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순 노모와의 병원행
    [낭만파 농부] 덜 아프게 사시다가
        2018년 04월 20일 09:24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요 며칠을 팔순 노모와 함께 보냈다. ‘효도관광’ 같은 거였으면 오죽 좋겠냐만 아쉽게도 그렇지가 못했다. 서글프게도 관광여행이 아닌 병원순행.

    그 나이 쯤 되면 기력이 떨어짐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병치레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신세이게 마련이다. 우리 어머니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고혈압에 만성위염, 퇴행성관절염… 방구석엔 늘 온갖 약 봉투가 널려 있다.

    이번 순행은 애초 정형외과 한 곳에서 비롯됐다. 그 세대 촌부들이 다들 그렇듯 쭈그려 일하는 밭농사에 시달리느라 일찍부터 허리가 굽고, 관절염을 앓았다. 유모차를 닮은 보행기가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나이가 들수록 골밀도도 떨어져 어깨뼈가 내리누르는 통증도 심해졌다. 몇 달에 한 번 씩 호르몬주사제 처방으로 통증을 누그러뜨려 왔으나 얼마 전부터는 약효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보통 때는 어머니 홀로 시내버스를 타고 단골병원에 다녀왔는데 이번엔 마음이 놓이지 않고 상태가 어떤지도 알아볼 겸 승용차로 모시고 갔다. 통증을 호소하니 그 동안 수술을 만류하던 주치의사도 “정 견디기 힘드시면 수술하시라”고 했다. 하지만 꼬부랑 할머니에게 수술요법이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구나 반년 남짓 걸린다는 재활치료의 고통을 또 어찌 감당할 수 있겠나. 최후의 수단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병원을 오가는 차 안에서 “오른쪽 눈이 뿌옇고 잘 안 보인다”고 호소하신다. 내친 김에 안과까지 가보자고 익산 시내로 향했다. “백내장이 심해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바로 그 자리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백내장 수술을 했다. 수술 뒤에는 소독과 함께 경과를 봐야 하므로 이틀 동안 통원을 해야 했다. 다행히 예후가 좋아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또, 이번에는 “전에 없던 혈변을 보았다”고 하신다. 장내출혈? 그렇다면 혹시…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부랴부랴 항장내과를 향했다. 다행히도 항문질환이라며 투약처방을 받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깨통증이 문제다. 수술 아닌 요법이 필요한데 그나마 ‘닭소주’라는 대안이 있었다. 바로 이웃에 사는 대체의학 연구자가 알려준 일종의 ‘동종요법’이다. 2년 넘은 늙은 닭을 잡아 소주를 붓고 고아낸 국물(고)을 하루 2~3차례 먹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살 넘은 닭을 찾기가 그리 쉬운가. 부화시킨 뒤 두 달만 되면 ‘닭고기’로 판매되는 게 요즘 닭들의 팔자인데 2년생을 찾기란 거의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그래도 이미 3년 전에 경험이 있고, 웬만큼 효험도 봤던 터다. 그 때 기르던 닭을 내준 주란 씨한테 연락을 하니 지금 기르는 놈들은 다 어리단다. 이번에는 오골계를 기르는 ‘화산 미쓰김 언니’한테 부탁을 했더니 한 살 짜리가 최고참이란다. 다행히 이웃에서 기르던 두 살 가까운 닭을 구해 고맙게도 읍내 닭집에 맡겨놓았다고 한다.

    오늘 아침, 닭집에서 손질이 끝난 닭고기를 찾고 소주원액(담금소주)을 사서 어머니 댁을 향했다. 국물을 고아내는 데는 두 시간 남짓이 걸렸다. 이번에도 효험이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하다못해 ‘자식의 정성’을 감안한 ‘플라시보 효과’라도 거뒀으면 하는 바람이다.

    갑자기 걱정스럽다. 여기까지 적은 내 행적을 두고 사람들은 ‘왕상의 잉어-맹종의 죽순’ 고사, 그리고 ‘효자’라는 낱말을 떠올렸을까? 터무니없다.

    팔순 노모가 홀로 사는 고향마을은 내가 7년 전 서울서 내려와 터 잡은 이 곳에서 20키로 남짓 떨어진 지척이다. 기껏해야 달포에 한 번, 그것도 무슨 일이 있어야 찾아뵙는 실정이다. ‘조석으로 문안드리고, 마음을 다하는’ 처지일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의 부담을 덜고자 어머니를 여기에 모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낯설고 물선 이 곳에서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시킬 순 없는 까닭이다. 수 십 년을 부대끼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동네친구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시는 게 그나마 최선이라고 여기고 있다.

    나는 조선조 5백년을 거쳐 지금도 뻣뻣하게 살아 있는 ‘효’ 관념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 생각한다. 그것이 강조하는 유교 행동규범의 눈치를 보며 살아갈 뜻이 전혀 없다.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어떤 행동강령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인정과 도리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치사랑은 내리사랑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만큼 불완전하다.

    세월 참 빨리도 흐른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죽음이라는 것도 덤덤해지는 법인가? 몇 해 전만 해도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얘기할 수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덜 아프게 사시다가 편히 눈을 감으셨으면 한다는.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