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동당은 의회주의 파괴범 '맞다'
        2006년 04월 14일 07: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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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대로다. 민주노동당은 법사위를 점거했고 비정규직 법안은 처리되지 못했다. 여당은 민주노동당이 의회주의를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민주노동당은 내용적 민주주의도 절차적 민주주의만큼 중요하다고 대응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다.

    민주노동당은 의회주의를 파괴했다. 사실이다. 국회의 정상적 의사진행을 방해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도 인정했다. 의회주의 파괴했다고. 이로써 민주노동당은 4월 국회 들어서만 두번이나 의회주의를 파괴한 셈이 됐다. 둘 다 비정규직 법안 때문이다.

    ‘비정규직 보호입법의 시행효과’는 정부안의 정당성의 핵심 근거

    언론이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다. 노동부의 <비정규직 보호입법의 시행효과> 보고서 은폐 의혹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치권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비정규직의 양산을 제도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게 민주노동당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비정규직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제도적 틀 내로 흡수하자는 입장이다. 이렇게 하면 비정규직은 더 늘어나겠지만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논리다. 이게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입장이다.

    노동부가 한국노동연구원에 용역을 준 <비정규직 보호입법의 시행효과>는 정부 여당의 안대로 비정규직 법안을 처리하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가 얼마나 개선되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이 효과가 미미하다면 정부안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는 결과만 가져오게 된다. 이 효과가 제법 높게 나온다면 정부안은 그나마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에는 정부안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핵심 근거가 담겨있다.

    "보고서 대로라면 비정규직 법안의 정당성 상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3월 12일이 되어서야 공개됐다. 비정규직 법안이 환노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한 직후다. 법안 도입을 결정하기 전에 결과치를 따져보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노동부는 거꾸로 갔다. 법안 도입이 결정된 다음에야 보고서를 공개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노동부의 보고서는 법안 통과에 따른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개선 효과가 대단히 미미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5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될뿐더러 그에 따른 임금 상승 효과는 6%, 정규직 전환 효과는 0.12%에 불과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동안 정부는 비정규 법안이 시행될 경우 정규직 전환 효과도 크고, 월급도 정규직의 80% 이상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게다가 이 보고서는 법안 적용 이후 비정규직의 수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비정규직의 수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미미한 처우 개선 효과에 견줘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심각성의 크기가 훨씬 크다는 것이 반대론의 근거다. 결국 이 보고서대로라면 비정규직 법안은 통과돼서는 안되는 법안이다.

    "보고서 은폐는 중대한 범죄"

    그러니 보고서를 고의로 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여러 정황을 보면 보고서 은폐 의혹은 거의 확신 수준으로 굳어진다. 이 보고서는 당초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의 요청에 따라 작성됐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도 보고서 작성 진행을 보고받았다.

    노동부는 지난해 12월 21일 최종보고서를 제출받고 23일 검토회의를 거친 후 26일 검수 완료로 계약금액까지 전액 지불했다. 그렇게 세금으로 만든 보고서를 정작 필요할 때는 묵혀두다가 필요성이 없어진 다음에야 공개하는 이 희한한 행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여당은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다. 노동부는 실무자의 착오(혹은 잘못)라는 관료적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선지 오래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될지, 그들의 처우가 어떻게 바뀌게 될지 국민들은 알아야 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정부와 여당의 가장 중요한 의무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은 그 설명을 생략했다. 아니, 고의로 숨긴 혐의가 짙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중대한 범죄다. 국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제 삶을 통째로 바꿀지도 모르는 법안이 버젓이 국회를 통과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국민주권 파괴’ 막는 방법이 ‘의회주의 파괴’ 밖에 없다면

    정부가 범죄적 상황을 의도했을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정부와 여당이 이런 범죄적 기획의 혐의에서 자유롭고 싶거든 한가지만 하면 된다. 제대로 된 조사를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진행하면 된다. 그래서 제대로 된 법안을 만들면 된다. 앞으로의 몇 십년을 규정할 법안을 만드는데 몇 달 더 시간이 소요되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 파괴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기자는 우리 정치에서 거의 관행적으로 이뤄지다시피 해온 의회주의 파괴보다는 국민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안에 대한 설명을 고의적으로 생략한 정부와 여당의 태도가 훨씬 중대하고, 무겁고, 범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부, 여당의 이런 잘못된 태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의회주의 파괴’ 밖에 없다면 더 이상 의회주의 파괴 행위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민 각자는 자기 삶에 영향을 주는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한다는 국민주권의 원리와 국회에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화해시키는 길은 현재로선 하나다. 투명하고 공개적인 조사, 그 결과에 대한 국민적 공유, 국민의 판단을 반영한 법안 수정, 법안 확정 및 국회 통과다. 이런 조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정부와 여당이 그토록 강조하는 의회 민주주의는 결국 편의적이고 껍데기뿐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와 여당의 전향적 태도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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