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 항쟁,
    거짓 화해와 강요된 용서에서 탈피하자
    [기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기억투쟁 전개해야
        2018년 04월 03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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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제주 4.3 민중 항쟁과 학살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1947년 3월 1일에서 1954년 9월 21일에 이르기까지, 공식 사망자만 14,032명, 학자 및 시민단체의 조사로는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8만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무장대는 많아야 500명에 지나지 않았고 대다수가 선량한 양민들이었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었다.

    육지는 제주도를 늘 타자화 하였다

    왜 하필 제주인가.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된 이후 육지는 이 섬을 늘 타자화하였다. ‘1만 8천 신들의 고향,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는 삼무(三無)의 섬, 끈끈한 공동체, 해양진취성’의 섬은 육지에 의해 ‘변방, 배제, 수탈과 저항, 빨갱이’의 섬으로 바뀌었다. 조선조의 지배층은 제주도 사람들을 왜인과 같은 적으로 간주하였고 육지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는 해산물의 90% 가까이 수탈하고 군사기지 건설에 강제로 동원하여 대다수 제주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수만 명이 일본으로 탈출하여 저임금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해방을 맞아 7만 명이나 일본에서 귀향했건만 미군정은 이들을 탄압하고 고문하던 일제 경찰과 관료를 그대로 등용하였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를 맞아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경찰이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 참여한 시민에게 총격을 가하여 민간인 6명이 사망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이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시위 주동자 검거에 주력하자, 끈끈한 공동체와 수탈과 저항의 공유를 바탕으로 인민위원회가 잘 조직되어 있었던 제주도민은 총파업으로 맞섰다.

    미군정은 이러한 저항의 배경에 좌익 세력이 존재한다고 판단하고서 책임자를 색출하고 대량 검거하여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에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무장대는 5월 10일에 있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미군정은 제주도를 친 공산주의 지역으로 단정하며 경찰력을 동원한 진압에서 군대를 동원한 토벌로 방향을 바꾸었다. 미군정은 ‘Red Hunt’라는 말에 잘 집약되어 있듯이 무차별로 검거하고 학살을 하였다.

    1948년 미국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한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초토화 작전, 제노사이드의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잠시 사면정책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와 전국 각 형무소의 4.3 관련자들을 학살하였다.

    제주 4.3은 육지의 제주에 대한 변방화, 민족모순과 일제 잔재, 냉전체제와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 미군정의 연이은 실정, 좌익에 대한 배제와 폭력, 5.10 남한 단독정부 수립 선거의 강행, 이승만 정권의 대미종속과 우편향, 서북청년단의 야만적 폭력 등 복합적 원인이 작용하여 빚어낸 민중항쟁이자 제노사이드(집단학살)다.

    제주도에 출동하는 경비대 대원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4·3희생자 약 1만 5천 ~2만 여명의 성명, 성별, 당시 연령, 사망 일시와 장소 등을 기록한 군집비석

    아직도 4.3은 진행 중이다

    학살과 억압은 1954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와 가족들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독재 정권 50여 년 동안 ‘빨갱이 폭도’로 매도당한 채 차별과 배제, 탄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최소한 70년대 말까지는 ‘4·3’이라는 낱말 자체가 금기어였다. 제사의 장에서만 기억이 이어지다가 김석범의 『화산도』(1967∼1997)와 『까마귀의 죽음』(1967), 현기영의 『순이 삼촌』(1978)을 계기로 재현의 폭력에 맞서는 담론들이 서서히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공식 기억(official memory)의 장에는 오르지 못하고 사회기억(social memory)으로만 떠돌다가 존 메릴 교수의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 (박사학위 논문), 김봉현의 『제주도-피의 역사』 등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1988년에 『잠들지 않는 남도-제주도 4·3항쟁의 기록』(온누리) 을 기점으로 이를 다룬 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빨갱이들의 무장폭동론’과 ‘민중항쟁 및 공권력에 의한 양민 학살론’ 사이에 기억 투쟁과 헤게모니 투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되고, 2003년 10월 15일 조사위원회에서 보고서를 확정하였고,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면서 4·3의 진실이 공식 기억의 반열에 올랐다.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제주 4·3평화공원이 세워졌다. 2014년에는 보수 정권인 박근혜 정권이 ‘4.3희생자 추념일’로 명명하고 정부주관으로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하귀리의 영모원(英慕園)처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을 하여 좌익과 우익, 군경과 무장대를 함께 추념하는 화해와 상생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4.3은 아직 진행 중이기에 완료형의 화해와 상생 담론은 섣부르다. ‘제주 4.3. 치유 모델(Jeju 4.3 Model of Healing)’을 세계 분쟁 지역과 갈등 경험 지역의 과거사 극복의 모범적 전범으로 만들어가자는 박명림 식의 주장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당위적이다. 현실과 재현을 동일시한 데서 비롯된 오류다. 명부, 비석, 위령제로 재현된 텍스트들은 화해와 상생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발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의 의미들을 품고 있다.

    제주도민은 자신의 형제와 자식, 부모가 아무 죄 없이 학살당하였음에도 항의하기는커녕, 더 이상의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생존을 위한 반공국민으로 거듭나기’를 행하였다. 그들은 민보단, 향토자위단, 해병대에 입대하고 자진하여 반공대회의 동원에 응하였으며, 자신의 딸을 경찰과 군인 등 우익 인사에게 시집을 보냈다. 심지어 빨갱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위해 다른 지역의 빨갱이까지 죽였다.(양정심) 드러난 발화와 행위만이 아니다. 김대중 정권 이후에 4·3의 진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비밀투표처럼 남에게 드러나지 않은 행위에서조차 보수적이며 반공을 주장하는 자에게 투표하는 성향이 지속되었다.(이성우)

    아직 진상규명조차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고통, 분노와 한 또한 가슴 깊이 남아있다. 그 한의 응어리가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있고 트라우마가 무의식적 억압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피해자들 대다수가 침묵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4.3 때처럼 남한의 정권이 언제든 고문과 구금,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가해자를 비롯한 우익인사들이 이 사건으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성도,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권력과 조직을 이용하여 4.3항쟁을 왜곡하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분단모순이 상존한다.

    무엇보다도 학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두 당사자는 미국과 한국 정부인데, 미국은 사과를 하지 않았으며 수많은 기록들을 은폐하고 있다. 정부의 사과는 노무현 대통령이 행한 것이 유일하다. 거짓화해는 고통의 상처와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할 뿐이다. 강요된 용서와 관용은 모순과 갈등을 은폐하며, 가해자들이 위선의 탈을 쓰게 하고 피해자들에게는 더욱 큰 고통과 상처를 준다. 평화공원의 비석이 백비(白碑)로 남아 비바람을 맞고 있듯이, 4.3 민중항쟁은 아직 이름도 얻지 못한 채 ‘4.3 사건’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명명되고 있다. 평화의 섬은 선전구호일 뿐이고, 강정에는 제주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 수도 있는 군사기지가 들어섰다.

    김상봉 식의 균형담론 또한 위험하다. 물론, 무장대나 제주도민에 의한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에,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4.3사건은 진압이 아니라 토벌이었고, 무장대 500명을 진압하기 위하여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제노사이드였다. 둘째, ‘Red Hunt’라는 말에 잘 집약되어 있듯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제주도민은 언제든 죽여도 되는 짐승처럼 여기고 학살한 것이다. 셋째, 그 결과로 볼 때 사망자 중 10,955명(78.1%)이 토벌대에 의해, 1764명(12.6%)가 무장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조사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9 대 1이상일 것이다. 넷째, 아직도 경우회 등의 우익 조직이 우월한 지위에서 희생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권력이 비대칭인 상황에서 균형을 유지하라는 것은 강자를 편드는 것으로 귀결된다. 섣부른 균형론이나 양비론은 진실을 은폐하고 모순의 지양을 통한 화해를 방해한다.

    회복적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이제 백비를 일으켜 세울 때다. 먼저 이름부터 부여해야 한다. 첫째, 4.3은 투쟁의 주체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화한 민중이다. 둘째, 투쟁의 주제가 국가의 폭력에 맞서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셋째, 투쟁의 주체가 항쟁의 목적과 지향점을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는 자위적 투쟁만이 아니라 단선 저지를 통한 조국의 통일 독립 쟁취, 반미 구국투쟁이라고 명백하고 밝히고 있다. 넷째, 희생자가 수만 명에 이르며 대다수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자다. 다섯째, 이 사건이 이후의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이에 이를 가치중립적인 ‘제주 4.3사건’이 아니라 ‘제주 4.3 민중항쟁’으로 명명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가 행해져야 한다. 가해자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미국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은폐된 기록,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 있는 4.3 항쟁 관련기록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 정부 또한 지속적으로 사과하고 피해자들이 자유롭게 증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관련 법에서 대미(對美) 종속 관계에 이르기까지 구조적 폭력을 제거하고 가해자들에게 법률적,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부여한 후에 회복적 정의를 통하여 용서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공공영역을 형성하고 제주도민이 정치적 주체가 되는 시민위원회 등 시민자치 조직을 구성하여 아래로부터 협치를 통하여 권력을 견제하고 정책을 결정하고 가치를 분배하는 데 참여하는 정치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 여기서 응보적 정의(punitive Justice)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입각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범죄는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아픔이고 문제이므로 범죄를 높은 추상의 평면에서 끌어내려 사람과 관계에 대한 침해와 피해, 인간관계의 훼손행위로 이해하고,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가 잘못을 시정하고 화해와 안전을 촉진하는 해결책을 찾는다.

    이에 ① 피해자의 신고와 고백, ② 피해자 및 공동체 구성원의 피해와 인간관계 손상에 대한 복구 요구, ③ 직접 피해자와 간접적인 피해자와 가해자를 포함하여 모든 관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 상처 입은 것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기와 고통의 공감과 나눔, ④ 가해자의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인정, 뉘우침과 사과, ⑤ 조정자(mediator), 혹은 조정위원회 등에서 조정 및 중재, 가해자에 대한 징벌이나 책임 명시, ⑥ 가해자의 수용 및 책임, ⑦ 피해자의 용서와 화해, ⑧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참여하여 하나가 되는 프로그램의 실시, ⑨ 재발 방지를 위한 성찰과 대안 모색, 개인적인 사유의 성찰과 제도적인 개혁 등 아홉 단계의 조정과 화해 노력을 통해 모두를 위한 정의, 공동체의 화해와 평화를 회복한다.

    “이제 너와 나 손 마주잡고 미쁜 마을을 만들려면”, 거짓 화해와 강요된 용서와 관용에서부터 탈피해야 한다. 우리 모두 주체가 되어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기억투쟁을 전개하면서 회복적 정의를 구현하고 화해와 상생의 공동체를 복원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 강정 군사기지를 해체하고 남북의 평화적 통일에 동참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제주는 진정으로 평화와 상생의 섬이 될 것이며, 원혼들은 평안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18년 국제불교청소년교환캠프(IBYE KOREA 2018)의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3월 16일 제주도 서귀포시 빠레브 호텔에서 ‘집단학살에 대한 성찰과 공동체 복원’을 주제로 제주 4·3 70주년 기념 국제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이도흠의 ‘제주 4.3 민중항쟁에서 폭력의 양상과 공동체 복원 방안’을 요약한 것이다.)

    필자소개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민교협 전 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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