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약과 한계 가진 존재
    [종교과 사회] 허상과 실상의 간극
        2018년 04월 04일 09: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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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자유한국당의 대변인이 당원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편파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다”고 했다. 그러자 경찰은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 즉 돼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돼지고, 부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부처라는 무학대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유한국당을 거세게 비판했다. 민중의 지팡이로 자부하던 경찰을 개, 돼지로 비유했으니 화가 날만도 하다 생각된다.

    출처 :경찰인권센터 홈페이지

    아무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을 우리도 종종 하면서 살고 있다. 신발장수와 모자장수가 어느 날 서울 구경을 다녀와서 서울에 대해 얘기하는데, 신발장수는 서울에 가니 어디나 신발가게 천지라고 하고, 모자장수는 어디를 가나 모자가게가 천지라고 하면서 정작 남대문, 동대문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는 말도 있다.

    우리 인간은 사실 모든 걸 다 보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영국의 철학자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인간의 뇌나 신경조직에는 일종의 선별 밸브가 있어서 수많은 감각 대상 중에서 그 밸브를 통해 나온 것만 감지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인간의 눈은 자외선, X선, 적외선 혹은 라디오 파장 같은 무한히 다양한 길이의 파장은 전혀 보지를 못하고 지극히 좁은 범위의 전자 파장만을 본다고 한다. 우리 귀도 일정한 정도 범위의 주파수만 듣지 고주파나 저주파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은 이렇게 생물학적으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으로도 절대로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우리가 어떤 일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부분은 억제되고 마는데, 이는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말, 논리, 사회 규범이라는 삼중의 ‘사회적 필터’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 어느 문화나 사회에 형성된 ‘말’에 따라 거기 속한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맛보는 것 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거기에 해당하는 말이 없는 경험은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는 달짝지근하다, 새콤달콤하다, 간간짭잘하다, 시큼텁텁하다는 등의 미각표현의 말이 발달해서, 우리는 그 맛을 즐기면서 먹지만 그런 말이 없는 나라 사람들은 그런 맛을 전혀 알 수가 없다. 한편, 우리는 겨울에 잠시 오는 눈을 보면서 그저 눈인가 하는데, 일 년 내내 눈과 생활하는 에스키모인 들에게는 눈이 열 가지 종류의 다른 이름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또한 상상이 안되는 것이다.

    둘째, 어느 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논리에 의해서 의식이 좌우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법적 일반 논리학이 통용되는 서양 사회에서는 동양에서 흔히 쓰는 역설의 논리에 담긴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어떤 사물이 이것이든 저것이든, 둘 중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냐냐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다는 ‘도도주의’적 논리는 납득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이다.

    셋째, 한 사회에서 금기시 하는 일은 그 사회 구성원의 의식 속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 전통 사회에서 이혼이나 동성애 같은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럴 경우 대부분의 경우 이혼하고 싶다든지 동성애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의식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각도 못할 일’,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취급되어 의식 밖으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나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제약과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한계성을 깨달은 겸손한 사람이라면 함부로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최고’라는 둥 하면서,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식의 논리에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이나 지각 현상은 이렇게 우리 속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틀 혹은 범주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실재, 실상 그 자체를 그대로 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의 문제에서도 다를 바 없다. 우리의 불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이해하고 접하고 믿고 있는 종교적 진리는 사실 실재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불완전하고 제약된 의식이나 믿음이 그때그때 제멋대로 구축한, 그야말로 허구적인 것에 불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종교인들 대부분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그 좁아터진 의식에 비친 종교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확신하여 거기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인위적으로 구축된 일상적 의식이라는 우물 안 같은 종교에 갇혀 평생 지내는 것은 아닐까? 참 실재의 세계에서는 분리되고 소외된 실낙원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때로는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보아 놀라기도 하고, 더러는 돌멩이를 금덩어리로 착각하여 희희낙락하기도 하면서 자기 종교에 빠져 사는 것이 현대 종교인들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래서 참된 종교는, 이러한 왜곡되기 쉬운 의식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오거나 더 깊고 넓은 의식의 세계로 들어가, 허상이 아닌 실재의 세계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종교가 참된 종교일 것이다. 실재 세계의 다양한 차원들을 맛보고 느끼고 감동할 수 있도록 매일 매일의 ‘realization’(실재화, 현실화, 의식화, 자각, 깨달음)의 과정이 또한 진리의 길, 구도의 길, 참된 종교의 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소개
    거창 씨알평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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