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동교회,
민중선교·민족목회의 합류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 진덕기
    2018년 03월 29일 10: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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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기 목사의 민족운동은 민중목회와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상동교회는 민중선교와 민족목회가 합류한 지점이었습니다. 그는 비참한 민중의 현실은 일제에서 독립을 쟁취할 때 치유가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여 민중을 섬기는 한편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1888년에 설립된 상동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두드러졌습니다. 엠윗청년회와 공옥학교, 상동청년학원을 통하여 안창호, 신채호, 주시경, 구연영, 양기탁, 김구, 이승만, 이동녕, 이동휘, 이준, 이시영, 노백린 등이 민족운동에서 핵심역할을 하여 상동파로 불렸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조약무효 상소문을 올리고 을사5적 암살을 모의하였으며, 1907년에는 밀사로 상동교회 청년회장 이준을 헤이그로 보냅니다. 그해 상동파가 중심이 되어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합니다.

이 민족운동의 중심에 전덕기 목사가 있었습니다.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전덕기는 9세에 부모를 여의고 남대문에서 숯장사를 하던 숙부 집에서 기거하며, 빈민들과 상인들이 많았던 상동에서 살았습니다. 17세 때, 전덕기는 미국 선교사 집을 찾아가 까닭없이 돌을 던져 유리창을 박살내놓고는 대결을 불사하듯 당차게 섰습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나온 선교사의 자상한 얼굴을 보고 당황하였습니다. 스크랜턴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고하였고,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1896년 21세에 그에게 세례받았습니다.

전덕기는 서재필 목사가 세운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고, 엠웟청년회의 핵심회원으로 활동합니다. 그는 열정적인 노방전도는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전염병 등으로 죽어 방치된 주검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주곤 했는데 때로 부패한 시신의 체액 때문에 나막신을 신고 들어가 염을 하였습니다.

1907년에 제6대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전덕기는 고종의 밀서를 구해 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밀사파견을 모의하였고, 주시경 선생을 통하여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으며, YMCA 창립에 동참하고, 공덕교회, 세검정교회, 청파교회 등을 개척하였습니다.

더구나 안창호, 윤치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민족독립을 추진합니다. 일제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인 신민회를 항일민족세력 제거의 첫 대상으로 삼아, 1911년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모의하였다고 ‘105인 사건’을 조작합니다. 전덕기 목사는 윤치호, 이승훈 등과 함께 주모자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악형으로 인한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발전하여 2년 동안 투병하다가 결국 1914년 3월 23일, 39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장례식에 애국지사는 물론 빈민, 병자, 장사꾼, 천민, 기생들까지 몰려와 상여행렬은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전덕기 목사의 영향으로 1919년 3.1혁명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족대표 33인중에 4인 최석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는 상동교회 출신이었습니다. 일제 말, 탄압이 가혹해져 1944년 3월에 교회는 폐쇄되어 일제의 신사참배와 황도정신의 훈련장인 황도문화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덕기 목사는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1885년에 입국한 의사 스크랜턴 목사는 서민적이었고, 빈민들을 치료했던 정동병원이 고종황제에게 ‘시병원’이란 이름까지 하사받았지만, 민중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열악한 남대문 상동으로 이전합니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스크랜턴은 지방으로 다니며 사역하다가 친일파 선교사 해리스 감독과 의견대립으로 선교사직으로 사임하고 성공회의 평신도 신분으로 민중선교를 계속합니다. 한국말로 설교했던 그는 여러 광산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의 친구로 지냈고, 마지막으로 일본 고베에서 개업하였는데 거기서도 억압받던 가난한 조선민중을 위해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복음 4:18-19)”

이 말씀은 스크랜턴 선교사와 전덕기 목사가 사랑했던 성경구절이었고, 1985년부터 펼쳐진 한국 민중교회 운동의 목회자들이 아끼던 말씀이었습니다. 군사정권시절 사회변혁의 동력이 민중에게 있음을 깨달은 목회자들이 노동현장과 빈민지역에서 예수의 해방사건을 재현하고자 민중교회를 세워 민중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지금은 민중교회 운동이 약화되었고 작은교회 운동이 새롭게 민중선교의 맥을 이어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철 담임목사의 안내로 상동교회 사료관을 둘러보았습니다. 많은 사진, 종, 초기 설교단 …. 그 중 전덕기 목사의 묘비석 “故牧師全公德基紀念碑”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목회자였던 그는 경기도 고양군에 묻혔으나, 묘지조차 두려워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고 이 석비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1901년에 건축한 직전교회의 모형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서 목사님은 “이 교회당이 남아 있으면 성지가 되었을 터인데”하고 아쉬워하였습니다. 1974년에 건축한 지금 교회건물은 서울미래유산이기는 하지만, 소중한 역사의 흔적을 사료관에서만 볼 수 있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요즘 태극기가 이상하게 이용되고 있어서 망설여졌지만,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한 상동교회를 마음에 새기며 태극기를 넣어서 상동교회를 촬영하고 교회그림을 그렸습니다.

상동교회(그림=이근복)

필자소개
이근복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을 맡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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