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슬포교회,
    제주 4·3 비극의 화해자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조남수
        2018년 04월 10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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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30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의 “70년만의 귀향, 70년의 기억” 현장에서 증언을 들으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무장대와 토벌대의 이어진 가족학살로 고아가 되어, 성(姓)도 바뀐 채 한 많은 생을 살다가 작년 제주도를 찾았던 이상문씨(77세)가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서 부친 위패 옆에 살아있는 자기 위패를 발견하였다는 절규에,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그날이 고난주간 성금요일이었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이사야 53:5) 진상이 규명되어 희생자 3만여 명의 억울함이 풀려야, 제주4·3은 역사적으로 부활하여 이 땅에 생명과 평화의 역사를 열어갈 것입니다.

    모처럼 방문한 제주는 유채꽃과 벚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화사한 봄에 자행된 집단학살은 얼마나 참혹하였을까! 해방은 되었지만 친일파가 득세하고 미군정의 실정으로 살기가 힘들어지자 제대로 된 나라를 열망하여 5만여 명이 참가한 1947년 제주 3.1기념대회는 발포와 탄압으로 인하여 도청직원과 경찰관 등 4만여 명이 참여한 3.10 총파업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이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강경진압을 택했던 까닭에 제주도민 대다수가 심정적으로 지지한 4.3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는 경찰서와 서북청년회, 우익인사들을 습격했습니다.

    이후 평화협상은 조작된 방화사건을 빌미로 깨지고 5.10 선거가 무산되자, 단독정부 수립 후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반인륜적인 초토화작전이 감행되었고, 무장대도 고립과 식량난에 폭도로 변하여 4.3 희생자 대부분이 이 기간에 희생당합니다. 계급갈등이 적고 공동체성이 강한 제주도인데도 막 구축되기 시작한 미소냉전체제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더구나 유족들이 당한 국가폭력의 집단적인 사회역사적 트라우마는 진상규명은 커녕 연좌제, 모독, 감시 등의 2차 피해로 인하여 더 심화되었습니다.

    왜 ‘제주 4·3’이라고만 할까? 이 의문이 4·3평화공원에 가서 풀렸습니다. 전시실의 ‘백비’에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사망자중 84%가 국가공권력에 의해 집단적으로 희생되었음에도 진실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의미규정을 하지 못하고 제주 4·3이라고만 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4·3에 빚이 큽니다. 가해자 중에 가장 잔혹했던 서북청년회에 한경직 목사가 깊숙이 관여했고 영락교회 청년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까닭입니다. 친일의 청산대상이 되고 토지개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월남한 서북출신 청년들은 적개심과 반공의식으로 무장하여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에 이용되어 지하공작과 좌익척결에 동원되었습니다. 급료도 없이 제주도에 보내져 최대 2,400명까지 달한 이들은 ‘악의 그림자’로 불릴 정도로 약탈과 집단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자기의 트라우마를 제주도민에게 전가한 것이지요.

    광기의 시대에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 화해자로 나선 이가 있었습니다. 모슬포교회의 조남수 목사였습니다. 모슬포교회는 1909년 이기풍 목사가 설립하였는데 진개동산에 우뚝 선 교회답게 항일운동에 열심이었습니다. 2대 윤식명 목사는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10월 징역형을 받았고, 1920년에는 제주 최초의 남녀공학인 광선의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감당하였습니다.

    드디어 4·3의 광풍이 모슬포교회에 몰아쳐 무장대에 의해 허성재 장로 등 4인이 살해되었고 조남수 목사도 가까스로 화를 면했습니다. 사태가 더 심각해지자 조남수 목사는 용기를 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제주도민이 다 주겠어요. 백성 없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겁니까?” 조남수 목사가 사귀포경찰서 문형순 서장에게 한 말입니다. “자수했다가 만약 무슨 변을 당한다면 나는 여러분 앞에서 자결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가 주민 1000여명 앞에서 자수를 권유하며 한 말입니다. 150회나 강연하여 3000명이나 자수하였고, 즉결처형을 앞둔 20명을 살려내기도 하였습니다.

    손재운 담임목사의 안내로 들어간 교회역사관에는 귀한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첫 당회록, 윤식명 목사 이력서 등이 있었는데 1953년 6월 10일자로 나온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출범선언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장 총회는 2007년 모슬포교회를 총회 제5호 유적교회로 지정하였습니다. 모슬포교회는 나누고 섬긴 교회답게 지역사회선교에 열심이고 마당에는 잘 지은 종합사회복지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진개동산에 가서 조남수 목사와 문형순 서장의 공덕비를 보고, 군인과 경찰들이 묻힌 대정읍충훈묘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동안 대다수 제주 교회들은 4·3에 침묵했는데 올해는 달랐습니다.

    4월 1일 부활주일, 제주기독교교단협의회 주최로 ‘치유와 회복을 위한 4·3 70주년 연합예배’를 드렸고, 2일에는 제주사랑선교회의 주관으로 연세대 박명림 교수 초청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한국교회가 제주의 평화를 위해 화해자로서 4·3의 치유와 화해의 역사를 열려면 우선 신학적인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상규명에 힘을 싣고,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추구하고 동북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나설 때, 화해자로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고, 정의로운 일에 용기를 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키울 때, 4·3은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1959년에 건립한 옛 모슬포교회 예배당은 소박하고 아름답습니다. 뒤편으로 보이는 지금 교회도 그리고 여기서는 한라산이 보이지 않지만 제주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사는 까닭에 하늘에 그려 넣었습니다.

    모슬포교회(그림=이근복)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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