후에 일어납니다. 대학생회 회원들이 횃불을 들고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등을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광화문을 향하여 시위하다가 잡혀 20여명이 종로서에서 구류를 살았습니다. 살벌한 유신시대에 시위를 한 이 사건은 교회 안팎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보수적인 장로들과 자주 갈등을 빚었고, 급기야 1988년, 대학생회와 청년회가 당회로부터 해산당하고 말았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는 큰 숲을 형성한 어머니 나무였습니다. 뉴욕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후,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해외선교의 꿈을 키웠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할 때, 일본에서 만나 한국말을 배운 이수정이 한글로 번역한 마가복음 성경을 들고 왔는데, 조선에는 이미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 있었으니 세계선교역사상 유래가 없는 경우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선교사들과 더불어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설립합니다. 장기적 비전을 갖고 제국주의적 선교를 거부하고 인문정신과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교육과 의료, 사전출판, 그리고 민중선교를 전개하였습니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채에 한국인 14명이 첫 예배를 드리며 2명의 장로를 선출하여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서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886년에 고아들을 위해 설립한 언더우드학당은 발전하여 경신학교가 되었는데, 도산 안창호도 3년간 이 학당에서 교사로 일하였습니다. 또 정신여학교와 나중에 협성신학교가 된 영신학당을 세웠습니다. 1917년 언더우드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할 때 평양에 1897년에 세운 숭실학교가 있었고, 당시 일제가 종교교육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선교사들도 반대하자, “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치지 못해도 그리스도인 교사의 삶이 곧 선교이다.”고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한영사전 편찬하고 YMCA 창립하였으며, 31년간 한국사회 혁신에 모든 것을 바친 후 57세에 병사하였습니다.

    새문안교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은 김규식 장로와 서경조 목사입니다. 우사 김규식은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후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한 민족주의자입니다. 고아인 그를 언더우드가 양아들로 키웠고, 미국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하여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에 장학금을 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독립운동을 하러 귀국합니다.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일하며 YMCA에 적극적이었고, 경신학교의 교사와 교감을 겸임하였고, 1910년 장로가 되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탄압을 받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해외활동을 하였고, 만주에서 민족혁명당을 조직했고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김영주 담임목사와 함께 납북되었습니다.

    서상륜은 만주에서 세례를 베푼 로스 목사와 함께 최초의 한글성서를 번역하고 권서인으로 성경을 보급하며 복음전도에 앞장섰고 새문안교회 창립교인이 되었습니다. 동생 서경조 목사는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분으로 새문안교회 협동목사로서 교회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언더우드 목사 이후 새문안 목회자 중에 두드러진 분은 강신명 목사입니다. 1955년에 부임하여 24년간 목회하였는데 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 연합운동에 적극적이었고 진보적인 목사들과도 일했으며 청년들의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옳은 일에 주관이 뚜렷하여 박형규 목사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목사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내가 보기에 박형규 목사는 공산주의자다.”라고 말했을 때, 강 목사님이 “박형규 목사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용기있게 옹호했다고 합니다.

    1972년, 새문안교회는 창립 85주년 기념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MIT대 출신으로 고종의 손자인 이구는 모더니즘을 바탕으로 단순미를 강조하였고, 교회 전면에 우리나라 전통무늬를 넣어 ‘한국적 전아한 풍취’를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림=이근복

    이번에 서둘러서 새문안교회를 그린 것은 올해 12월에 완공된다는 새 예배당이 호감이 가지 않아서입니다. 며칠 전 서대문(옛 돈의문)에서 광화문까지 걸었습니다. ‘한양도성 순성길’이란 표지를 따라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나, 높이가 13층 67.6m라는 새 교회 조감도와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바라보니 ‘사랑의교회’처럼 보이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이곳은 경희궁에서 경복궁으로 가는 길목이니, 한국적 정서를 담은 고아한 예배당이면 어떨까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어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광화문빌딩에 임시로 설치된 교회사료관에 가보니 여러 사료들과 함께 1972년 교회당의 벽돌도 전시되었는데, 강신명 목사님이 건축헌금으로 벽돌 몇 장씩이라도 드리라고 독려할 때 저도 참여한 기억이 났습니다.

    옛 새문안교회를 그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글이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다닌 교회이고 대학생회를 통하여 신앙과 삶의 철학, 예언자적 실천을 배워, 평생의 길잡이가 된 인생학교이며, 새문안 가문 출신인 아내를 만났으니 제 인생의 가장 뜻 깊은 역사가 이루어진 친밀한 곳이라 마음 부담이 컸나 봅니다. 올해 부활주일, 새문안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얼마 전에 부임한 이상학 목사의 설교와 교회 분위기에서 새문안 회복의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촛불이 들불이 되어 정권을 바꾸었고 이제 한반도는 평화통일로 나아가고 있으니, 새문안 대학생회가 든 횃불이 한국교회 혁신의 들불로 부활하길 기대합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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