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수엘라 개혁의 희망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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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15일 11: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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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수엘라의 정치 · 경제적 조건

       
     
    ▲ 라틴 아메리카 혁명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
     

    세계 최대 수준을 자랑하는 베네수엘라의 석유자원은 미국의 석유메이저와 국내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석유산업이 여타 산업 부문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 현상이 만연하게 되었다. 석유 수출로 유입된 해외 통화는 구매력을 증가시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국산품에 비해 저렴한 수입 공산품 · 농산품은 국내의 산업 기반을 잠식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는 역내에서 유일한 농산물 수입 국가이자 도시화가 가장 많이 진척된 국가가 되었다. 농업 쇠락에 조응하는 도시 빈민촌의 확대는 역설적이게도 1960~1970년대 석유 수익이 어마어마하게 증대한 결과였다.

    게다가 1980~1990년대 20여 년 동안 국제유가의 하락과 국제이자율의 상승은 석유수출과 해외금융차용에 의존하는 국가경제에 침체를 가져왔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겠다며 1988년 당선된 페레스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을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유화, 공공지출 삭감, 자유화, 탈규제 등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은 빈농들의 도시 이주를 촉진하고 실질임금을 하락시키고 비공식부문 노동자를 팽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연이은 은행위기로 대량의 자본도피에 직면해야 했다.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위기를 동반했고, ‘푼토피지 협약’ 이후 형성된 과두지배체제의 부패와 무능은 정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차베스의 집권과 반혁명, 개혁

       
     
    ▲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는 우고 차베스
     

    우고 차베스는 바로 이러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환멸을 느낀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1998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2년 봉기의 실패와 이로 인한 수감생활을 거친 뒤, 차베스는 전국순회운동을 통해지지 세력을 규합했다.

    그러나 과두 지배세력은 여전히 국영석유회사(PDVSA), 입법 · 사법부와 지방정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미디어에 대한 독점적 통제와 경제인연합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베네수엘라 노총(CTV), 고위 장교, 가톨릭과의 연계도 굳건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중간계급과 군부는 차베스 정권에 미온적이거나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집권 이후 차베스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기존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통해 제헌의회를 소집한 후 ‘볼리바리안 헌법’을 제정한 일이었다. 아울러 사법부를 개혁하고 토지법, 어업법 등 49개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반대세력의 역공에 대처하기 위해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써클’을 제창, 차베스 지지자들 스스로 10명 내외로 그룹을 지어 헌법에 대해 주변을 교육하고 구체적인 발안을 취하게 했다. 아울러 차베스는 PDVSA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재정을 증대시키고 이를 다시 빈곤 해결을 위한 자원으로 환류시켰다.

    그러나 49개 개혁법안이 제정되는 날에 맞춰 반대세력은 거대한 시위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시도했다. 급기야 2002년 4월 반대세력은 미국의 후원 하에 군사 쿠데타를 감행, 차베스를 일시적으로 축출하고 상공회의소 의장인 카르모나를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옹립했다. 빈민층을 중심으로 한 차베스 지지자들의 대규모 시위와 군부 내 반발, 주변국의 불신임 등으로 쿠데타는 이틀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2002년 말부터 근 반년 간 반대세력은 총파업과 사보타지(태업)를 완강하게 진행함으로써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차베스의 강력한 지도력과 석유 부문 노동자 등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반대세력은 두 번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쿠데타와 총파업, 사보타지의 결과, 베네수엘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국민소환투표가 시행된 2004년 8월까지, 1년 반 사이에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환경은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경제는 10% 이상 성장 중이었고 국제 유가는 기록적으로 상승했으며 이로 얻어진 소득은 사회복지사업으로 투입됐다.

    미시오네스(Misiones, 미션) 프로그램을 통한 무상의료 · 무상교육의 확대, 친차베스 조직의 전국적 확산, 사회운동의 성장은 국민소환투표는 물론이고 1년 뒤 벌어진 총선에서도 차베스 정부와 여당을 압도적으로 재신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차베스 개혁의 한계

       
     
    ▲ 카라카스 시내를 가득 메운 볼리바리안 혁명의 물결
     

    이 과정에서 차베스가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규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볼리바리안 혁명’은 여전히 모호한 측면이 많다.

    첫째, 차베스는 기존의 외채상환을 지속하고 외채지불정지 같은 조치는 없을 것으로 약속했다. 또 기존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재산, 특권, 부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도 없을 것이라고 반복했다. 게다가 이들과 극심한 계급 갈등을 거치면서도 최소한 정부 수준에서는 소유관계 또는 계급관계의 파열이 없었으며, 외국인 채권자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원유 고객들과의 어떠한 관계 단절도 없었다.

    둘째, 국내외제적으로 차베스의 업적 중 상당부분이 석유수입에 의존한 결과라는 점도 분명하다. 석유부문을 제외하면 사적 투자는 고갈 상태이며 예년 수준으로 유가가 하락한다면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다.

    다만 세계경제는 당분간 현재의 유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차베스의 집권 기반도 큰 수준에서 현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차베스가 석유산업의 대미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며 국유화․민족자본 육성, 투자 및 판로 다각화에 나서고 있지만, 이것이 미국과의 급격한 경제적 단절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셋째, 차베스의 개혁정책 중 가장 급진적이라고 평가받는 토지개혁도 대지주의 토지소유권을 사실상 인정하고 그 일부가 징수되더라도 토지소유자들에게 시장 가격으로 배상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다. 토지귀족들의 법적 회피나 토지 등기부의 부실, 총체적인 법의 불비와 불처벌 관행, 취약한 농민 조직, 빈약한 농촌 지원 구조 등은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장애로 지적되고 있다.

    넷째, 여권을 구성하는 정당들은 이념적으로 대단히 불균등하며 그 통합력도 미미하다. 베네수엘라에는 강력한 좌파 정당의 전통이 부재했고 노동자운동 등 대중적 사회운동은 대개 취약했다. 그 결과 차베스 개인의 카리스마가 강조되고 군부가 대통령 개인 및 대통령의 정치 프로그램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경향이 대두했다.

    따라서 대중적 사회운동이 성장하고 또 자율성을 획득하는 역동적인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 한, 개혁이 차베스 개인에게 의존하는 경향은 점차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조적․객관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개혁이 위기에 처하고 단기간의 가시적 성과가 사라지면, ‘개혁’은 지도자 자신의 정치적 승리와 경제정책의 근본적 쟁점의 호도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결과적으로 정부도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다.

    전진을 위한 쟁점

    따라서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진정한 ‘21세기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쟁점이 검토되어야 한다.

    첫째, 1940~195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지 않은 채 제한적 코포러티즘을 시도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했다. 오늘날 ‘볼리바리안 혁명’이 인민주의적 전통으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소유권과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혁 및 토지개혁의 급진화를 추구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율성이 적극적으로 신장될 때만 가능하며, 따라서 최근 고조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자통제, 평의회 운동 및 빈민, 농민, 여성들의 자기 조직화에 주목할 수 있다.

    둘째, 1960~1970년대 사회주의적 지향 속에서 급진화된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조직, 정당, 노동조합 및 이를 포괄하는 전선체 등은 대개 군부독재와 미국의 ‘저강도 전쟁’으로 압살 당했다. 지금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간섭은 상수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차베스가 시도 중인 군사노선은 그 유효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군사주의의 위험을 환기한다. 1960~1970년대 좌익적 사회운동의 좌초의 원인을 ‘무장’ 여부에서 찾기보다는 반혁명에 맞설 수 있는 대중적 토대의 문제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셋째, 1980년대 ‘평화협상’을 거쳐 선거정당으로 전환한 라틴 아메리카의 기존 사회운동 세력은 1990년대를 거쳐 선거정치와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게 되었고, 일부는 비정부기구(NGO)로 흡수되었다.

    이들은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금융기구와 초민족적 법인자본에게 권력을 대폭 이양할 것을 주장하며 ‘사회운동의 자율적 요구와 상호조정’을 참조하기보다는 선거승리를 위한 캠페인 기술에 전도되었다. 이에 반해 1990년대 후반부터 촉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기존 정당과 노동조합이 선거정치에 매몰되거나 코퍼러티즘을 수용하면서 대중운동을 분할하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 세계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다양하게 분출하고 있는 사회운동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으며 그 수렴점이 바로 세계사회포럼이었다. 그런데 지난 1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개최된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세계화에 대항하여 분출 중인 사회운동과 최근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좌파’ 정권의 관계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사회운동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가 앞서 지적한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변질에 대한 나름의 반성적 시도였음을 상기한다면, 차베스를 비롯한 좌파 정권에 대한 단순한 환호와 옹호를 넘어 향후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세계사회운동의 전망과 역량을 더욱 확장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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