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인-만들기' 아니라 '애인-되기'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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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15일 10: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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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양을 사랑하는 T군의 이야기. B전문학교 운동선수인 T군은 K양을 사랑하다 못해 K양이 통학하는 길가로 하숙까지 옮긴다. 그러나 T군은 도무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K양에게 보여줄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참다못한 T군은 귀가하는 K양을 자신의 하숙방으로 오게 하여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하는 K양 앞에서 갑자기 면도칼로 자신의 왼편 손바닥을 베어버린다. 새빨간 피를 흘리는 T군. 그는 속으로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만지면서 뜨거운 키스를 해줄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놀란 K양은 벌벌 떨고만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녀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 일을 고해바친다. 결국 이 ‘악마주의 연애’로 인해 T군은 파출소로 끌려 다니다가 학교도 그만두게 된다.

    이는 1931년 잡지 〈신여성>에 실린 기사 한 토막이다. 당대의 청년들에게 연애는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것이라고 경고하는 이야기였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들은 과도한 ‘피’의 수사를 펼치면서까지 연애편지를 주고받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은 저 세상에서라도 완성시킨다는, 낭만적 사랑의 극치였던 정사(情死)도 서슴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연애 = 청춘사업>이라는 명제가 여전함은 물론이고 “사랑하고픈 자여, 사랑싸움에 지친 자여, 실연의 아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자여. 캠퍼스로 오라. 이제 연애도 강의로 배운다”(한겨레 신문, 3월 22일자 기사 중에서)고 외친다.

    우리시대의 ‘연애’는 강의하고, 배우고, 시험치고, 학점으로 인정받는 공식적인 대상이다. 그런가 하면 군대에서도 “애인 만들기 & 멋쟁이 군인 되기 비법”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열고, 장병들에게 연애 비법을 전수하느라 열변을 토한다. 얼마나 어렵 길래 근 100년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도 아직도 ‘연애비법’에 통달하지 못한 것일까. 도대체 연애가 뭐 길래, 사랑이 뭐 길래.

    1900년대 이후 우리사회에서 ‘자유연애’는 근대적 가치의 코드였다. 연애는 개인이 자율적인 근대 주체임을 증명하는 길이었고, 그를 통해 자신의 삶에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른바 근대적인 기획으로서의 연애. 그러나 100년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여전히 연애는 학습이요, 법칙이며 배워야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연애가 학습되고 연애의 법칙을 따지는 한, 연애에는 기준이 있고 이상적인 모델이 엄연히 존재한다. 100년 전 이 땅의 신여성과 남성들에게 연애가 근대적 삶의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었다면, 도대체 지금의 모델은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이상적인 모델과 보편타당한 규칙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 곁에서도 연애를 빙자한 사건 · 사고들이 시시콜콜하게 매일매일 신문의 사회면이나 인터넷 뉴스를 장식한다. 나는 사랑하는데, 나는 이러한데 너는 왜 받아들이지 않냐. 눈물을 쏟아내고, 절규하고, 그리고 폭력을 행사한다. 죽음까지도 마다치 않는다. 아직도 우리는 ‘연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그리고 개인의 삶은 지역, 계급, 인종, 연령 심지어 현실과 사이버의 경계도 넘나들고 있는데 ‘남녀관계’의 법칙은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남성과 여성의 성차가 시대나 사회와는 무관한 근원적인 토대에 놓여있는 것일까.

    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연애는 없다. 그럼 무엇이 있냐고? 자신의 관계들을 다시 더듬어 살펴보라. 다양한 경우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장차 남편/아내라는 이름을 얻든, 친구로 남아있든, 동성이든, 이성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관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관계마다 내가 자리 잡은 좌표를 파악하고 그와의 관계 항들을 재조정해야한다.

    내가 타자와 관계 맺는 순간 나또한 나의 주체됨을 무너뜨리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재규정되어야 한다. ‘애인-만들기’가 아니라 ‘애인-되기’여야 한다. 이는 앤서니 기든스가 역설한 사적 영역의 친밀성, 의사소통으로서의 관계 지향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차이를 동일성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파시즘적 사유를 경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연애는 없다. 상대를 유혹하거나, 꾐에 빠지지 않는 비법은 없다. 나와 다르고, 내가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 그를 통해 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관계, 그것이야말로 사랑에 도가 트인 자의 방식이다. “오~ 놀라워라~ 오~ 새로워라~”는 노래구절처럼 그야말로 다시 태어나는 내 모습과 매순간마다 마주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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