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는 혁명을 통해 실현된다
        2006년 04월 18일 01: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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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아직도 어린아이 단계에 있다. 그것은 자기 발전을 거의 시작도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들 세기의 철학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직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낳았던 시대적 상황이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참여작가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가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철학”이라고 주장한 사르트르였지만 그가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파리고등사범학교 시절 철학을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스승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57년에 쓴 위 논문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25년, 즉 내가 스무살이었을 때, 대학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강좌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학생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는 것이나 또는 심지어 자신들의 세미나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는 것조차 경계하고 있었다."

    2차대전 중 파리 지식인들과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

         
       
    ▲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사시로 인해 시력이 크게 저하됐다.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사르트르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일하면서 <구토>, <벽>등 소설과 희곡작품을 발표하다가 2차대전 기간 군복무 중 독일군에 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근무하던 중 그는 나치에 반대하는 희곡 ‘파리들’을 발표하는 등 독일군 치하에 있던 파리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으나 지식인으로서 활발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했다. 사르트르는 이때 그의 동반자인 시몬느 드 보봐르, 메를로 퐁티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지하서클 ‘사회주의와 자유’(Socialisme et Liberté)를 결성했다.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사회 참여(앙가주망, engagement)를 강조했던 사르트르의 사상은 이미 전쟁중 그의 저항운동에서 그 단초를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사회주의와 자유’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서클을 해산하고 집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포로수용소 시절에 구상했던 실존주의 철학서 <존재와 무>를 1943년 발간함으로써 철학자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5년 교직생활을 청산한 후 사르트르는 학창시절부터 오랜 친구였던 철학자 메를로 퐁티와 함께 좌파 잡지 <현대>를 창간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1968년 혁명에 열렬한 지지 보내

    하지만 전후 자신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이 프랑스 지성계에서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사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1951∼1952년 무렵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시작한 이후였다.

    사르트르는 냉전이 깊어가기 시작하자 1952년 빈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의 평화를 위한 민중대회에 참석하고 소련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등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의 실천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사르트르는 그의 오랜 친구였던 알베르 카뮈와 멀어졌다.

    1950년대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이 자유의 신장과 사회의 변화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당으로 보고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68년 혁명 당시 학생들의 투쟁을 한낱 철부지들의 모험주의로 치부했던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고 철저히 학생들의 편에 섰다.

    그는 프랑스의 주요 지식인 가운데 처음으로 학생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인물이었다. 사르트르는 1968년 5월 혁명의 학생지도자 다니엘 콩방디와의 대담에서 "우리 사회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무언가가 당신에게서 솟아 나오고 있다. 나는 이것을 가능성의 확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포기하지 말라"며 강력한 지지의사를 표시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은 그에게 현실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게 만들었지만 사르트르는 "하나의 가치, 즉 스스로 목적으로 고양되는 자유"로서의 사회주의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결합 시도

       
     
    ▲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이 1946년에 찍은 사르트르. 오른쪽은 건축가 장 뿌이용.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실존주의자로서 ‘자유’를 중시한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혁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자유를 실현할 "혁명은 보다 길게 지속될 것이며 보다 강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중 세력이 부르주아의 권력에 대해 부분적 승리를 거두고 진보와 반동이 되풀이되며 제한된 성공과 일시적 실패가 반복되는 이 싸움은…모든 권력이 완전히 해소되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적어도 50년은 걸릴 것"이라며 "혁명은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에 의해 전복되는 순간이 아니라 권력을 극복해가는 하나의 긴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해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던 사르트르는 1968년 혁명 이후 1980년 숨을 거둘 때까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는 등 신좌파 학생들의 운동에 동참했다.

    사르트르에 대해 부르주아 철학자들은 그가 초기의 실존주의에서 후기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되면서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민중을 지키는 민중계급의 옹호자로 남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실천적 좌파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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