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이 제때 닻을 못 내리면 절망이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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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14일 04: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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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 인물이 있다. 그는 제국의 패권 아래서 신음하던 나라에서, 기득권 세력의 학정에 시달리던 민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는 군대에 들어갔고, 쿠데타를 시도하는 ‘정치군인’이 되었다. 결국 그는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이 된 그는 오랫동안 외세의 소유였던 자국의 최대 자산을 국유화했다.

    이것은 곧바로 열강들과의 긴장과 충돌로 이어졌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편이었다. 열강들은 꼬리를 내렸다. 민중들도 그의 편이었다. 자국민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의 민중들도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소리 높여 외쳤고, 강대국들에 대항할 ‘힘없는 나라들의 연대’에 앞장섰다. 그는 자국과 그 주위 나라들을 한 데 통합하는 역사적 실험에 나섰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많은 이들이 베네수엘라의 현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염두에 둔 사람은 사실 그가 아니라 50년 전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자말 압델 나세르다.

    차베스는 ‘제2의 나세르’인가

       
     ▲ 자말 압델 나세르 전이집트 대통령
     

    백과사전의 나세르 항목에서 ‘나세르’라는 주어를 지우고 ‘차베스’를 끼워 넣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점들이 있다. 군 출신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자라는 점이 그렇고, 각각 수에즈 운하와 석유 자원을 국유화해서 열강에 대항했다는 점이 그러하며, 서구인들로부터는 독재자라고 비난받지만 제3세계(요즘은 ‘남반구’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지만) 민중들에게는 열렬한 지지의 대상이라는 점, 제국주의 세계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역통합을 추진했다는 점(나세르의 경우는 아랍연합의 건설과 반둥회의의 개최, 차베스의 경우는 라틴아메리카 통합 운동과 세계사회포럼) 등이 그러하다.

    물론 세월이 흘렀고, 풍토가 서로 다르다. 차베스가 ‘제2의 나세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인 평가다. 가령 차베스에게서는, 전쟁(이스라엘과의 소위 ‘6일 전쟁’)을 도발해서 지역 맹주가 되려 했던 무모한 시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그가 보여주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높은 식견과 굳은 신념은 확실히 나세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차베스가 50년 전 나세르의 길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전망은 그렇게 밝지 못할 것이다. 나세르가 이끌던 역사적 운동은 그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1970년 나세르가 돌연 사망하자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제3세계의 단합은커녕 아랍 세계의 통일도 더는 힘 있게 추진되지 못했고, 이집트는 아랍권의 가장 고분고분한 친미 국가 중 하나로 변질됐다.

    베네수엘라의 실험이 한편으로는 놀라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불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베스라는 한 개인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나세르의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혁명운동의 성과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의혹. 베네수엘라의 벗들이 차베스 개인이나 정부 내 상층 그룹보다도 새로운 좌파 세력들의 부상, 대중의 자치․자주관리 운동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희망은 제 때에 닻을 내려야 한다

       
     ▲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베네수엘라 혁명이 50년 전의 이집트와는 달라야 하는 절박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50년 전의 그 기회가 참으로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 기회의 무산은 이 시대 아랍의 깨인 민중들에게는 너무도 뼈아픈 기억이다.

    현대의 어휘로 아랍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나세르식 ‘아랍 사회주의’의 희망이 모습을 감추자 아랍 세계는 오랜 정치적 암흑기를 맞이했다(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운동만이 그 예외였다). 어떤 믿을만한 정치적 대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서 뒤늦게 대중을 장악한 게 바로 나세르 생전 그의 정적이었던 무슬림 형제단의 이슬람 근본주의다.

    더구나 지금 미국의 대(對)테러 전의 명분이 되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알카에다 류의)는 무슬림 형제단의 오리지널에 비해서도 훨씬 반동적이고 편협한 것이다. 희망이 제 때에 닻을 내리지 못하는 곳에서는 이렇듯 절망이 그것을 대신하곤 한다.

    나세르 시대 이집트는 (적어도 아랍 세계의 민중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때맞춰 등장한 희망의 구현이었고, 지금의 베네수엘라도 또한 그러하다. ‘때맞춘 희망’이란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결코 쉽게 찾아볼 수는 없는 예외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어제와 같은 미래 속에 다시 흘려보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낭비이자 더할 수 없는 비극이다.

    부디, ‘학습 능력’이라는, 인류라는 종(種)의 거의 유일한 장점이 이번에는 빛을 발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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