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이미지를 허망하다고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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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11일 10: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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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깔에도 의미가 있을까? 이 물음은 우리를 칸딘스키와 에이젠쉬쩨인의 논쟁으로 데려간다.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회화의 이론적 토대를 놓은 저서에서 색채를 일종의 기호로 보아 거기에 불변적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 몽타주 미학의 선구자 에이젠쉬쩨인은 변증법적 유물론자답게 색채에 고정된 의미는 없으며, 사회적, 문화적으로 색채에 부여되는 의미는 달라진다고 말했다.

    강금실 보라색 vs 오세훈 초록색

       
     
    ▲강금실 전 법무장관과 오세훈 전 의원(사진=이지폴뉴스, 연합뉴스)
     

    강금실 전 장관이 보라색 이미지와 함께 등장하자, 오세훈 전 의원은 초록색 이미지로 맞서기로 했단다.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 이렇게 색깔이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소통의 매체가 점차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고 있음을 말해준다. 문자문화는 하얀 종이 위에 발라진 검은 잉크의 문화다. 글자의 색채는 문자의 기능과 별 상관없는 비본질적 장식일 뿐이다. 활자는 어디까지나 무채색이다.

    색깔이 선거전의 주요한 무기로 떠오르자, 당장 제기되는 것이 ‘정책 없는 이미지 정치’라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미지에 의존하는 것이 곧 이미지에‘만’ 의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때문에 이런 비판은, 후보들이 아무 정책 없이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승부를 하려 할 때, 그때 내놓아도 늦지 않다. 21세기 영상문화의 시대에 후보들이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니다.

    언론도 참 뻔뻔한 것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정책이 아닌 이미지로 승부하게 만든 것이 자신들이라는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다. 오늘날 사건은 단지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사건이 될 수 없다. 사건은 보도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때문에 정치인들의 모든 행동은 ‘카메라 앞에서의 행동’이 될 수밖에 없다. 과연 언론에서는 그 동안 색깔과 정책 중 어느 쪽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정책보다 이미지 승부 부추긴 언론의 뻔뻔함

    ‘정책’보다 ‘이미지’가 강조되는 데에는 배경이 있다. ‘정책’이라는 것은 활자로 인쇄할 수 있는 텍스트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활자문화의 코드다. 영상문화의 시대에 천연색으로 사유하는 대중에게 흑백으로 씌어진 ‘정책’은 별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대중이 무식한 게 아니다. 그들은 정치권에서 내놓는 공약이 별 차이가 없으며, 설사 있다 한들 그게 지켜지리라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다.

    정치에 ‘색깔’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해방 이후 이 나라 정치를 지배해 온 것은 색깔론이었다. 물론 ‘색깔론’에서 문제되는 것은 진짜 색깔이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관념적 색깔이다. 정치에서 진짜로 색깔이 강력한 상징의 무기로 사용된 것은 아마도 2002년 대통령 선거가 처음일 것이다. 그때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은 노사모의 ‘노란색’ 스카프의 물결이었다.

    2004년 총선 때에는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의 ‘노란색’을 놓고 소유권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원래 노란 색은 민주당의 전통색인데, 열린우리당에서 이를 강탈해 갔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눈에는 상징색의 강탈은 당을 통째로 빼앗긴 사건의 시각적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때 한나라당은 파란색으로 맞섰다. 그때 여야 의원들은 점퍼 색깔로 시각적 대결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당의 실패를 개인의 성공으로 때우는 한국정치의 현주소

    민주노동당 역시 오렌지 빛을 상징색으로 사용하고 있다. 좌파의 상징인 붉은 색에 노란 색을 섞은 것은 아마도 대중이 가진 레드 콤플렉스를 고려한 것일 게다. 오렌지색은 우크라이나 대선의 색깔이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는 ‘오렌지 혁명’이라 부른다. 이미 서구의 정당들은 오래 전부터 색깔로 정체성을 표현해 왔으며, 아마도 이런 추세는 더욱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강금실과 오세훈의 색깔 연출에는 새로운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이들이 사용하는 색깔이 그들이 속한 당의 정체성이 아니라, 후보 개인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노란 색 정당의 후보는 보라색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파란색 정당의 후보는 초록색으로 자신을 연출하기로 했다. 이것은 색채가 이미 정당을 넘어 개인의 이미지 전략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는 글자에서 눈에 뵈지 않는 의미를 읽어내듯이, 색채의 빛나는 표면 속에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층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노란색 정당이 보라색으로 치장하고, 파란색 정당이 초록색으로 변신해야 하는 필요성. 그 속에서 우리는 정당의 실패를 개인의 성공으로 때워야 하는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보게 된다. 누가 이미지를 허망하다고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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