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해방운동 이어받은
    민주화운동과 양동교회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목포'
        2018년 05월 10일 11: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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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로 가던 4월 29일 오전 8시, 용산역 대합실에서 TV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와 창성동 주민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다가 울컥하였습니다. 평화와 통일의 부푼 꿈에 기차 차창으로 보이는 신록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에서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이 매년 역사인문기행을 하는데 이번에는 목포였습니다. 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이 남북정상회담을 추동했다는 점에서 시기와 장소가 잘 맞았습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중략)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일제가 남도의 곡창지인 나주평야의 쌀을 수탈하고 일본 공상품을 보급하기 위해 목포를 개항하여 억압하였고, 후에도 계속 소외당했던 목포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용산’이란 노래도 많이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2절)  

    문화해설사를 따라가니 목포여자고등학교 교정에 ‘부용산 노래비’가 있었습니다. 박기동 선생이 누이동생과 제자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애달파 시를 지었는데,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음악교사 안성현 선생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안 선생이 한국전쟁 중 월북하여 공훈예술가가 되는 바람에 ‘부용산’이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빨치산 노래였다는 이야기는 와전이고, 가수 안치환도 부른 ‘부용산’의 2절 가사는 2000년, 52년 만에 박기동 시인이 호주에서 보내왔답니다.

    일본 관서대학 영문과를 나온 박 시인은 지식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시대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문학청년의 길을 걸었습니다. ‘부용산’을 쓴 좌경인물이란 이유로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아 수차례 가택수색으로 시작노트를 압수당하자 시인은, 1993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답니다.

    이튿날 아침 세월호가 누워있는 목포 신항으로 갔습니다. 어제 해설사가 목포를 ‘<목>놓아 우는 사람을 <포>근히 감싸는 곳’이라고 풀었듯이, 목포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세월호를 품고 함께 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어지는 마음을 아는지 세월호는 뿌연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 기행에서 제114호 등록문화재인 양동교회가 돋보였습니다.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직접 날라온 응회암으로 축조한 아름다운 석조건축물입니다. 양동교회는 목포가 개항하던 1897년 3월 5일,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오웬 선교사는 프렌치 병원을, 스트래퍼 선교사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제시대 양동교회는 호남선교의 산파역을 하며, 목포지역 신문화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견인하는 구심체였습니다.

    목포 양동교회(그림=이근복)

    1909년에 부임한 4대 윤식명 목사는 호남지역 첫 한국인 위임목사로서 자립하고 교회체계를 갖추었습니다. 1910년 가난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하여 지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예배당에 1929년에는 1,000명이 출석하였다니, 5,000명에 불과했던 목포인구의 1/5이 출석한 것입니다. 제8대 이경필 목사와 교인들은 목포3.1혁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민족교육의 결과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4월 8일에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드러났습니다. 계속된 시위로 200여명이 검거되고 담임목사 등 100여명이 구속되었습니다.

    1926년에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일본과 천황을 비판하는 설교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목포경찰서에 수감되었습니다. 1년형을 확정받고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 중 모진 고문 끝에 1944년 2월 두 눈을 부릅뜬 채 동사하였습니다. 이남규 목사는 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에 맞서 교우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으로 선출되자 교회를 떠났고, 나중에 초대 전라남도 지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공직을 마치고 다시 겸허히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돌아왔기에, 그는 민족을 목회한 ‘牧民목회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석조예배당의 남성들이 출입하던 좌측문 석재아치에 ‘大韓隆熙四年’이란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가 있고 중앙에 태극기 문양이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에서 어떻게 태국문양이 보전되었을까? 등나무 넝쿨이 일본 경찰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여성들이 출입하던 우측문 아치에는 ‘쥬강생구백십년’(주후 1910년)이란 한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 시무하는 최병기 목사의 안내로 들어간 1층에는 오래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지금도 사용하는 2층 예배당은 108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온전하였습니다. 2017년 선교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태국의 가난한 동네에 세웠다고 최 목사님이 보여준 교회는 참 소박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제11차 역사인문기행에서 목포지역민주화운동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남도의 민족해방운동을 선도한 목포답게 70, 80년대에 활발하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교인들은 물론 목회자들까지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까닭에 교회의 위상이 높았다고 합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이를 지지하기 위해 많은 시위를 하였고 탄압도 심했습니다. 지금은 광주 성광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 박상규 목사는 목포대 2학년 때, 목포시민민주화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항거를 이끌다 계엄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기행 끝 무렵에 간 곳은 ‘안철 선생 안집비’이었습니다. 70-80년대 기장교회청년운동을 세우고 목포의 민주화운동, 특히 5.18 민중항쟁을 주도했던 안철 장로가 운영하며 수없이 대책회의를 가졌던 집 앞에 작은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5월에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아름다운 역사를 되새기며 현재를 성찰하고 평화와 통일을 길에 적극 나서길 소망합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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