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드 걸의 퇴출!
    [왼쪽에서 본 F1] 중요한 첫걸음
        2018년 03월 29일 11:05 오전

    Print Friendly

    3월 23일, F1 2018시즌이 시작됩니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F1은 새 시즌을 맞아 많은 변화를 보여줄 예정입니다. 기술적인 부분의 변화도 적지 않고, 스포츠로서의 변화도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변화 중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F1 그랑프리의 분위기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그리드 걸의 퇴출’입니다. 2018시즌부터 F1 그랑프리에서 그리드 걸을 볼 수 없다는 소식은 적지 않은 F1 팬에게 충격적인 뉴스였습니다.

    F1 그랑프리에서 그리드 걸은 수십 년 전부터 나름 꼭 필요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리드 걸 대신 ‘그리드 가이’가 배치됐던 2015 모나코 그랑프리처럼 몇 차례 ‘특별한 시도’가 있기도 했지만, 거의 모든 그랑프리에서는 그리드 걸이 배치돼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리드 걸은 레이스를 앞두고 각 드라이버의 깃발을 들고 트랙에 입장해, 각 차량이 출발하는 그리드 앞에 팻말을 들고 위치를 표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레이스가 끝난 뒤에는 우승자와 2위, 3위를 차지한 드라이버가 시상대에 오르는 이른바 포디엄 세레머니에서, 그리드 걸은 시상대 뒤에 줄을 맞춰 선 뒤 축하를 해주는 역할도 맡았었습니다.

    상당히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구시대적인 역할을 여성에게 강요하는 구조였지만, 그리드 걸은 오랫동안 F1 그랑프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리드 걸의 역할이나 존재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많은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F1 관련자와 많은 팬들은 그런 문제 제기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그리드 걸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문제 제기는 더 거세졌고, 2015년 세계 내구레이스 챔피언십(WEC)의 그리드 걸 퇴출 결정이 F1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결국, 2018년 한동안 모터스포츠에서 필수적인 것처럼 여겨졌던 역할을 수행하던 그리드 걸을, 모터스포츠의 최정상이자 상징적인 무대인 F1에서 퇴출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2018시즌부터 F1에서 퇴출되는 그리드 걸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정이지만, 의외로 그리드 걸 퇴출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오랜 전통을 갑자기 없앤다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부터, 그리드 걸의 퇴출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반론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전설적인 F1 드라이버였던 니키 라우다가 바로 이런 주장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라우다는 그리드 걸 퇴출 결정도 결국 남성 수뇌부가 한 것이고, 여성의 F1에서의 지위 상승과 역할 증가 문제는 그리드 걸의 존재와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니키 라우다는 이런 주장과 함께 그리드 걸 퇴출은 어리석은 생각이고, 이 계획을 뒤집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설득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일부에서는 라우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일부 팬들의 반대와 니키 라우다의 주장은 모터스포츠가, 특히 F1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 면에서 얼마나 갈 길이 먼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남성 드라이버의 뒤에 여성 그리드 걸이 병풍처럼 배경 화면을 채우는 것을 보고도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F1 관계자와 팬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 칼럼에서도 한 차례 다뤘던, 중국 그랑프리가 끝난 뒤 우승자 루이스 해밀턴이 그리드 걸의 얼굴에 샴페인을 뿌리는 행동에 대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애초에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길들여진 팬들이 적지 않은데다가, F1이나 모터스포츠가 근본적으로 마초적인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도 영향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최근 국내에서 이른바 ‘미투’의 물결을 통해 단순한 몇몇 남성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다분히 남성 중심적이고 마초적이었던 사회와 조직이 가진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는데, F1이나 모터스포츠 무대는 오히려 한국 사회보다 여성의 입지가 더 좁고 여성이 목소리를 낼만한 여건이 잘 갖춰지지 않은 면도 적지 않습니다. 극도로 자본주의적인 스포츠인 F1은 나름 극도로 보수적이고 종종 수구적인 스포츠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드 걸 퇴출 결정의 충격은 조금 더 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드걸에 대한 샴페인 세례로 논란을 일으켰던 루이스 해밀턴

    이처럼 쉽지 않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다소 갑작스러울 수도 있었던 그리드 걸 퇴출 결정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최근 수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보수적인 팬들이나 관계자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였다면 쉽게 나올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F1의 주인이 다분히 상업적인 미국의 리버티 미디어로 바뀌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결정이기도 했죠.

    그러나, 획기적이면서 바람직한 그리드 걸 퇴출 결정은 작은 한 걸음일 뿐입니다. 니키 라우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리드 걸 퇴출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할 문제가 남아있고, 그리드 걸 퇴출이 완료된 뒤에도 F1과 여성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전히 많기 때문입니다.

    F1은 그리드 걸 퇴출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브랜드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다소 모호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다분히 보수적인 기본 F1 팬층에 주는 충격을 줄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진보적 결정이 되었지만, 상업적인 효과를 염두에 두었을 뿐이지 F1의 여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의도로 해석하긴 어렵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상황 변화를 맞이하느냐에 따라 F1을 지배하는 리버티 미디어의 입장은 충분히 뒤집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F1에서 여성의 입지가 매우 좁다는 문제도 남아있습니다. 69년의 역사 동안 F1 챔피언십 그랑프리에 출전했던 976명의 드라이버 중 여성 드라이버는 단 5명에 불과합니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보더라도 0.51%에 불과한 비율은 단순히 ‘여성 F1 드라이버가 적었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극단적입니다. 게다가 저 다섯 명 중 레이스에서 출발 신호를 받았던 드라이버는 단 두 명뿐이고, 그나마 1993년 이후 4반세기 이상 여성 F1 드라이버의 명맥이 끊겨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드라이버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도 여성의 역할은 제한적입니다. 그나마 몇몇 여성이 엔지니어와 미캐닉으로 F1 무대에서 당당히 일하고 있지만, 비율은 여전히 남성의 1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F1 팀에 소속된 대부분 여성이 팀 빌딩에서 서비스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현실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F1 팀을 이끄는 최고 책임자 위치에 올라 자우버의 팀 수석으로 활약했던 모니샤 칼텐본은 지난해 여름 사직하고 말았습니다. 전반적으로 F1 무대에서 여성의 입지는 여전히 매우 좁고, 최근 F1의 변화를 통해 여성의 입지가 크게 넓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엄청나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그리드 걸의 퇴출은 작지만 중요한 첫걸음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 물리적으로 F1 그랑프리의 중계 화면에 등장하는 여성의 수가 줄어들겠지만, 남성 드라이버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병풍과 같은 역할을 벗어던진 만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F1에서 여성의 입지를 넓히기 위한 노력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퇴출 결정의 충격파가 기존 보수적인 남성 팬들에게 충격파가 큰만큼, F1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더 늘어났다는 것도 긍정적입니다.

    필자소개
    윤재수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