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노동당 당원증을 찢어버린 이유"
        2006년 04월 11일 07:48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나는 사회주의를 일차적으로 기계생산 체제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식 수준에서 요구되는 대응책이며 무산계급의 행복뿐 아니라 미미한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데 적합한 대응책이다.”

    “우리의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두 가지는 사회주의와 평화이지만 우리 시대 가장 힘있는 사람들의 이익에 정면 대치되는 것도 바로 이 두 가지다.”

    "사회주의는 소수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방책"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 1872~1970)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20세기 전반기에 사회주의와 평화를 강조한 가장 정열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러셀의 논리학과 수학 연구는 캠브리지대 교수시절 제자였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후세 언어철학, 분석철학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프레게가 기초한 분석철학은 러셀에 이르러 뼈대를 갖췄고 콰인, 카르납, 에이어 등 후세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러셀은 1872년 5월 18일 영국 남부 그웬트지방 베드포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할아버지 존 러셀은 1846년부터 1852년까지, 1865년부터 1866년까지 두 번 수상을 역임했고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백작으로 봉해졌다. 선거법 개정 등 존 러셀이 실시한 개혁조치는 19세기 영국 민주화의 밑거름이 됐다.

    이런 영향을 받은 러셀의 아버지 앰벌리 자작은 피임, 가족계획, 여성 참정권 부여 등 진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가족의 전통이 러셀의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할머니의 손에 큰 러셀은 열한살 무렵 친형인 프랭크로부터 기하학을 배우고 난 뒤 수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러셀은 이후 1890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3년 동안 수학을 공부한 후 러셀의 관심은 철학으로 옮겨갔다. 독일어에 능통했던 러셀은 로크, 버클리, 흄 등 영국 경험론자들의 철학보다는 칸트, 헤겔 등 독일 관념론자의 철학을 연구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 연구에 관심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이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인 퀘이커 교도 앨리스 스미스와 결혼한 러셀은 미국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2년간 가르친 이후 베를린으로 이주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시 맑스주의를 접한 그는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이를 책으로 펴냈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저작 <독일 사회민주주의>(1896)이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목적, 전술 그리고 맑스, 엥겔스, 라쌀레 등 사상가로부터의 영향 등을 전반적으로 다룬 이 책은 1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럽 정치사 전공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중요한 저작이다.

    그 이후 1910년까지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를 집필하는 작업을 해왔던 러셀은 이 기념비적인 저작을 출간한 이후 35살의 나이에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임됐다.

    지적인 탐구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과정에서도 그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1907년 러셀은 ‘여성참정권을 위한 남성동맹’(Men’s League for Women’s Suffrage)에 가담했고 윔블던 보궐선거에서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여성 참정권 보장”이라는 당시로서는 인기가 없었던 주장을 갖고 선거에 뛰어들어 낙선을 했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11년 선거에서 베드퍼드에서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또 고배를 마셨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러셀은 1차대전이 발발할 무렵부터 사회주의와 평화를 향한 사회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러셀은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표방한 사회주의 조직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고 1차대전이 발발하자 ‘징병거부협회’를 만들어 징병제 도입 반대운동을 벌였다. 또 1차대전 시기 영국의 대표적 반전운동단체인 ‘민주통제연맹’을 결성해 국가의 대외정책을 의회의 통제 하에 둘 것을 주장했다.

    징병제 거부운동 선두

    1916년 의회에서 병역법이 통과되자 18~41세의 모든 남자에게 병역의 의무가 부과됐다. 징병거부협회는 국민들을 상대로 징병거부캠페인을 광범위하게 펼치기 시작했고 러셀은 이 활동을 이유로 케임브리지대 강사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직장을 잃었을 뿐 아니라 투옥되기도 했다. 협회의 기관지 <트리뷰널>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1918년 미군의 파업 파괴행위를 비난하는 글을 쓴 것을 이유로 구속돼 브릭스톤 교도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감옥 안에서 러셀은 <정치적 이상 : 자유로의 길>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이 책에서 러셀은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즘의 선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기 위해 투옥, 망명, 가난을 무릅썼다”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했다.

    1914년에 노동당에 가입한 러셀은 베트남에 대한 1965년 미국의 정책을 지지한 해럴드 윌슨 노동당 정부에 항의하는 뜻에서 당원증을 찢어버릴 때까지 50여년 동안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 와중에 러셀은 두 차례 노동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러셀의 사회주의 사상은 맑스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소련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나타난다. 그는 러시아혁명 발발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노동당을 대표해서 소련을 방문한 후 볼셰비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 노동당 정부의 베트남전 개입 지지 방침에 항의, 당원증을 찢는 러셀.

    그는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곳의 사회주의자들은 설득에 의존해야 하며, 무력은 적들이 비합법적인 무력으로 나올 때에만 사용해야 한다”며 “이런 방법을 쓰면 사회주의자들이 크게 우세할 수 있을 것이므로 결전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문명 파괴라는 심각한 사태로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협동적 소유, 탈중심화, 자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폭력을 배척한 평화주의자 러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앙집권적 사회경제체제에 반대했다. 따라서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협동적 소유, 탈중심화, 자치를 지향하는 동업조합 사회주의(Guild Socialism)에 가까웠다.

    그는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회주의는 “경제적으로 볼 때 적어도 토지와 광물, 자본, 은행, 신용, 무역을 포함한 기본 경제권을 국가가 소유”해야 하며 “정치적인 면에서는 정치권력이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러셀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여가를 고르게 분배할 수 있게 해주고 여성해방을 가능하게 하며 예술의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다. 러셀은 무엇보다 “사회주의를 위한 가장 강력한 논거”는 “전쟁방지”라며 “현대 자본주의가 전쟁의 원인임”을 강조했다.

    “세계는 지금, 술버릇을 고치려 애쓰고 있지만 연신 술을 권하는 친절한 친구들에 둘러싸여 번번히 옛 습관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술꾼과도 같은 상태에 있다. 이 경우, 그 친절한 친구들은 그의 불행한 주벽으로 인해 득을 보는 자들이므로 그가 술버릇을 고치기 위해선 먼저 그 사람들부터 제거해야만 한다.”

    193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이 득세하고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강단에 머무르지 않고 반파시즘, 반전운동을 벌인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1954년 미국이 남태평양 비키니 군도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실시하자 아인슈타인과 함께 핵무기 제조에 반대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하고 과학의 평화적인 이용을 위한 퍼그워시 회의 초대의장을 맡아 활동을 벌였다.

    또 1958년에는 영국의 대표적 반핵운동단체인 핵감축캠페인(CND) 결성을 주도했고 1960년에는 보다 급진적인 1백인위원회를 결성해 시민불복종운동을 벌였다. 이듬해 그의 나이 89세때 러셀은 농성을 벌이다 체포돼 7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1970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러셀은 뛰어난 철학자였을 뿐 아니라 평생동안 사회정치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혁명운동가였다.

    레디앙이 연재하고 있는 <세계의 사회주의자>는 지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주간 <진보정치>에 연재된 같은 제목의 시리즈를 개정·보완한 연재물입니다. <세계의 사회주의자>는 저명한 인사들 가운데 사회주의를 지향한 사람들을 소개함으로써 사회주의가 불온한 게 아니라 인류 역사에 면면히 내려온 친숙한 이념이라는 점을 독자 여러분들께 보여드릴 것입니다. 레디앙은 기존에 소개된 인물들 외에도 새로운 인물을 계속 발굴해 소개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 편집자주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