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서사의 정치적 무의식
    [노동·문예 노트] 영화-웹툰-소설 속의 어떤 징후
        2018년 04월 06일 11: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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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계간 『오늘의 문예비평』(107호, 2017년 겨울호)에 「영웅서사의 해체와 사건의 존재론」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평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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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서사의 헤게모니와 비판적 리터러시

    인간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웅적 형상을 창안하였다. 동서양의 신화적 영웅이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며 거대한 자연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자기 존립의 가능성을 되묻는 이야기로 전승되어 왔다면, 근대적 서사의 영웅담은 비범한 능력과 도전 의지로 자연의 제약이나 인간 삶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명(Civilization) 창조의 모험담으로 기록되어 왔다.

    신화원형 비평가 노드롭 프라이가 『비평의 해부』나 『문학의 구조와 상상력』을 통해 보여준 실제비평의 성과는 인간 삶의 구조적 원리(archetype)를 해명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종종 구조주의 이론의 한계와 함께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프라이의 신화원형 비평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영웅서사의 구조와 특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군신화』에서 『무정(無情)』으로 이어지는 영웅적 일대기의 구조 분석이나 이론적 적용에 있지 않다. 프라이의 작업이 시사하는 바는, 영웅서사의 반복적 출현과 전승이 현실세계 문제와 공동체의 미래 과제를 사유하는 대화적 방법(론)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영웅서사는 비범한 주인공이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고 세계와 자아를 합일의 경지로 이끄는 입사/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대의 사회 문제와 공동체의 위험을 사유하게 하는 상징적 재현물인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영웅서사와 위인전기를 읽어 왔다. 초국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각박한 세상에서 낙오하거나 좌초하지 않기 위해서, 영웅/위인의 성장과 출생, 그리고 고난 극복 과정을 학습한다. 이른바 영웅서사를 통해 척박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배우는 셈이다. 그러나 영웅서사는 단순히 한 개인의 정신적, 신체적 성장 과정만을 그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웅서사에는 지배집단의 합병적 헤게모니가 기입되어 있기도 하고, 또 부조리하고 모순된 시대적 상황이 리얼리티(reality) 있게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영웅서사는 사적 욕망의 집적물이 아니라, 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지각하게 하는, 더 나아가 시민주체의 변혁적 열망을 표상하는 사회문화적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지금도 다양한 내용/장르의 영웅서사를 접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비판적 문식성(literacy)’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최근 몇 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새로운 영웅의 출현과 도래를 꿈꾸어왔다.

    영화: 영웅서사의 관변화와 탈정치성 비판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과 경향을 살펴보면, 단연 역사적 소재에 대한 관심과 창작이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을 비롯하여, <명량>, <군도>, <역린>, <관상>, <순수의 시대>, <사도>, <대립군> 등과 같은 사극영화가 약진했다. 이는 분명 주목해야 할 문화적 현상 중 하나이다. ‘조선’이라는 시공간은 영화의 후경으로써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작금의 현실을 투사하는 정치적 역학과 사회적 담론을 반영하는 알레고리이다.

    사극영화에서 등장하는 임금, 장군, 사대부, 그리고 백성들은 각기 다른 영웅의 이미지로 다채롭게 형상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임금을 암살하고자 한 적폐세력을 때려 부수는 신적 역능으로 도래하기도 하고(<역린>), 단 12척의 배로 330척 왜군의 공격에 맞서 기적의 승리를 거둔 명장의 모습으로 추앙되기도 하며(<명량>), 포위당한 나라의 운명을 위해 스스로 역적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신하의 충심으로 재해석되기도 하고(<남한산성>), 지배 집단의 폭정과 억압에 맞서 봉기한 민초들의 의협심으로 그려지기도 한다(<군도>). 개별 작품의 스토리 라인과 영웅의 형상은 다르지만, 이들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당대 현실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간접적으로 반영하거나 우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조선시대 사극영화와 함께 한국영화의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가 식민지 시대극이다. 근자에 개봉한 주요 작품으로, <암살>, <밀정>, <덕혜옹주>, <군함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국민국가(nation state)의 구성원이 고양해야 하는 애국주의적 정념에 기초한 영웅서사적 특징을 보여준다. 식민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독립투사의 숭고한 형상은 계급적, 젠더적, 지역적 차이를 지우며 동일화되고 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들 작품의 서사적 동일성에 대한 비판은 개별 작품의 미학적 수준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시대극의 내셔널리티가 내포하고 있는 탈정치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2016)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 등과 같은 작품을 떠올려 본다면, 이 영화는 난감하기 그지없다. <덕혜옹주>에서 주인공 이덕혜는 비운의 황녀이다. 그녀는 영화 안에서 독립운동가에 근접한 민족적 영웅으로 격상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허나, 영화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녀가 일본에서 고단하고 힘든 생을 보내며 살았는지, 그게 아니라 일본 정부로부터 왕족의 대접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누렸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치 않다. 핵심은, 영화 <덕혜옹주>가 좌초한 여성영웅의 비극적 서사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덕혜옹주>는 주인공이 비참한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비극적 영웅서사의 전형적 양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영웅담은 비범한 능력을 통해 세계의 시련을 극복하는 ‘신화’적 형식이 아니라 주인공의 비장한 결말을 전제로 하고 있는 ‘전설’의 그것에 가깝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이덕혜’의 삶은 ‘고난 극복과 성장’의 서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역방향으로 전개된다. 남성 중심의 식민지 시대물과의 차이점은 그 정도뿐이다. 비극적 영웅서사인 전설(傳說)이 사실과 허구의 결합을 통해 극적 비장미를 증폭시키는 서사 양식이라고 한다면, <덕혜옹주>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Faction)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여러 팩션 요소 중에서도,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 앞에서 이덕혜가 연설하는 신(scene)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덕혜옹주는 일제가 준 협력적 연설문을 그대로 읽지 않고 식민지 백성들의 궁핍한 삶을 위로하는 연설을 한다. 그녀의 용기와 결단 앞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울분을 터뜨린다. 그러나 이 드라마틱한 저항 장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덕혜옹주>를 둘러싼 역사왜곡 논란은 이 장면에서 가장 크게 점화된다. 하지만 문제는 역사왜곡 여부가 아니라, 좌초한 여성영웅 ‘이덕혜’의 일대기가 개인적 비극을 넘어서는 시대적 아픔으로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덕혜옹주’는 ‘슬픔의 환영(illusion)’을 창안함으로써, 몰락한 왕조의 비극을 민족적 슬픔으로 등치시키는 공통감각을 발명한다. 결국, <덕혜옹주>는 퇴락한 영웅의 심상을 통해 대중관객의 애국심과 민족성에 호소하는 감상주의로 추락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로맨틱한 민족주의는 당대 사회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눈을 감는 정치적 차폐 효과를 발생시킨다. 식민지 시대극이 보여주는 영웅담론은 감독의 선의나 역사적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지금―여기’의 사회적 아젠다를 지우고 국민국가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혹은 존재하고 있다고 상상되는 적대적 대상에 대한 분노만을 증폭시킨다. 민족주의적 영웅서사는 과거 속의 타자를 공통의 적으로 환기하고 호출하면서, 국민국가 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은폐하는 ‘관변(官邊)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를 관변적 영웅서사라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일상/내부 속에 코드화된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과 저항 가능성을 소거하고, 오직 바깥의 적대적 환영만을 타격하는 데 골몰한다. 다시 말해, 관변적 영웅서사는 국민국가, 혹은 민족 공동체 내부의 불평등이나 계급적 모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탈정치적 문화형식인 셈이다.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시대극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작년에 개봉한 <인천상륙작전>은 이데올로기적 영웅서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관변 담론’을 표방하고 있다. 이 작품은 맥아더 장군과 특수부대 대원들의 영웅적이고 희생적인 작전 수행 과정을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재구성하고 있다. 장학수 대위를 비롯한 해군 첩보부대(혹은 켈로부대) 대원들의 목숨을 건 비밀작전은 숭고한 희생의 제의 과정으로 그려진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헌신과 용기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이념적 적대의식과 화려한 전투 장면은 오히려 민족 분단의 아픔과 고통을 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인천 탈환작전에 참여한 대원들의 희생과 슬픔을 오락적 소재나 화려한 영상미학의 수단으로 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관변 반공영화에나 나올 법한 전쟁영웅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문제는 내용만이 아니다. 최근, 이 영화의 제작 지원에 관(官)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한 국책은행이 정부의 하명을 받고 26억의 제작비를 부실 투자했다는 문제 제기와 함께―2017년 국정감사에서 중소기업은행과 박근혜정부의 관계에 대한 해명 요구가 있었다―, 영화 제작 투자 및 홍보 과정에 공영방송국이 적극 지원한 사실(인터넷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전체 예산 170억 원 중 KBS가 약 30억 원을 투자”했으며, “KBS 2TV는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두고 특집 다큐멘터리 <인천상륙작전의 숨겨진 이야기, 첩보전>을 주연배우 이정재의 내레이션으로 방영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민족 분단의 아픔과 안보 위기조차도, 내부 통치 전략으로 활용하는 지배집단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문화적 증례이다.

    웹툰: 영웅서사의 대중적 변모와 환상적 리얼리티

    영화와 더불어 영웅서사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새로운 문화양식이 ‘웹툰(webtoon)’이다. 웹툰은 디지털매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출판만화와 달리 다양한 연출 방식과 컬러 구성을 보여줄 수 있다. 또 영화 제작 예산과 비교하자면, 적은 비용으로 복잡한 스토리와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른바 웹툰에서 ‘히어로물’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웹툰의 영웅서사는 드라마와 액션 장르가 결합된 형태(강풀의 <무빙> 등), 무협과 역사물이 결합된 형태(형민우의 <삼별초> 등), 그리고 액션과 학원물이 결합된 형태(전선욱의 <프리드로우> 등) 등으로 나타난다.

    웹툰 서비스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대형 웹툰 플랫폼(Naver와 Daum 커뮤니케이션)에서 연재되는 영웅서사는 대부분 시즌을 거듭하는 장편서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PC보다는 모바일기기 환경을 고려하여 서비스되기 때문에, 1회 분량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 웹툰은 문학이나 영화와 달리, 이차원적 이미지를 통해 서사적 내용을 표현한다. 또 모바일 매체로 스토리를 전달하기 때문에 누구나 영웅서사를 비롯한 웹툰 작품을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이는 영웅서사 창작/수용의 시공간적 제약, 그리고 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물적 조건이 될 뿐 아니라, 웹툰 콘텐츠로서의 영웅서사에 무한한 상상력을 기입할 수 있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라 만화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구조는 더욱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영화나 소설의 의사소통구조와 달리, 웹툰은 ‘작가―독자의 쌍방향소통’ 체제를 갖추고 있다. 작품을 창작하는 도구나 기술만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만화의 향유 시스템과 독자(들)의 문화도 크게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액션’과 ‘학원물’이 결합된 영웅서사인 <돌아온 럭키짱>의 경우―이 작품은 매우 전통적인 출판만화 스타일의 내용/형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작품의 내용보다 웹툰 커뮤니티나 독자들의 팬덤 문화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모바일 환경에 기반한 영웅서사가 어떤 형식과 내용을 취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웹툰의 독자층과 사용 연령이 10대부터 30대까지 집중되어 있다 보니, 드라마와 학원물, 무협과 판타지 등이 결합된 액션 히어로물이 영웅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장르적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웹툰은 출판만화 형식의 복잡한 칸 구성이나 그림체, 혹은 딱딱하고 진지한 영웅상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캐릭터를 요구한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과는 다른 방식의 영웅이 등장하기도 하고, 또 다채로운 내용적 실험과 장르 융합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를 테면, 기안84의 <복학왕>은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찌질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우기명을 통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속류 권위주의나 성장 담론을 비틀고 희화화시키고 있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인천상륙작전>의 경우에도 영화 <인천상륙작전>과는 달리, 영웅 중심의 역사 각색에서 벗어난 논픽션적 역사 서술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웹툰 콘텐츠는 영웅서사의 무거움과 진지함을 거부하고 조소하면서 기성세대의 가치와 모순에 도전하고 있다. 이는 일상성과 오락성을 겸비한 대중적 코드를 통해 더욱 확장되는 양상을 띤다. 물론 영웅적 형상으로 사회적 의제를 다루고 있는 웹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재난서사와 영웅서사의 결합을 통해 파국적 세계와 인간성 상실을 고발하고 있는 <심연의 하늘>(윤인완·김선희),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노동 현실과 노동자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송곳>(최규석), 또 청년 세대의 고단한 삶과 비정규화된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 <미생>(윤태호), 자기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 슈퍼 히어로의 저항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무빙>(강풀) 등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들 웹툰은 대중문화 콘텐츠가 제기할 수 있는 사회적 질문과 문화예술적 책무를 최대치로 펼쳐내고 있다.

    웹툰 <무빙>의 한 장면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역시 강풀의 <무빙>(2015, Daum)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강풀은 지속적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질문해 왔다. 현대인의 관계 단절과 소외 문제를 다룬 <아파트>와 <이웃사람>에서부터, 19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군부의 만행과 역사적 트라우마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26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나와 타자,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를 사유해 왔다. 그러나 강풀의 웹툰에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역사적 모순을 해결하는 존재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었다. <이웃사람>에서 연쇄살인마를 때려잡는 것은 특출한 영웅이 아니라 이웃 간의 관심과 연대이다. 마찬가지로, <26년>에서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직 대통령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고 있는 사람 역시 피해자의 가족들이다.

    이와 달리, 근작 <타이밍>, <무빙>, <브릿지>에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 슈퍼 히어로가 등장한다. 세 작품은 학원물, 드라마, 액션 장르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영웅서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작품이 상호텍스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작인 <브릿지>는 <타이밍>과 <무빙>을 통합하는 매개 작품이 되고 있다. <타이밍>이 시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초능력자의 영웅담을 보여주고 있다면―시간을 정지시키거나 되돌리는 방식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다면―, <무빙>은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는 초능력자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타자’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브릿지>는 2017년 현재 연재 중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내용과 성격을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다만 <브릿지>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시간(<타이밍>)과 공간(<무빙>)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종합하고 연결(bridge)하는 통찰적 텍스트인 것만은 분명하다.

    <타이밍>과 <무빙>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들은 모두 평범한 인간 군상을 하고 있다. 강풀의 웹툰은 언제나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범한 능력과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 <무빙>의 봉석과 희수를 예로 들어 보자. 봉석은 하늘을 나는 공중부양 능력이 있으며, 희수에게는 어떤 상처도 금방 회복이 되는 치유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자신의 초능력을 숨기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국가가 초능력을 지닌 이들을 발굴하여 ‘인간 무기’로 사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봉석과 희수의 아버지도 국정원의 북파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족과 함께 숨어 지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봉석과 희수는 결국 노출된다. 영웅서사가 예의 그러하듯, 두 사람은 구출·양육자(부모)를 통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악의 무리와 대결에 나선다. <무빙> 역시 전형적인 영웅의 일대기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환상적 요소(초능력자)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분단 상황에 대한 비판적 알레고리를 함축하고 있다. 봉석과 희수가 아무리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살아가고자 하더라도, 국가(국정원)는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결국 개인의 삶은 국가나 공동체의 문제를 도외시하고서는 존재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강풀은 다시 환기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강풀의 영웅서사는 흥미 넘치는 대중적 코드에 기반한 환상적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소설: 영웅서사의 해체와 역사적 대화의 현재성

    영웅서사의 생산과 향유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굳이 외국영화나 소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 영화나 웹툰에서 영웅서사의 반복적 출현 양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관변 담론을 수용하며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게 하는 이야기인지, 사실과 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재현하고 직파하는 서사인지가 다를 뿐이다. 최근의 한국 영화와 웹툰의 경향성을 살펴본 바와 같이, 영웅서사는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동시대(contemporary)적 사회 담론을 반영하고 있다.

    즉, 영웅서사는 특정한 인물/사건과의 대화를 통해 현재적 삶의 방식과 가치를 인식하고자 하는 정치적 (무)의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관변적 영웅서사의 사례에서 보듯, 그것은 자칫 지배질서의 헤게모니에 순응하는 문화적 제식이 될 수도 있다. 현실/환상의 경계를 가로지며 비판적 리얼리티를 전파하는 영웅서사 또한 대중적 코드에 부합하는 카타르시스적 문제 해결을 지향한다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 시대의 영웅서사나 영웅담론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다행히 몇몇 영화나 소설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작품이 발견된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는 영화나 웹툰에 비해 소설이라는 서사 형식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비평 전략이 아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저 먼 역사’ 속에 두고 온 ‘한 사람의 이름’(“김사복”)을 기억하기 위해 차를 유턴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와 공통된 문제 인식을 김숨의 장편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위안부의 고통과 슬픔을 다룬 『한 명』과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사연을 반영웅적 서사 형식으로 재구성한 『L의 운동화』가 그것이다. 기존의 영웅서사와 김숨 작가의 작품이 변별되는 것은, 『한 명』과 『L의 운동화』가 훼손된 기억/존재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도, 역사적 사건/존재의 복원을 일방적으로 완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L의 운동화』가 총체적 기억이 아니라, 분열되고 조각난 기억의 퍼즐 찾기를 통해 역사적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면, 『한 명』은 증언의 사실성과 물질성을 채록하고 보존하는 방식을 통해 존재/기록의 문서고를 만들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L의 운동화』가 주목되는 이유는―역사적 소재를 다룬 여타의 장편소설과 구분되는 까닭은―, 이 소설이 객관적인 자료 조사와 현장 탐방을 통해 재현의 대상과 장소를 온전하게 복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한열 열사의 삶과 흔적(‘L의 운동화’)을 고증하면서도, 고(故) 이한열의 당시 모습은 거의 재현하지 않고 있다. 역사 속의 실제 인물을 이야기하면서, 자칫 재현 대상을 신비화하거나 우상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한 서사 전략인 셈이다. 즉, 『L의 운동화』는 영웅적 인물의 형상과 일대기를 사료적으로 복원하는 일반적인 구성 방식을 해체/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해체적 구성이 오히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대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정초하고 있다.

    “복원과 훼손, 그 둘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요즘 부쩍 실감하네.” 우 선배는 복원가가 예술가가 아니라 장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가 복원에 대해서 내게 가장 처음 가르쳐 준 것은, 복원가는 머티리얼(meterial)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머니티얼은 직물, 재료, 물질, 원료, 본질적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 운동화가 있어야 집에 갈 텐데 싶어서 L의 어머니가 올 때까지 운동화를 꼭 들고 응급실 한쪽에 서 있었던 마음, 그 마음이 지난 28년 동안 L의 운동화를 버티게 해준 게 아닌가 싶어서.“ (김숨, 『L의 운동화』, 민음사, 2016, 89, 271쪽)

    『L의 운동화』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277쪽에서 1부가 차지하는 분량은 136쪽으로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러나 1부에서는 ‘L의 운동화’에 대한 본격적인 복원 과정이 아니라, 주인공이 복원(“치유”)을 결정하기까지의 복잡한 심리상태가 기술되고 있다. ‘나’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오랜 기간 “망설”(『L의 운동화』, 25쪽 / 본문에서 이 작품을 인용할 경우 쪽수만 표기함)인다. 왜냐하면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작업은 L을 복원하는 작업”이며,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시대의 유품”(25쪽)을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증언”의 현재적 가능성을 복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피해자를 대신할 운동화를 어떻게든 살려”(55쪽)내야 한다는 책임감은 막중하다 못해 부담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사실 ‘이한열’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1987년 6월 9일의 ‘L의 운동화’는 “여전히 내가 모르는 운동화”(126쪽)이다. 이는 김숨 작가의 취재나 자료 조사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문헌 연구와 인터뷰를 통해서는 결코 복원할 수 없는 존재/사건이 바로 이한열(‘L의 운동화’)이라는 역사적 사건(event)인 셈이다. 이 장면에서 ‘L의 운동화’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개인의 기록”(80쪽)인 동시에 상징화된 인격이다. 그러니 어찌 손쉽게 복원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 작품에서 “작업하는 시간보다 지켜보는 시간이, 기다리는 시간이 여전히 더 길”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207쪽) 더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 아니겠는가.

    1부에서의 힘겨운 ‘복원 결정’은, 2부에서 더더욱 어렵고 지난한 ‘복원 과정’으로 이어진다. 주사기와 각종 의료도구의 등장은, 운동화의 복원 과정이 부서지고 찢긴 역사적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자,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고비”(250쪽)를 함께 버텨가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절박한 과정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2부의 핵심 구성은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작업일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부에서는 작업이 잘 된 날과 잘 되지 않은 날(“한 조각도 맞추지 못한 날”, 210쪽)이 꼼꼼하게 기록되는데, 이는 단순히 작업 성과를 리코딩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 주체의 예술적 성취/결과보다 복원의 과정/기록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작업일지가 빼곡하게 차고, 어떤 날은 작업일지에 겨우 한두 줄이 적힐 뿐이다.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김숨의 이러한 서사전략은 이한열(‘L의 운동화’)의 희생과 슬픔을 영웅화하거나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조금씩 그 존재/사건과의 만남에 이르는 여정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L의 운동화』는 존재의 성화(聖化)가 아니라 역사적 대화를 통해 ‘이한열’이라는 사건 그 자체를 존재론적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실천적 히스토리인 셈이다. 영웅서사의 해체와 역사적 대화의 현재성이란, 바로 이런 “마음, 그 마음”의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소개
    문학평론가,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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