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재벌 투쟁과 비정규직 투쟁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⑤]기본모순과 주요모순
    2018년 05월 03일 10: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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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재벌문제, 한국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2”

앞 글에서 현 한국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은 재벌문제이며, 그것은 대외 의존적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상징하는 ‘재벌체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 때문에 재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한국의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이는 정식으로 ‘反재벌투쟁’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과제는 우리의 원래 출발점이었던 ‘비정규직 투쟁’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이번 글에서는 한국 변혁운동에 있어 반 재벌 투쟁과 비정규직 투쟁 상호관계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자는 전체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의 관계에 있다.

당면 변혁단계 기본모순으로서의 ‘재벌문제’

우리는 현실의 비정규직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본질로서 ‘재벌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재벌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는 본질과 현상,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전체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양자는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의 관계를 형성한다.

재벌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의 긴밀한 상호 관계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차별성을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양자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으며, 비정규직 투쟁을 곧바로 ‘반재벌 투쟁’으로 대치시킬 수도 없다. 만약 ‘정규직화’를 바라는 초보 수준의 비정규직 대중에게 처음부터 그 본질인 ‘반재벌 투쟁’을 제안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대부분 꽁무니를 빼고 말 것이다.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재벌 문제는 한국자본주의 전반의 축적체제와 관련된 문제이며, 당대 한국사회 성격 전체를 규정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비정규직 문제는, 비록 그것이 지금 한국사회에 있어 중차대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것은 ‘특정 부분’ 문제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 같은 부분영역에서 투쟁이 발생할 경우, 그것은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만 전체 투쟁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렇듯 양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 또는 본질로부터 현상된 관계로써 범주 층차가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反재벌 투쟁’의 위상은 한국사회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당면 변혁단계와의 관련 속에서만 올바로 위치 지워질 수 있다. 즉 그것은 후기 신식국독자 단계에 들어선 한국사회에 있어 ‘기본모순’을 규정하며, 이 모순은 극소수 재벌 총수집단에 집중된 경제력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광범위한 민중과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반재벌 투쟁은 이 단계의 최고 수준의 투쟁에 위치하며, 다른 모든 투쟁은 그 하위에 배치되고 수렴되게 된다. 이하에서 이 점을 좀 더 설명하도록 하자.

주지하다시피 한국사회는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그 경제와 정치 및 사회 전반에 있어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사회성격의 변화에 따라 그 기본모순 역시 변화되었다. (참고로 여기서 기본모순이라 함은 당면 변혁단계와 관련된 것이며, 자본주의 전체를 놓고 본 기본모순과는 다르다.) 그전까지는 ‘반독재 민주화’가 주요한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이후부터는 ‘반 재벌’이 주요한 것이 되었다. 기존에 군사파쇼 정권이 모든 영역에서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았듯이, 이때부터는 재벌체제가 그 같은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에 조응하여 이 단계의 최상위 투쟁으로서 반재벌 투쟁이 위치지워지게 되며, 그것은 과거 반독재투쟁의 위상과 똑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이전까지는 많은 문제가 주요하게는 ‘민주화’ 문제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노동자, 재야지식인, 청년학생, 종교계, 농민 등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였는데, 왜냐하면 이들이 무슨 일을 할라치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가 나서 탄압하고 가로 막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각 부문의 주체들은 이것을 먼저 제거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대항해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기본 조직인 노조를 하나 만들고 싶어도 그러하였다. 이 시기엔 이 같은 노조 결성조차도 ‘반공’ 의 이름아래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처럼 언론, 결사, 사상의 자유가 심각하게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는 노동운동은 제대로 성장하기가 힘들었다.

또 농민이 추곡수매가 인상과 농가부채 탕감을 요구할 때도, 학생들이 자치조직으로서의 학생회 부활과 학내 민주화를 요구할 때도 그러한 탄압에 직면하여야만 하였다. 문인과 언론인과 예술인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그러기에 이들은 민주화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투쟁 대상을 ‘군사독재’로 설정하고 그것의 타도를 위해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넘어서 반독재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같은 개발독재가 추진한 국가 주도 하의 경제개발의 종착점은, 알다시피 독점자본의 한국적 형식인 재벌 주도하의 경제 즉 재벌체제의 수립이었다. 따라서 군사독재는 지금 와서 본다면 재벌체제의 탄생을 자신의 역사적 사명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군사독재는 자신의 이 같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경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영세상인을 착취하고 수탈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모두 ‘빨갱이’, ‘불순분자’, ‘반유신세력’으로 몰아 부치면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였으며, 그 결과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거친 후 1980년대 전반 한국에 마침내 재벌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간 한국 민중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군사독재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성공리에 끝마쳤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군사독재는 역사 무대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한국 변혁운동에 있어 민주주의 과제도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퇴장은 ‘재벌체제’의 탄생이라는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한 다음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재벌 문제는 한국사회 곳곳에 침투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재벌 문제와 무관한 사회 문제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선 한국의 재벌들은 ‘글로벌 경영’이라는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여전히 기본적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기반으로 함으로써 비정규직을 양산시키고 있으며, 천문학적인 가계부채 누적이 말해주듯 서민대중의 몰락을 가속화시킨다.

재벌체제는 또한 한국의 각종 비리의 온상이자 공적 체계를 무너뜨리고 비선조직의 번성을 낳는 비옥한 토양이기도 하다. 최근 국내정세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탄핵정국의 직접적 계기가 된 ‘최순실 사건’도, 그 성격 면에서 보면 일견 ‘측근비리’에 불과한 것 같지만, 좀 더 그 근원을 캐보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심각한 소수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 문제가 있다. 외환위기 이후 살아남은 상위 재벌들은 자신의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계는 물론 사법·관료·언론·문화계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전반에 소위 ‘재벌장학생’을 육성할 정도로 무소불위한 힘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 같은 재벌체제야말로 비자금 조성, 탈세, 뇌물공여, 회계조작, 정경유착 등 갖가지 부정부패와 범죄의 온상이 된다. 그 밖에 청년실업 문제, 교육 문제, 심지어는 최근 대두되는 성차별 문제까지도 그 어느 것 하나 재벌문제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또 재벌체제의 문제는 국내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그것은 민족 전체의 이익을 도외시한 채 예속적인 한미동맹을 맹목적으로 추종케 하는 강력한 물적 토대로 작용한다. 금번 사드 배치로 중국과의 갈등을 야기시킨 배후에도 이 같은 재벌체제가 존재하고 있다. 재벌체제는 국내시장 잠재력을 키우기보다는 반대로 고갈시키고 한국경제를 심각한 대외 의존적 경제로 만드는데, 이 같은 재벌들이 이끄는 한국경제의 암담한 전망은 국내 보수통치세력으로 하여금 ‘안보논리’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그간의 G2에 대한 균형외교를 포기하고 한미동맹에 모든 것을 걸게 하는 ‘투기적 외교’ 전략을 선택하게끔 만들었다. (본인 레디앙 기고, [국제정세에 관한 연재를 마치며] 참조)

이처럼 1970-8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통해 군사독재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사회진보가 불가능하였듯이, 지금은 재벌체제의 타도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국사회의 진보와 노동운동을 비롯한 전체 변혁운동의 진전은 꿈꿀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발견하고 그것을 확신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이렇듯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기본모순이 분명히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저항세력과 노동운동은 그간 이 같은 사회 변화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함으로써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을 잠시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재벌 문제에 대한 비판은 간혹 존재하였지만, 그것들은 모두 전면적인 재벌체제에 대한 비판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며 부분적이거나 일과적인 것에 그쳤다. 사실 재벌이라는 존재는 1950년대부터 한국사회에 존재해왔다. 이 때문에 지금 시기 그것을 다시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일은 오히려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듯이 재벌 또한 그간 상당한 변화를 겪어 왔다. 간략히 개괄하면,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거친 후 1980년대 전반 초기적인 재벌체제가 성립하였다. 그 이후 1990년대 들어서 많은 재벌들이 금융적인 독립을 달성함으로써 정식으로 ‘금융자본'(이는 레닌식 정의로서 ‘산업자본+금융업자본’을 뜻한다)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로부터 정부의 손아귀에서 거의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IMF 위기를 거친 후 살아남은 소수 상위재벌들을 중심으로 더 큰 경제력 집중을 이룩함으로써 ‘재벌과두체제’가 성립하였으며, 이로써 마침내 국가권력까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이렇듯 2000년대 이후 재벌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재벌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제 재벌들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언론·종교 등 한국사회 전반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거대한 권력집단이 되었다. (한국 재벌체제의 진화과정에 대해선 다음에 별도로 다룰 생각이다.)

이렇듯 비록 재벌 문제가 1990년대 들어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이 되었음에도 한국의 변혁운동세력이 제대로 그것을 짚어내지 못한 원인에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재벌체제의 본질이 최대한 발산되지 못한 측면이 존재한다. 본질의 외화를 위해서는 IMF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되고, 그들의 투쟁을 통해 한국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전면에 대두되는 일이 필요하였다. 마치 맑스와 엥겔스가 1820년대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자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을 시작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이점이야 말로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의 인식에 미친 중요한 공헌이라 할 수 있다.

당면변혁의 주요모순으로서의 ‘비정규직 문제’

한국의 재벌들은 1987년 대파업을 경험한 이후 자신들의 기존의 대노동 전략을 대폭 수정하고 ‘신경영’ 전략을 채택하였는데, 마침 전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를 통해 그것을 교묘하게 위장하였다.(제4회 연재 참조) 신경영 전략은 이후 권력의 엄호 하에 한국의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비정규직 문제’는 그리하여 오늘날 매우 집중적이고 충분하면서 성숙된 모습으로 한국사회에 출현하게 되었다. 그 말은 한국의 재벌체제가 이 같은 비정규직에 의지한 축적구조를 고도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다시 다른 방식으로 교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비정규직에 의존한 새로운 축적방식은 이미 불가역적인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한국 재벌과 보수통치세력의 단견과 우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정도도 모자라서 ‘더 기업하기 좋은 사회’, ‘더 많은 노동유연화’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것은 한국이라는 후기 신식국독자 사회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대외 의존적인 종속적 발전을 여전히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한국 재벌로서는, 1987년 이전처럼 군사독재에 의거해 직접적 수탈과 착취를 감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정규직제에 의거하는 경영전략을 선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모든 본질은 현상을 통해 자신을 발현한다.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재벌체제라는 본질의 더할 나위 없는 적절한 발현 형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의 진보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은 그간 ‘신자유주의’의 외투에 가려 이 같은 재벌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 간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제 한국사회에 충분히 만연된 비정규직 문제를 통하여 한국의 기본모순이 ‘재벌문제’임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비정규직 문제가 재벌체제로부터 발현되는 주요모순이라는 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 재벌의 축적방식과 긴밀한 내적 연관을 갖는다. 1987년 대투쟁을 경험한 후 기존처럼 군사독재의 힘을 빌려 노골적인 탄압을 통한 초과착취를 계속할 수 없게 된 재벌들은, 1990년대 들어 소위 ‘신경영’ 전략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함으로써 기존의 저임금·장시간에 기초한 축적을 변형된 방식으로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이점은 지난 호에서 충분히 설명하였다.

둘째,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사회 최대 계급인 노동자계급의 절대 다수의 문제가 되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이미 2000만 명에 육박하는데, 그중 비정규직은 그 절반이 넘는 56~60%의 비중을 차지하면서 수적으로는 대략 1100만 명에 이른다. 이는 단일 사회계층으로서는 최대이며, 이들의 문제는 곧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셋째, 사회 전반의 빈곤화와 빈부격차의 심화, 이로부터 계층 간 갈등의 가장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절반 내지 그 이하의 임금과 심한 차별대우를 받는다. 또 이들은 4대 보험 등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위치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복지수준을 현격히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점점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수많은 비정규직 때문에 한국사회의 갈등과 불안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넷째, 한국의 재벌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해서 기타 사회문제를 한층 증폭시킨다. 예컨대, 교육과 청년실업 문제가 그러하며, 남녀 성차별 문제 역시 그러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는 청년실업의 주요한 원인인데, 그것은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하여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또 이 같은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은 일찍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려야 하는데, 이는 다시 복잡한 교육 문제를 발생시킨다. 최근의 ‘미투’로 명명되는 성폭력 문제 역시도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직장 내 성폭력은 상 하급 간의 신분상 차이를 매개로 발생하며, 정규직 상사와 비정규직 하급자 간의 심각한 차별은 그 같은 성폭력이 보다 손쉽게 발생할 수 있게끔 한다.

이렇듯 한국사회의 당면한 제반 현안 문제들이 본질적으로는 재벌 문제에 기초하면서도 그것이 막상 현실에서 표출될 때는 많은 경우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비정규직 문제를 현 단계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으로 규정한다고 할 때 그것이 실천적으로 어떠한 의의를 갖는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미 앞서 서술한 대로 그것을 통해 기본모순인 재벌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던 측면 외에도,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 재벌 문제 해결을 위한 통로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즉 그것은 재벌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과 해법 또한 제시한다는 것이다.

첫째, 재벌체제를 무너뜨릴 1100만 명에 이르는 가장 큰 ‘반재벌’ 주체를 제공한다. 이들은 현 재벌체제 하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생존의 위협과 고통을 받는 존재들이며, 이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반재벌 투쟁의 주력군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비정규직은 장차 한국의 재벌체제를 끝장 낼 ‘무덤 파는 자’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사회에 수많은 계급 갈등의 불씨를 뿌리며 또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든 폭발하게끔 만든다. 재벌이 초과 착취와 수탈의 수단으로 비정규직 제도를 도입한 만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은 매우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일을 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들은 도저히 생활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며,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조를 결성하는 등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찾고자 한다. 다른 한편, 재벌의 입장에서 볼 때도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 움직임을 수수방관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만약 그들의 조직화를 그냥 방치할 경우, 결국 애초 자신들이 비정규직을 도입한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이리하여 많은 하청 비정규직들은 일감몰수, 노조파괴, 계약사업주 교체, 하청매각, 재입사 등과 관련한 다양한 형태의 원청 재벌 대기업의 막후 개입에 직면하게 되며, 재벌 혹은 그들 대리인인 하청업체에 맞서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한국의 비정규직 운동이 갖는 한 가지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의 ‘한 발짝 전진’이 힘든 만큼 반대급부로, 이 투쟁으로부터 훌륭한 투사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비정규직노조를 설립하고 자리 잡게 하는 투쟁은 지역과 공단을 오가는 수많은 선전전과 자택 방문, 장기간 농성, 근로자지위 확인소송과 같은 법정투쟁 등 온 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야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조합원 한 명 한 명은 잘만 훈련된다면 모두 훌륭한 반재벌 투사로 변신할 수 있다.

둘째,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대공장 정규직 투쟁을 비롯한 각 사회영역에 흩어져 있는 광범위한 반재벌 투쟁 역량을 응집시켜 낼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지 비정규직 내부 문제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정규직운동의 활성화와 반재벌 투쟁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낳는다. 먼저 한국의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부터 살펴보자. 우선 그것은 한국의 대외 종속적 축적체제 하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절대 안심할 수 없는 불안정한 고용상황과 관련이 있다. 지구화에 따른 개방화와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급속히 확산되는 가운데서, 그간 국내 인적자원 투자에 인색하고 그 수탈에만 철저히 앞장서온 한국 재벌의 입장에선 앞으로의 유일한 생존 대책은 지금보다도 더 철저한 ‘노동유연화’의 관철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것은 앞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이와 관련한 정규직의 대규모 비정규직화를 의미한다. 이 같은 상황은 결코 먼 미래가 아닌 ‘아주 가까운’ 시기에 발생할 가능성이 크며, 이 때문에 한국의 정규직들은 장차 자신의 운명일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단사 현안 문제를 푸는 일과 관련해서도, 정규직은 비정규직 문제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가 있는 울산에선 재벌 대기업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일감을 계속해서 외주화 하고 있으며, 촉탁제와 정년제를 통해 정규직 줄여나가기를 지속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아마 다른 지역에서도 공히 나타나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이 때문에 임투와 단협 등 사내 문제에 있어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협상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사측은 조금씩 저수지 물을 빼내듯 정규직을 서서히 고사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지금부터라도 이들의 의도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이후 대공장 노조의 앞날은 매우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삼는 안이한 자세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은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 재벌체제 하에서 자본의 많은 전략이 비정규직 제도를 십분 활용하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에, 지금 시기 대기업 정규직 운동의 최대 현안문제는 다름 아닌 ‘비정규직 문제’라 할 수 있다. 아직 정규직 본대에 대한 자본 측의 정면 공격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지만 그 준비공작이 착착 진행 중인 상황에서, 오직 비정규직 문제에의 적극적 동참을 통해서만 정규직들은 이 같은 자본 측의 의도를 분쇄할 수 있다.

정규직들은 현실에서 또한 비정규직 문제에 동참할 수 있는 수많은 고리를 갖고 있다. 우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작업과정의 긴밀성을 들 수 있는데, 사내하청일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동일한 작업라인에서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동일노동을 하면서도 저임금과 부당대우를 받는 비정규직을 보면서 양심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 대기업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규직과 혈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의 막내 동생이거나 조카뻘인 경우가 그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신원확인이나 ‘뒷빽’ 때문에 연고를 중시하는 한국 재벌 대기업들의 전통적 관행과 관련이 있다.

이렇듯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평소 작업과정과 혈연적 관계를 통해 긴밀한 접촉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일단 비정규직과 회사 측이 충돌하게 되면 그것은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문제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2003년 3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발생한 테러사건이 그 좋은 예이다. 당시 사내하청 노동자인 송성훈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에서 업체 사장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 의해 아킬레스건을 난자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아산공장은 물론 울산의 비정규직 활동가, 정규직 조합원과 활동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주체들과 정규직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기폭제로 작용하였으며, 결국 그해 7월 비정규직노조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 필자는 사내하청의 예만 들었는데, 그것은 아직 외부 협력업체에 대한 적절한 사례를 발견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원청 대기업 정규직들의 적극적 노력만 뒷받침 된다면, 앞으로 그와 관련된 사례 역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정규직이 비정규직 투쟁에 동참하게 되는 다른 중요한 계기는 ‘체계’를 통해서이다. 1987년 대파업 이래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이미 ‘조직된 부대’로 변모되었다. 민주노총, 산별노조, 지역·업종노조 등 여러 형태의 상급단체가 존재하며, 이 때문에 단위 사업장 비정규직들이 일단 노조를 결성하게 되면 그것은 즉각 이러한 상급단체를 통해 다른 노조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상급단체는 자신의 하급조직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어떠한 형식으로든 그 책임을 분담하게 된다. 지금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와 구미 아사히 노동자들이 수년씩의 장기투쟁을 벌일 수 있는 것도, 배후에 바로 이 같은 상급단체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는 비정규직 투쟁이 여러 가지 계기를 통해 정규직과의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이 생각보다 많음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현실의 비정규직 투쟁은 점차 양 주력부대 즉 재벌과 대기업 정규직 혹은 민주노총과의 ‘대리전’ 내지는 ‘전초전’적인 성격을 띠어가게 된다. 현재 각지의 비정규직 투쟁이 완강하고 장기화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양 본대의 이 같은 대리전적 성격에 기인하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양 진영은 인적·물적 지원을 지속함으로써 보이지 않은 ‘기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한다. 이렇듯 싸움이 장기화하고 점차 확대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들 각각의 비정규직 투쟁이 비록 그 자체로서는 소규모일지라도, 그것이 함유하는 의미는 전국적 내지 전 계급적 쟁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어느 한쪽이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전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

예컨대 자본 측에서 일단 비정규직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면 그 사례가 점차 확산되어 마침내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비정규직에 대한 실패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정규직에 대한 통제까지도 실패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왜냐하면 비정규직의 확대를 통한 정규직 포위와 고사 전략은 현 재벌 경영전략의 요체인데, 그 작전이 결국 모두 실패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정은 노동 측에서도 비슷하다. 비정규직 투쟁이 하나씩 밀릴 경우, 그것은 곧 이어 좀 더 큰 규모의 투쟁과 대공장 전략사업장 투쟁에 있어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다. 더군다나 그동안 지역과 상급단체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어렵사리 인적·물적 지원을 수행해온 장기투쟁일 경우 그 후유증은 더욱 크다. 이러한 투쟁이 실패할 경우 주변의 사업장과 노동운동 전체에 미치는 심리적 타격이 적지 않으며, 이 때문에 장기투쟁 사업장은 더욱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비정규직 투쟁들이 양대 진영 간의 대결의 장으로 변하고 그 대리전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투쟁이 이러한 양상으로 전개될수록,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립 그리하여 그 실체인 재벌을 겨냥하는 반재벌 투쟁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 진다.

현재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투쟁이 그 같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싸움은 처음 용역업체와 학교재단을 상대로 한 청소노동자들의 몇 백 원 임금인상을 요구한 싸움으로 출발하였지만, 곧 사용주 측의 탄압으로 원직복직 요구가 가미되었다. 점차 투쟁이 장기화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현대중공업 재벌을 직접 타격하지 않고서는 4년째 접어들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 없다는 인식이 마침내 투쟁 주체와 지역단체들 사이에 팽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들이 내거는 슬로건이 달라지고 있는데, 그것은 학교 주변에 둘러친 그들의 플랭카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애초에 보이지 않던 “현대중공업재벌 해체하라!”와 같은 요구가 내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 내에서도 아직 추상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총파업’이 거론되고 있으며, 현대재벌과 총력전을 벌이기 위한 ‘울산지역공동대책위’ 결성이 추진되고 있다. 후자는 지역 내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역량을 총결집시키기 위한 조직적 준비이다.

비정규직 싸움이 장기화하고 이렇듯 판이 커져감에 따라, 주변의 개별 활동가와 ‘현장정파’들이 그들의 투쟁현장을 방문하고 연대를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분명 그간 단위 사업장 내부로만 국한되었던 그들의 시야를 외부로 돌리게 하면서, 그들이 노동운동 전체 판세를 제대로 읽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이에 따라 대공장 정규직 운동도 점차 기존의 수세적이고 타협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국면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비정규직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수록, 대공장 정규직들은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인식했던 반 재벌투쟁의 과제를 더욱 구체화할 수 있으며, 현 재벌체제에 대한 ‘전면적’ 폭로를 진행 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1990년대 들어 한국에서 신경영 전략이 출현한 이래로, 재벌과 정규직의 모순은 비정규직에로 점차 그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공장 정규직 노동운동의 전투성은 다소 약화되었는데,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데 있어서는 일정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할 필요성이 있다. 이 때 비정규직에 대한 지원투쟁은 정규직의 선진부대를 단련시켜줄 뿐만 아니라, 자본의 비정규직을 통한 정규직 약화전략을 저지함을 통해서 정규직 노동운동의 활력을 높여 주어 결국 반재벌 주체의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모두 합친 거대한 반재벌 주체의 형성이야 말로, 한국 재벌체제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극복케 하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우리는 비슷한 원리를 앞으로 반재벌 주체가 될 사회운동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한국 변혁운동 진영에는 환경, 평화, 복지, 여성, 청년, 교육 등 노동운동 외의 다른 많은 영역이 존재한다. 이들 영역의 주체들 역시 현재 한국사회 최대 현안이 된 비정규직 문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인 재벌문제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또 단순히 인식적 차원을 넘어서서 여기서도 부문 간 실질적 연대를 위한 주요 고리로써 비정규직 투쟁이 활용될 수 있다. 이들 각각 영역의 주체들은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동참을 통해 선진분자들을 훈련시키고 그 내부 분위기를 쇄신하게 된다.

이렇듯 주요모순인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한국사회 각 분야에 잠재된 거대한 반 재벌 에너지를 응축, 폭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집중이냐 분산이냐?

끝으로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를 논의해보자. 한국의 변혁운동은 그간 민주주의 과제의 일차적 완수와 함께 새로운 변모를 겪어왔는데, 반독재 투쟁으로 집결했던 대오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와 함께 환경·여성·소수자·평화 등 수많은 새로운 영역이 개척됨으로써 사회운동의 지평은 더욱 넓어졌으며, 다양화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지금은 진보세력들이 각각의 고유한 영역의 자리를 지키면서 ‘진지전’을 수행하는, ‘안정 국면’ 내지 ‘소강 국면’이 일정하게 펼쳐지고 있다. 작금의 이 같은 진보진영 내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필자가 반재벌 투쟁과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일견 시대적 흐름에 어긋나고 물정을 모르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같은 다양화가 한편으론 우리 운동 영역의 폭을 확대시켜준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파편화와 분산화라는 폐단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상황에서 여전히 그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부문운동에 매몰된 활동가가 스스로를 기만하기 위한 변명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실 운동의 다양화가 분산화와 파편화로 변질됨에 인해, 우리 변혁운동의 큰 약점으로 전화된 지는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선 진보진영의 지금의 다양성을 찬양하면서 운동 중심성을 부정하는 견해를 들어보도록 하자. 필자는 최근 백무산 시인의 글에서 마침 그 같은 견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잘 알다시피 1980년대에 치열한 전투적 정신으로 당시 한국 노동자계급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대변했던 사람이다. 여기 잠시 그의 글을 소개한다.

“시민사회의 진보는 또 현대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억압적인 국가체제에 억눌려 있던 사회는 다원적 사회로 발전하고, 노동과 자본 사이 계급적 모순 또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게 된다. 시민운동은 이제 어느 것이 중심이라고 말하지 못할 만큼 다양화되었다. 현대사회가 여전히 생산수단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인 건 맞지만, 모순의 발현 양태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중심 과제로 환원되지 않을 만큼 다중적으로 발전했다. 시민운동은 점차 다양하게 분화되어, 환경, 평화, 복지, 여성, 청년, 교육, 젠더, 소수자, 장애인, 인권 등 어느 것 하나 우리 삶의 질과 직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주요모순이 해결된다고 따라서 해결되는 부차적인 문제도 없다. 오히려 어느 한 운동에서 중심성을 내세우는 것은 다른 가치들을 훼손할 수도 있다. ” ([울산민족문학 15호], 백무산, <이제 노동자들이 시민사회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pp43-44. 고딕체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임)

위 글에서 백무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1970-80년대의 민주화 과제가 완수된 상황에서 이후 한국 변혁운동의 지형에 관해서이다. 이 글을 보노라면 과거 그토록 열정적으로 전투적 노동운동의 정서를 대변했던 시인이 왜 요즘 들어 노동이 아닌 시민사회의 예찬론자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은 오늘날의 한국사회 대립 구도를 억압적인 국가체제와 그로부터 자율성을 확대코자 하는 시민사회 간의 모순으로 설정한다. 이 때문에 갖가지 새로운 테마의 사회운동이 출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시민사회 영역을 넓히는 성과로만 보인다. 대신 이로 인해 우리 운동이 계속해서 파편화되고 힘이 분산되는 측면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다. 과연 지금 상황은 어느 것이 주요한 측면일까?

우선 위 인용문에서 시인의 견해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할 부분이 있다. 시인이 여전히 ‘주요모순’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눈길을 끄는데, 이렇듯 ‘주요모순’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그는 ‘중심성’을 부정한다. 이는 사실상 자기모순이다. 왜냐하면 주요모순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물의 ‘중심성’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처럼 중심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오늘날의 운동이 많은 부문으로 다양화 되었다고 했는데, 사실 과거에도 노동, 농민, 청년학생, 종교, 언론, 통일, 빈민, 문학예술 등 다양한 부문운동이 존재하였다. 지금 와서 몇 개 영역이 더 늘었다고 하여 그 때와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럼에도 한국 변혁운동은 그 당시 ‘민주화’라는 중심과제로 결집할 수 있었다. 이는 모순의 발현 형식이 다양할지라도 어느 시대에나 중심점은 있게 마련임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주요모순이 해결된다고 해서 부차적인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요모순의 해결은 당대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케 함으로써, 그 밖의 다른 모순의 해결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창출한다. 예컨대 우리는 과거 ‘민주주의’ 과제를 해결함으로써, 이제 비로소 ‘자본’의 과제를 본격적으로 제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현실에서 중심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앞서 언급했던 재벌 문제이다. 필자가 보기엔 최근 한국 변혁운동이 중심성을 찾지 못하고 점점 파편화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반재벌’이라는 공통의 전략적 매개물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비근한 예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우리나라의 성 격차지수는 145개국 중 115등이다. 이처럼 한국에서 성차별이 유독 심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사회에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 때문에 그러하며, 그 본질은 앞서 지적한 재벌 문제라 할 수 있다. 최근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도한 한겨레신문 기사를 보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겨레>의 ‘미투 보고’를 보고 자신의 사례를 제보해 온 여성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라는 신분상의 불안정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가해자는 승진이나 인사고과를 좌우하는 상사인 경우가 많은데, 피해자는 신분이 비정규직인지라 일반적인 경우보다도 더욱 쉽게 이 같은 직장 내 성폭력에 노출되게 된다는 것이다. (<유명인은 ‘사회적 형벌’이라도 받는데…홀로 우는 직장 ‘미투’>, 한겨레, 2018년3월23일)

이렇듯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이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재벌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은 비정규직 문제와 마찬가지로 각 부문운동의 방향 역시도 최종적으로는 ‘반재벌 투쟁’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문화예술운동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본다. 지금 이 영역에선 앞서 보았듯이 대체로 ‘시민사회’ 이론이 주류적인 문예이론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이 때문에 현재 문예 진영은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추구하는 ‘다양성’에 대한 예찬은 많은 대신, 현 한국사회의 심각한 현실 문제를 반영하는데 있어서는 어쩐지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과거 ‘타는 목마름’을 외치던 열정을 별반 찾아 볼 수가 없다.

오늘날 수많은 비정규직의 고통과 아픔은 한국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비정규 노동자들의 장기투쟁이 보여주듯 결코 과거 1970-80년대만 못지않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시민사회에 대한 예찬만으로는 과거의 그 같은 열정과 전투정신이 생겨날 리 만무하다. 결국 그 같은 전투성의 회복은 바로 한국사회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에 대한 올바른 재정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호에선 좀 더 구체적으로 반재벌 주체의 형성과 관련한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필자소개
과거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으며 사노맹 사건으로 3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 사회를 연구할 목적으로 16년간 중국 유학생활을 보냈다. 중국인민대학과 상해재경대학에서 각각 금융(학사)과 재정(석사)을 전공했고 최종적으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에서 레닌의 정치신문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7년 8월 귀국하여 울산에 정착해 현재 울산 평등사회노동교육원에서 교육강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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