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투쟁,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⑥-1]
        2018년 05월 11일 05: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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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직 투쟁의 전망과 노선 정립에 대한 김정호 씨의 연속 기고 6회 “어떻게 투쟁 주체를 세울 것인가?”는 한 회에 게재하기에는 좀 많은 분량이다. 이에 1 비정규직 투쟁,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하나, 2,학습소조, 지역조직과 전국조직의 건설 3. 정치세력화의 새 물결을 일으키자!를 1부분과 2·3부분을 나눠서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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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⑤]기본모순과 주요모순

    어떻게 투쟁주체를 세울 것인가?

    현 재벌체제의 반역사성으로 말미암아 한국사회에는 이미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여론이 존재한다. 지난 호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이러한 재벌문제 해결의 통로라고 하였다. 이것은 反재벌 주체의 형성은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작 비정규직 투쟁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1. 비정규직 투쟁,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일견 비정규직들은 가장 직접적이고 심각하게 재벌체제의 고통을 온 몸에 받고 있기에 반재벌 투쟁의 선도적 주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모습에 불과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록 심각한 생활상의 고통과 열악한 작업조건에 처해 있지만, 약점 또한 적지 않다. 이들은 소규모 영세 사업장으로 분산되어 있고 유동이 심하며, 이 때문에 조직이나 의식면에서 대공장 노동자에 비해 많이 뒤쳐진다. 당연히 이들의 투쟁력 역시 그러한데, 단독적으로는 좀처럼 사업주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그들 간의 연대 또한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에 따라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투쟁이 장기화하고 소모를 많이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또 이들이 수행하는 ‘비정규직 투쟁’은 정규직화 요구 혹은 노조 탄압 등과 관련된 즉자적 요구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본질인 반재벌 투쟁으로까지 상승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과연 이 같은 불리한 조건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어떻게 반재벌 투쟁의 주체로 불러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중국의 과거 경험을 보도록 하자.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로 신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고 1949년 10월 신 중국(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였는데, 5억 명의 인구 중 80% 정도의 절대 다수는 농민이었고, 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겨우 5%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절대 다수인 농민을 주체로 세우지 않고서는 중국사회의 변혁을 완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에선 어떻게 이러한 거대한 농민들을 변혁의 주체로 세울 수 있었을까?

    당시 중국 농민의 존재조건은 일견 현재의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 중국 농민들은 반식민지 반봉건 체제부터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존재이었다. 제국주의 침탈의 일차적 희생양이었으며, 반봉건적 지주제와 군벌의 가혹한 억압과 수탈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 농민들은 전국 각지 수많은 촌락으로 흩어져 있었으며 고립된 채 상호 연락이 어려웠다. 또 대부분 문맹으로서 의식상으로도 깨어있지 않았다. 이 같은 농민들을 조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을 변혁의 주체로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계급연대 즉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농민에 대한 집단적 지원을 통한 농촌에서의 ‘토지혁명’의 전개였다. 중국공산당은 1927년 4월 장개석의 쿠테타로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자 ‘홍군’이라는 자체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농촌으로 들어갔다. 군벌의 힘이 잘 미치지 못하는 농촌에서, 이들 홍군은 토착 지주들이 조직한 자경부대를 몰아내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줌과 동시에 그들을 무장시켰다. 그리하여 토지를 획득한 농민들은 다시 홍군에 지원함으로써 공산당이 이끄는 무장 대오는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처럼 토지혁명을 중심으로 한 노농연대의 모델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마침내는 유명한 ‘농촌에 의한 도시 포위’ 전략이 실현되어 신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게 된다.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 사례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만약 중국의 변혁적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처음부터 농촌에서 시작했더라면, 그리하여 그들이 개별적 차원에서 농민들과 결합했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광범위한 농민 속에 파묻혀질 뿐 그렇게 쉽게 그들을 조직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먼저 도시에서부터 시작해서 당시 선진적 계급인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우선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다시 농민운동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즉 당시 중국 농민을 토지혁명의 진정한 주체로 불러일으켜 세우기 위한 ‘선도적 주체’는 다름 아닌 도시 프롤레타리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 있어서 볼 때, 비정규직 문제를 풀기 위한 이 같은 선도적 주체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다시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대기업 정규직은 무엇보다도 단위 사업장 내에 밀집한 거대한 수적 규모와 산업에 있어 전략적 위치 때문에, 자본과 정권에 대해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국 내 유일무이한 집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노동운동 및 전체 변혁운동에서 볼 때 일종의 ‘전략역량’이라 불릴 수 있으며, 군사무기로 치자면 핵무기와 같은 존재이다. 이 같은 전략역량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계급투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우리는 이 같은 대기업 정규직의 역량을 무시하고서 다른 어떤 과제를 해결하기가 힘들며, 이는 비정규직 투쟁을 푸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기업 정규직은 얼핏 보면 현 재벌체제의 상대적 수혜자이고 노동귀족화 하였기 때문에, 결코 반재벌 투쟁이나 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선도적인 역량이 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현상에 불과하다. 필자는 이미 지난 호에서 한국 대기업이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투쟁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다.

    지금 한국 신식국독자 후기 체제의 위기가 본격화될 시점에 접어들고 있다. 이는 제4차 산업혁명의 성과가 날로 가시화되고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에도 낡은 ‘재벌체제’ 때문에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한계, 그리고 그동안 한국 재벌체제 유지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던 한미동맹이 미국 패권의 쇠락으로 그 기축이 흔들리고 있으며 남북화해무드가 진척됨에 따라 재벌체제와의 모순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이로부터 한국 재벌의 마지막 생존을 위한 발악으로 대규모의 신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게 다가오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정규직은 자신의 미래일 수 있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대기업 정규직으로부터 시작할 경우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우선 물리적 지원의 측면에서 볼 때, 대공장 정규직은 한국 재벌체제가 갖는 원-하청 간의 위계적 수탈체계를 거꾸로 활용하여 비정규직 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원청 대기업은 하청 중소기업에 대한 업무상 비밀들을 많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 같은 경영 관련 정보들은 언뜻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청 비정규직 투쟁에 중요한 도움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대부분 원청 재벌 대기업들은 하청의 노조 설립과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갖가지 탄압을 막후에서 지휘하는데, 이에 대해 원청 정규직은 하청 노동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속에 이 같은 재벌의 막후 행위를 폭로하고 그 중지를 직접적으로 요청하면서 견제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비정규직노조를 탄압하는 하청 사업주에게는 일감을 주지 말도록 압박하는 싸움도 전개할 수도 있다. 그밖에 비정규직 투쟁의 가장 큰 곤란 중의 하나가 ‘재정문제’인데, 이들은 영세하기 때문에 항상 투쟁기금의 부족에 시달린다. 이 경우 수적으로 우세한 대공장 노동자들의 재정지원은 큰 도움이 된다. 이들이 다만 몇 천 원씩만 각출한다 해도 수백 수천만 원을 모금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규직들은 또 필요할 경우 일반 노조원을 대상으로 ‘현장실천대’를 조직하여 집회와 시위 등 직접적인 물리력을 동원함으로써 재벌과 정권에 대해 보다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지원행동을 펼칠 수 있다.

    이 같은 물리적 측면의 지원 외에, 이미 정규직 노동자들 중에 상당수 존재하는 선진 활동가들을 통해 비정규직에 대한 선전과 교육 같은 정신적 측면의 지원을 수행할 수 있으며, 이 역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는 비정규직 투쟁이 단순히 정규직화 요구를 넘어서 ‘반재벌 투쟁’이라는 본격적인 변혁적 운동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 때문에 비정규직 투쟁에 결합하는 정규직의 선진 활동가들은 이 작업을 의식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비정규직 대중들에게 한국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선 ‘반재벌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한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과 그 방법 등에 관해 교육을 하여야 한다. (물론 이 같은 교육을 위해선 ‘교육자’ 즉 정규직 활동가들이 먼저 학습 받아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선 조금 후에 서술한다.)

    위의 양 측면의 지원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정규직 투쟁은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을 인정한 전제 위에서 수행하는 고용·임금 조건의 개선, 노조 건설과 그에 대한 탄압 분쇄 등과 관련된 비정규직 투쟁과, 반재벌을 목표로 하는 비정규직 투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규직 선진부대는 여기서 ‘낮은 수준’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지원 단계에서부터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첫째, 비정규직노조를 안정시키고, 그 대오를 확대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둘째, 대오가 안정화한 기초 위에서, 이들을 의식적으로 고양시켜 반재벌 주체로 양성하는 교육을 비로소 진행할 수 있다. 이 양자는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비정규직 조직율이 채 3%를 넘지 못하는 그간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비정규직 조직화가 지난한 것은 그 투쟁주체들이 아직 사업장 내에 채 뿌리 내리기도 전에 탄압에 의해 속속 무너지는 취약한 ‘초기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 때문에 이 단계에서부터 물리적 지원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정규직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정신적 측면’의 지원을 통한 반재벌 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주어진다. 양자는 모름지기 초기부터 긴밀히 결합되어야 한다.

    정규직의 이 같은 비정규직에 대한 지원은 정규직 운동 자신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도 물론 유리하다. 지금처럼 재벌 대자본의 정규직에 대한 대규모 정면공격이 시작되기 전의 상황에서, 현장 정파를 비롯한 선진 활동가들을 단련시킬 수 있으며, 대공장노조가 자신들의 문제에만 골몰하고 ‘노동귀족화‘ 한다는 사회적 비난을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이후 사측의 본격적 구조조정이 시작될 때 이에 맞서기 위한 꼭 필요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그 같은 대규모 구조조정이 정작 현실화 될 때, 대공장 정규직들은 지금과는 달라진 우호적인 여론 속에서 ‘총파업’ 과 같은 강력한 수단을 동원해 마음껏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록 선진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지원일지라도, 대공장 일반 조합원들에 대해 사전교육의 효과도 거둘 수 있게 한다. 표면상의 사내 평온에 젖어 전투 준비를 게을리 하는 안일한 자세에서 벗어나, 이들에게 다가오는 투쟁을 위한 심리적 무장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라는 점, 현 한국 재벌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 그 유일한 해결책은 소수 재벌총수에 의해 점유된 거대한 생산수단을 전 민중적 소유와 통제로 바꾸는 것이라는 점 등을 대자보와 소식지, 또는 노조 정규교육의 기회를 통해 조합원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조합원 대중들에게 비정규직 투쟁의 지원을 위한 ‘현장실천대’ 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 재정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에의 동참 등 구체적 행동을 호소할 수 있다. 평소 이 같은 비정규직과의 연대 경험의 축적 없이 막상 적들이 구조조정이란 칼을 빼들었을 때 그 때 가서야 사상과 조직 준비를 하려고 하면 때는 이미 늦는다.

    2004년 현대차 의장1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 집단 가입 모습(사진=울산노동자배움터)

    이하에서 현대자동차 사례를 통해 현대차 비정규직 운동이 본격 궤도에 오르기까지의 초기 정착과정에서 정규직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하는 다음 두 자료를 참조함. [1]현장투, “이제 현자노조는 노동형제들에게 죄인입니다!”―2005년 현대자동차 투쟁평가서, 2005.10.12. [2]현대자동차 비정규직회 3공장 대의원, 현장위원 교육자료, “현대자동차 1사1노조 쟁취는 불법파견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 사내하청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투쟁의 중요한 교두보이다!”, 2012.5.25.)

    2002년과 2003년은 현대차 비정규직 운동이 태동하는 시기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현실은 한마디로 무법천지였으며 하도급업체 사장의 천국이었다. 연월차, 상여금, 잔업, 특근 시 통상시급 적용 문제 등 하나도 지켜지는 것이 없었으며, 사내하청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월급 명세서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파견근로였기 때문에 업체사장은 업체 전체의 라인의 공수와 돌아간 시간을 곱해서 그 총액을 현대차로부터 받아오고, 하청노동자들에게는 자기가 알아서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불법 부당대우 문제는 하청노동자들의 끊임없는 이직을 불러와서 비정규직노조 창립 당시에는 근무기간이 1년이 넘은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정규직 조합원들 역시 잠시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그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현대차 비정규직들의 상황이 오늘날의 반월·시화, 대구성서공단 등 전국 주요공단의 비정규직들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불법 부당한 대우와 그에 따른 상상 이외의 저임금이 폭로되면서 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활동가들이 이들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2003년 3월 19일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한 명이 병원에서 업체 사장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받아 아킬레스건을 잘리게 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정규직 활동가들이 사내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5월 2일 ‘현대자동차비정규직투쟁위원회’가 만들어지고, 7월 8일 마침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 창립총회가 5공장대의원회 사무실에서 열리게 되었다.

    설립 당시 발기조합원은 128명 정도이었으며, 위원장으로는 ‘비정규직인권선언’을 발표한 안기호씨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가야 할 긴 여정의 첫 출발에 불과하였다. 대략 1만여 명에 이르는 전체 비정규직 수에 비하면 가입 조합원 수가 매우 미미하였으며, 비정규직 대중들은 여전히 회사의 눈치를 보면서 감히 가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비정규직노조가 점차 가중되는 회사 측의 탄압에 맞서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정규직들의 계속적인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적절한 계기를 포착한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대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필요성이 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그 계기가 찾아오게 된다.

    2004. 9. 22. 금속연맹과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등이 공동으로 노동부에 제기한 불법파견 집단진정 (일명 5.27’ 집단진정)에서 노동부는 이들의 고발 내용을 모두 인정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대차 불법파견 철폐투쟁이 본격화되는데, 이후 그 투쟁은 ‘장엄하고 완강’하게 진행되었다. 2005년 1월부터 5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은, 1월 19일 5공장 탈의실 점거농성 투쟁으로 결사항전의 대오를 구축한 후, 이후 235일간이라는 장기간의 농성투쟁을 벌이게 된다. 현자노조 역시 1월24일 정기대의원대회를 통해 ‘불법파견 원하청 연대회의‘를 구성함으로써 정규직 노조의 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형식 틀이 갖추어지게 된다.

    현대자동차 사측이 불법파견 특별교섭을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서 상기한 ‘원하청 연대회의’는 5월 31일 8차 회의에서 비정규직 조직화 방침을 결의한다. 6월 17일까지 사업부 공동투쟁단을 구성하여 6월 중에 집단적인 가입 방식에 의한 비정규직노조 지회로 조직화한다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에 앞서 노조는 그 전 해인 2004년 6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노조 조직력 강화 및 확대를 위한 조합원 가입 운동을 전개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또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선거구별 대소위원이 주축으로 비정규직을 모아내고, 비정규직 노동조합 간부들이 설명회를 개최하며, 그 과정에서 원하청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집단가입을 유도한다”고 결의하였었다. 이제 본격적인 실행에 들어간 것이다.

    이리하여, 6월 9일 1공장 의장1부에서 정규직 대의원회 주도로 처음으로 비정규직노조 집단 가입을 받았다. 의장1부부터 시작된 집단가입은 21일 의장3부, 22일 의장2부로 이어졌다. 의장1부 총 396명의 비정규직 중 244명(가입률 62%)이 가입했으며, 22일에는 도장1부에서도 30여명의 조합원이 가입했다. 이밖에도 1,2,3공장 도장, 차체 등 비 의장 부분, 4공장, 5공장, 변속기, 시트사업부 등 곳곳에서 집단가입을 조직해 7월7일 현대 울산공장에서 총 2002명으로 비정규직노조 조합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아산지회 300명, 전주지회 600명까지 포함하면 3000명에 육박하는 조직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지난 2년간의 모진 탄압을 뚫고 버텨온 비정규직노조는 드디어 튼튼한 대중적인 토대를 갖추게 되었으며, 향후 불법파견 철폐투쟁의 태풍의 눈으로 대두되게 되었다. 조합원 집단가입으로 투쟁의 진지를 확보한 비정규직노조는 새롭게 가입한 조합원까지 포함한 대의원선거를 치룬 후, 7월 20일 파업찬반투표를 실시해 투표자 대비 92%(재적대비 61%)의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하면서 본격적인 투쟁국면으로 진입하였다.

    이렇듯 뜨겁게 타올랐던 2005년 비정규직 투쟁은 비록 이상욱 노조집행부의 회사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로 소기의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 때 남겨진 불씨는 결코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2010년 대법원의 불법파견 확정판결을 계기로 다시 한 번 타올라 마침내는 2014년 사측으로부터 단계적 정규직화라는 약속을 받아내게 된다.

    이상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현대차 비정규직노조가 독자적으로 설 수 있기까지에는 정규직 노동자 특히 대의원, 현장위원(소위원) 등을 비롯한 선진 활동가들의 역할이 대단히 관건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당시 어용적인 이상욱 정규직노조 집행부의 철저한 외면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비정규직 투쟁을 함께하였으며, 이들의 적극적 동참이 있었기에 노조를 그 정도나마 견인할 수 있었다. 정규직 대의원과 현장위원들은 사업장별로 비정규직의 집단적 노조 가입이 가능하도록 사측과 관리자들의 방해로부터 현장을 지켜주었다.

    이 밖에 5공장 농성장을 함께 사수해준 5공장의 대·소위원들, 2월부터 5공장 농성장에 합류해 끝까지 함께했던 윤성근 전 위원장, 현장투 등 제 정파조직 동지들, 각 사업부 소위원 동지들, 당시 소위원으로 비정규직 잔업 거부 시 라인정지로 해고당한 3공장 강병태 동지(이 동지는 이후 비정규직 해고 동지들과 함께 원하청 해복투를 구성한다) 등 이들의 지원투쟁은 2005년 현대차 비정규직투쟁이 불꽃처럼 피어오를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지금까지 현대차 사내하청과 관련한 비정규직 투쟁만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지만, 만약 정규직 활동가들의 의식상 전환만 이루어진다면 그 밖의 사외 하청계열사의 지원투쟁이나 다른 업종에 대한 지원투쟁으로의 확대 발전도 얼마든지 가능하리라고 본다.

    소결. 우리는 글머리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풀기 위해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경우 비정규직으로부터 시작할 경우 이들의 영세성과 고립분산성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낮은 계급의식이라는 장애 때문에 문제 해결이 오히려 더디어 질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비정규직노조가 일정 정도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의 초기 과정이 관건적이며, 이 때 대공장 정규직의 지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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