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의 승리…정당 제역할 못해"
        2006년 04월 15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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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고용계약법(CPE)에 반대하는 프랑스 청년들의 투쟁이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이번 투쟁에 대해 국내에서도 여러가지 분석과 평가가 있었다.

    <레디앙>은 현지의 목소리를 통해 최초고용계약법 반대투쟁의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프랑스의 진보적인 노조 쉬드(SUD)의 베르벤느 앙젤리 국내담당 비서를 인터뷰했다.

    쉬드 체신통신노조(SUDptt)를 담당하고 있는 앙젤리 비서는 한국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지난 2000년에는 아셈(ASEM)반대 투쟁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2001년에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대우자동차노조의 활동가들로 구성된 ‘김우중 체포 결사대’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많은 도움을 준 바 있다. 다음은 이메일로 주고받은 인터뷰 전문.

    – 최초고용계약법에 반대하는 투쟁은 주로 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이미 고용이 보장된 노조가 이 투쟁에 결합한 이유는 무엇인가.

       
     
    ▲ 베르벤느 앙젤리 쉬드(SUD)국내담당 비서
     

    = 최초고용계약법이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노동자가 평생고용계약을 맺을 때 3개월 동안의 수습기간을 두고 있다. 최초고용계약법에 따르면 이 기간은 2년이 된다. 따라서 노조는 이와 같은 계약이 일반적인 관행이 될 것을 우려했다. 최초고용계약이 향후 몇 년 안에 유일한 고용계약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 프랑스에는 여러 개의 노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각각의 노총은 어떤 입장이었나.

    = 프랑스에는 5개의 노총이 있다. 모든 노총이 최초고용계약에 반대했는데 이유는 첫째, 정부가 노조에 묻지도 않고 혼자서 법을 만들고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청년들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의 노조에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 청년들의 투쟁력을 감안하면 어느 한 노조가 정부(의 최초고용계약법)에 동의해준다면 그 노조는 수년 동안 청년들을 신규 조합원으로 가입시키지 못할 것이다.

    노총들 사이의 차이점은 실천과 관련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규모가 크고 정부의 개혁에 종종 협력했던 프랑스 민주노조연맹(CFDT)은 총파업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반면 노동총동맹(CGT)과 노동자의 힘(FO)은 총파업을 결정했다.

    최초고용계약 투쟁 이후에 노총들 사이의 입장차는 더 두드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고용유연화, 직업교육 등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노총들 간에 많은 입장차가 존재한다. 이번 교섭에서 노동운동의 단결을 이뤄내고 노동자 단체, 실업자 조직, 청년 조직들과 함께 결정해서 통일된 입장을 제출해야 한다.
      
    – 최초고용계약에 대한 각 정당들의 입장은 어땠나.

    =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만이 최초고용계약법을 지지했다. 모든 좌파정당은 분명한 반대입장이었고 중도파 정당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당은 이번 투쟁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좌파, 특히 사회당은 지난 2002년 대선 이래로 침체됐고 지난해 유럽연합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부결된 이후 신뢰를 잃었다.

    – 언론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그리고 프랑스의 시민들은 시위와 파업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 이번 투쟁은 1월말에 서서히 시작돼 렌과 툴루즈 같은 소도시를 거쳐 파리에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언론은 두 달이 지난 다음에서야 이 투쟁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는 프랑스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는 신문과 방송의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시민들은 달랐다. 이 투쟁은 파업보다는 시위가 더 강력했다. 시위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부모로, 가족으로 참여했다. 예를 들어 몇몇 작은 도시에서는 3월28일과 4월4일에 있었던 두 차례 대규모 시위에 주민의 절반가량이 참여하기도 했다.

    – 극우적 정치성향으로 유명한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이 이번 투쟁의 수혜자로 비쳐지고 있다. 그가 유력한 대선후보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 달라.

    = 우파 진영에서는 그런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다음 대선에서 그가 당선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2년간 사회문제와 치안문제 중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현재 프랑스의 많은 정치인들이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 시라크가 지난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극우파 후보였던 르펜에 반대하며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전임 총리였던 라파랭은 유럽연합 헌법 국민투표 이후 하야했다. 빌팽 현 총리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려했지만 그렇게 할 수단이 없었다.

    반면 사르코지는 치안문제에 관한 한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는 청년, 이민자, 도시 외곽의 빈민가에 대해 극우적인 치안정책을 갖고 있다.

    – 우파 언론은 전복을 꿈꾸던 1968년과 비교해 지금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가 누렸던 권리를 계속 유지해 달라고 한다며 이번 투쟁을 폄하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번 투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프랑스 사회는 이번 투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 1968년에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청년과 여성에게 보장된 권리는 매우 적었다. 또한 프랑스 사회는 알제리와 다른 아프리카 국가 민중들의 독립투쟁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의 청년들은 사회를 완전히 바꾸고 새로운 권리를 얻고자 했다.

    지금 프랑스 청년들은 일자리, 사회적 긴장, 에이즈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이 부모들의 삶보다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을 원하고 있고 그것 자체로도 옳은 일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난 2002년 극우세력에 맞서 시위를 하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인 것도 모두 젊은이들이고 학생들이었다.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은 지속성을 봐도 매우 위력적이었다. 청년들은 3개월 동안 투쟁을 진행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투쟁을 중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투쟁을 통해) 개인주의를 넘어 우정을, 고립감을 넘어 단결의 힘을 발견했다.

    또한 청년들은 구세대에게, 노동조합과 정당에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그리고 이번 승리는 아주 오랜만에 거둔 승리였다. 최초고용계약은 노동자계급에게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노조 혼자만의 힘으로는 투쟁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이 젊은 세대가 지금의 투쟁을 계속 이어가면서 몇 년 뒤에는 프랑스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당신이 몸담고 있는 쉬드에 대해 소개해달라.

    = S는 연대(Solidarité)를, U는 단결(Unité)을, D는 민주주의(Démocratie)를 의미한다. 쉬드 체신통신노조에는 1만7천명이 가입돼 있다. 우체국과 프랑스텔레콤에서 쉬드는 CGT 다음으로 조합원이 많다.

    쉬드는 1988년 CFDT에서 떨어져나온 노조활동가들이 결성했다. 당시 병원노조 등에서도 우리와 같은 탈퇴노조가 생겨났다. 1995년 공공부문의 대규모 파업 이후 철도, 교사 등과 민간부문에서도 쉬드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노조는 ‘상호의존’(Solidaires)이라는 이름의 (정확히 말하면 총연맹은 아닌)전국적인 조정기구에 속해 있다.

    우리는 노동자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는 독특한 노조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속 조합원들의 요구뿐 아니라 전체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파업을 결정하거나 교섭을 한다.

    또한 우리는 실업자, 불법 이민자 등과 같은 비노동자 조직과의 연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최초고용계약 투쟁 동안 우리는 청년들과의 연대가 다른 어떤 노조보다 강했다. 다른 노조들은 청년들과 함께 하면 통제가 되지 않는다고 종종 생각했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제연대와 대안세계화 운동에도 결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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