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특색의 비정규직문제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 위해 ②
    2018년 03월 28일 09: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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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표류하는 비정규직 투쟁”

요즘 일부 정규직 교사들과 인천공항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했다고 하여 의론이 분분하다. 사실 이 문제도 따지고 보면 필자가 지난 호에서 지적했던 누구도 전체 전선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문제, 그리고 단위사업장 차원의 정규직화 요구와 전체 제도철폐 요구 간의 괴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 비정규직 투쟁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인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을 상실한 채 각기 부분전투에만 매몰되어지다 보니, 진작 노동진영 내부의 소통과 단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분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일시적이며 부분적인 현상일 뿐, 지금 시기 비정규직 투쟁의 중심 문제라고는 볼 수 없다. 실제 과거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대부분 노동자들은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단결하여야 한다고 대답한다. 많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도 비정규직의 증가는 결국 자신들에게 불리하며, 때문에 비정규직 투쟁을 지원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지난 호에서 필자가 소개하였던 현대자동차의 실례가 성립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현재 전선이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황에서, 투쟁 대상과 방향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내부적 불화가 나타날 수 있다. 때문에 이 같은 문제의 해결은 내부의 분열을 크게 떠들어대는 것보다도, 싸워야 할 대상을 정확히 밝히고 그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가는 일이 현명한 태도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내부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오히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을 과장하면서 결과적으로 그것을 더욱 조장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며칠 전 레디앙에 게재된 한석호씨의 글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는 “총칼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중심부와 주변부로 분단된 한국 노동자계급은 내전을 치렀다”고 과장한다. (한석호, <어떤 놈은 무시 먹고 어떤 놈은 인삼 먹냐>) 그리고 그는 이 같은 노동분단의 책임이 노동운동에도 있다고 하면서 화살을 내부로 돌린다. 필자는 이 같은 과장된 논법은 자칫 비정규직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주의할 사항이라고 본다. 결국 이런 주장은 정규직의 요구 수준을 낮추자는 ‘하향평준화’의 해법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예컨대,

“연소득 상위 10% 안에 드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안의 너희 인삼은 그런대로 먹고살 만하지 않느냐고. 너희 인삼의 임금인상은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고……·그렇게 노동자끼리라도 평등하면 안 되겠냐고. 그 연대로 자본에 맞서면 안 되겠냐고. ”

물론 그의 이러한 질타가 노동계급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현격한 격차를 좁혀서, 궁극적으로는 공동의 적에 맞서는 ‘연대’로 나아가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긴 하다. 하지만 과연 이 같은 ‘하향평준화’를 통해 그가 바라는 연대를 이루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한 자본과 정권의 논리와 너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의 한국의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가 정규직들이 너무 많이 가져간 탓이라고 선전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이처럼 문제를 우리 내부의 탓으로 돌리면서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는 생각에는 깊은 회의가 든다.

그런데 이 같은 한석호씨의 비교적 단순 솔직한 호소보다도, 노동자들의 수양이 덜 되었기 때문에 자기수양부터 거쳐야 한다는 식의 좀 더 심오한 이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장석준씨의 입장이 그러한데, 이 동지의 논리는 좀 간단치가 않기 때문에 약간 구체적인 언급이 필요하다.

그는 대략 한 달 전 레디앙에 발표한 글 <추격전의 구조에서 벗어나야> (레디앙, 2018년2월21일)에서 앞서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에 대해, 그 같은 사건이 “정규직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과 직접 충돌하지 않는데도 반발”했다는 점 때문에 사태가 더욱 심각하다고 진단한다. 이 때문에 그는 “한국 노동계급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조금 거창하게 운을 뗀다.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현재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이 그간 해온 것은 “계급의식이 아니라 추격의식을 다지”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간의 87년 대투쟁 이후 수행해온 임금인상 투쟁을 통해 키운 것은 계급의식이 아닌 ‘추격의식’이라는 것이며. 노동운동을 포함한 한국사회에서 “경제성장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부와 권력을 늘려 가는 부유층을 따라 잡으려는 전 사회적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같은 ‘추격의식’을 버리기 위한 ‘노동계급의 자기 치유’ 라고 한다.

이렇듯 그 역시 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초점을 내부로 돌린다는 점에서 앞서의 한석호씨와 입장이 비슷하다. 그는 여기서 한술 더 뜨는데, 즉 이런 자기 치유를 통해 병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가 세상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일종의 ‘윤리’적 대안과 새로운 변혁전략까지를 모두 제시한 셈이 된다.

필자가 보기엔 장석준씨의 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안은 뭔가 심오한 것 같지만, 그러나 문제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구조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실상은 현상적 수준의 인식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추격의식’이니 ‘자기 치유’니 하는 심리학적 내지는 ‘윤리’적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에 기초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간 것은 조금 황당한 느낌을 준다.

‘추격전’이라니? 도대체 지금 노동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부유층을 따라 잡기 위한 노동자들의 추격전이란 말인가? 최저임금의 선상에서 허덕이는 대다수 비정규직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 정규직들이 이런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가? 사실 후자가 ‘기본급’만 가지고 보면 최저임금에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귀족노조라고 욕먹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바로 그러한데, 수많은 잔업과 특근을 거친 후라야 비로소 그들은 사무직 관리 층에 준하는 수준의 연봉을 받는다. 또 그들이 대부분 경력 20~30년차로 평균연령이 40대 중반 이상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그들이 받는 연봉은 그리 지나치게 높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 대가로 그들이 지불하는 것은 자신들의 소중한 여가시간의 박탈과 고귀한 생명의 단축이 아닌가? (이범연,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레디앙) 따라서 그것은 여전히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투쟁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도 추격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장석준씨가 제시한 대안을 보자면, 그는 ‘사회연대’를 달성하는 방법이 이렇듯 노동자들의 ‘자기 치유’가 먼저 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앞서 한석호씨와 마찬가지로 ‘자기 치유’ 즉 초점을 내부에 맞추는 것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연대를 달성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 노동자끼리의 연대가 잘 안 되고 상호관계가 왜곡되고 깨지게 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전반적으로 투쟁이 잘 안 되고 내부 상황이 어려운 때일수록 잘 나타난다. 특히 전선이 혼란스런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적의 실체조차 모호할 때에 이 같은 내부분열이 출현한다. 지금 노동진영 일각에서의 분열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불과하며,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일은 시선을 내부로 돌리기보다 누가 적인지를 분명히 밝혀내는 일이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학자들과 노동진영 내에서는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원인으로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지목하였다. 비정규직문제는 전 세계를 휩쓰는 신자유주의적 현상의 하나이기 때문에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도 그 일부라는 것이다. 이렇듯 일반적으로만 취급되었기 때문에 한국 비정규직 문제의 특수성은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적은 이 같은 신자유주의를 방패막이로 삼아 자신을 은폐하는데 성공하였다.

2017년 10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전국노동자대회’(사진=노동자연대)

신자유주의가 비정규직 문제의 원흉인가?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살펴볼 경우 전 세계를 통틀어 비정규직 문제가 한국만큼 심각한 사회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한국에 있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에 속하며(2004년 현재, 약56%), 또 제조업과 유통·서비스 및 공공부문을 막론하고 전 업종과 부문에 걸쳐 비정규직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특히 전통적인 제조업분야라 할 수 있는 자동차·조선·철강반도체 등에서는 ‘원-하청’ 관계의 탈을 쓰고 불법파견이 이루어지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원-하청 관계는 무엇이 본래의 정상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규직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것인지 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변질되고 있다.

또 처우에 있어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난다.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은 신분상의 보장이 잘 되지 않으며, 언제든지 쉽게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일단 해고된 후에는 사회 안전판의 부실로 인해 사회적으로 거의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가 없다. 또 양자는 동일노동을 하더라도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에 비해 절반 내지 심지어는 1/3 이하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일찍이 노동운동의 최대 현안문제가 되었으며, 전 사회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당연히 이와 관련된 투쟁이 IMF 위기 이후 그간 한국사회에서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로부터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긴장의 수위가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한국사회 전반의 긴장과 불안을 초래하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예컨대, 지난 해 한국 IMF 위기 발발 20주년을 맞이하여 경제전문가들이 진단한 앞으로 예상되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인으로 성장동력 쇠퇴, 심각한 가계부채, 그리고 ‘사회적 양극화’가 꼽혔다. 그중 사회적 양극화는 사회적 긴장도를 높이는 주범으로, 필자가 보기엔 그 상당 부분이 비정규직 문제로 인한 바가 크다. 또 최근 열풍처럼 불고 있는 ‘미투’ 운동의 배경에도 비정규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직장 내 커다란 신분 격차를 낳는 비정규직의 범람이, 한국에서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를 다른 자본주의 사회보다 훨씬 크고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비정규직 문제의 실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유의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사회에만 특유한 것으로써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간 신자유주의론의 중대한 오류는 이 점을 간과해 왔다는 점이다. 예컨대,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일본과 같이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비록 최근 들어 과거보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얼마간 진척되었다고는 하나, 이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가 한국만큼 심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우선 이들 나라는 국가가 나서 사회적 안정을 해치지 않는 선상에서 노동시장의 유연성 정도를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 이들 국가들에 있어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비정규직 비중은 한국에 비해 훨씬 낮다. 아래 표1을 보면 호주와 스페인 두 나라를 제외하면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은 20% 미만이며, 대체로 10% 언저리에 있는 국가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유독 한국만이 50%를 넘어선다.

서구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한국만큼 심각하게 사회문제화 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서구의 경우 신자유주의 하에서 과거에 비해 얼마간 후퇴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존의 ‘복지국가’ 틀이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 유연성’의 도입에 따른 노자 간의 갈등을 이 같은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상당부분 흡수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사회가 받는 압력을 크게 낮출 수가 있다. 이 점은 사회 안전판의 부재로 인해 한 번 비정규직이 되면 거의 사회 막장으로 몰리게 되는 한국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보다도 아직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다른 개발도상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비정규직 문제가 신자유주의 일반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 지구적 현상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보다 못사는 사회에서도 충분히 사회이슈화한 비정규직문제를 우리는 접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갖가지 시위와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동남아나 남미 국가들에서, 정작 비정규직 문제로 인한 사회소요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우리는 별반 접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들은 바로 아직 ‘산업화의 미비’로 말미암아 비정규직 문제가 전체 사회문제로 전화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에선 농업인구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때문에 절대 다수의 국민이 한국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크게 나누어지지 못한다. 비정규직 문제의 전면화는 한국처럼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제가 일차적으로 완수된 국가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 볼 때도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이다.

이하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서구와 한국 사회의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소개하도록 하자. 우리는 이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의 한국적 특수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확산을 억제하는 서구사회, 조장하는 한국

우선 서구 선진국과 한국은 고용에 있어 비정규직을 도입하는 동기부터가 다르다. 한국도 원래는 비정규직이 법률상으로는 ‘일시적’ 혹은 ‘전문적’ 수요에 대처하기 위한 제한된 목적으로만 사용되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들은 실제로는 인건비의 절감이나 인력조종의 용이함 등을 이유로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는 곧 한국의 비정규직이 산업구조의 개편에 따른 요구나 노동시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목적보다도, 기업의 단기적인 이윤극대화를 위해서 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비교할 때 선진국의 경우는 ‘경제의 지식화’에 따른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비정규직을 이용하는 중요한 이유로 손꼽힌다. 이에 따라 이들 나라에선 일시적 업무를 위한 채용이나 전문적 기술의 이용 등에 있어서의 비정규직 비중이 높은 편이다.

이 같은 양쪽의 동기와 배경의 차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형식에 있어서도 잘 나타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크게 보아 ‘비자발적’이냐 ‘자발적’이냐 둘로 나누어질 수 있다. 전자는 정규직에 취업하기를 원하지만 정규직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에 취업하고 있는 노동자를 뜻하며, 후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스스로 정규직에 취업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을 지칭한다. 예컨대 이들은 학생·가정주부·연금생활자 등 취업 외의 다른 주된 일이 있어 정규직에 취업하기를 원치 않지만, 부업 형태로 소득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전문직 등의 프리랜서로 일정한 직장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선진국에서는 이와 같은 자발적 형태의 비정규직이 다수임에 비해, 한국의 비정규직은 많은 부분 비자발적 이유로 인한 비정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국가가 취하는 정책과 태도에 있어서도 서구와 한국은 큰 차이가 있다. 서구 국가들은 비정규직의 지나친 확산이 노자관계와 사회 안정을 해치는 위협적인 요소로 바라본다. 따라서 이들은 이를 가급적 ‘꼭 필요한’ 영역 내에서만 허용하고 가능한 억제하려는 정책을 취한다. 이에 비해 한국의 역대 정권들은 자본의 편익을 최대한 반영하는 입장에서 비정규직의 사회적 확산을 억제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에는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 채용을 솔선수범하면서 자본을 독려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이어서 구체적 법률조항을 통해 서구와 한국의 비정규직제도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이하는 윤진호 외 3인,<비정규노동자와 노동조합>,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참조함)

먼저 한국의 비정규직과 관련한 허술한 법체계는 ‘취업규칙‘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한국에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보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근로계약서’ 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행 근기법 제24조 ‘근로조건의 명시’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조건을 명시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여 이를 노동자에게 교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이 단순히 노력의무에 그치고 있어 현실에서는 준수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처럼 근로계약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음으로써 “취업하고 보니 비정규직이었다.”는 웃지 못 할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근로계약서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음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많은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데, 예컨대 계약만료 이전에 해고되는 경우가 많다. 또 나중에 법정투쟁에 가더라도 근거 자료의 미흡으로 인해 패소를 당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한국의 통치계급이 고의로 ‘문서계약’ 상의 허점을 방치함으로써, 한국 비정규직 관련 법체계의 허점을 용인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와 비교할 때 프랑스와 독일 등 서구 국가들은 서면계약을 엄격하게 강제하며, 만약 서면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정규고용으로 간주한다.

이처럼 취업의 첫발부터 불리함을 감수케 만드는 한국의 법조항은, 이제 그 구체적인 고용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더욱 많은 비정규직의 남용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기간제 고용’과 관련한 것인데, ‘기간제 고용’의 증가는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행 법조항은 기간제고용을 사실상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1년 이하의 단기근로계약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약이 없으며, 사용자가 1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의 근로계약기간을 얼마든지 설정할 수 있다. 특히 대법원의 판례변경을 통하여 1년 이하의 단기계약은 물론이고 1년 이상의 비교적 장기근로계약도 유효해졌으며, 이로써 기간을 정한 근로계약을 거의 제한 없이 허용하고 있다.(한국 KDK사건, 대법원 1996.8.29.)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실에선 근로계약이 만료된 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동적으로 연장”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사실은 상용직과 다름없는 노동자들이지만, 사용자측이 임금 및 복지혜택을 절감하기 위해서 정규직원이 채용되어야 할 자리에 임시직 노동자나 단시간 노동자로 채용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비교할 때 서구 국가들은 임시직 고용을 상당히 엄격히 제한한다. 독일의 경우 독일 연방노동법원은 기간설정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경우에는 기간설정을 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만일 그러한 근거 없이 기간을 설정한 경우에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이 성립된다고 보며, 또 유기근로계약이 반복 갱신될 경우에도 이를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으로 간주한다. 프랑스의 경우 ‘기업의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업무’를 위한 고용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하여 기간을 정한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그것을 비정규직 고용의 규제에 대한 일반원칙으로 삼고 있다. 특히 만약 계약 종료 시에 기간이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이 체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고용주는 비정규직 고용자에게 ‘고용종료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사용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이익만큼, 그 대가인 고용불안정에 대한 보상의 의무를 분담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한국처럼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아무런 보상이나 보호대책 없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길거리에 내던져지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사업주들은 함부로 비정규직제도를 악용하지 못한다.

끝으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문제에 대해 비교해보도록 하자. 한국은 형식상으로는 고용형태가 다름을 이유로 한 차별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동일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을 지급 받을 권리에 대해 단순히 사용주의 노력의무에 그치게 할 뿐, 비정규직 근로의 보호에 있어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균등대우’, ‘차별금지’ 원칙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다. 또 위반 시 벌칙규정이 존재하지 않아 이 같은 법조항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이는 프랑스와 독일이 ‘차별대우금지와 균등대우’ 원칙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과 대조가 된다. 독일은 단시간근로자에 관하여 시간급 환산으로 통상근로자의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협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임금을 비롯해서 하기휴가, 기업 내 복지시설 이용 등과 관련하여 정규직 노동자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도록 명문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서구와 한국이 비정규직과 관련한 법제상의 취지와 내용에 있어 크게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서구는 한국과 달리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을 보장하고 비정규직 사용을 가능한 억제하고자 하는 취지를 기본적으로 간직하고 있음에 비해. 한국은 반대로 비정규직의 고용불안정과 비정규직의 확산을 촉진하는 방향으로의 지향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사례는 주로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를 중심으로 하였다. 하지만 다른 서유럽 국가들도 유럽연합이라는 큰 시장을 공유하며, 또 역사적 경험이 비슷함으로 인해 대체로 위의 두 나라와 사정이 비슷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의 본거지인 미국이 다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데, 여기서 얼마간 미국 사례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 (이하 조정호, <미국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한국노동연구원 참조함)

미국은 1999년 현재 약 30%의 노동력이 비정규 노동자에 속한다고 보인다. 이는 서구 선진국 중에서도 비중이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하지만, 여기에는 미국 고용기준 분류상 1년 미만 근무 예정인 독립사업자(6.7%)와 자영업자 (5.1%)도 포함되어 있다. 만약 이들을 제외하게 되면 미국 역시 전체적으로는 20%선을 크게 넘지는 않는다. 미국에선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도입되고 있는 기간제근로, 파트타임근로, 파견근로 등 각각의 유형별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령이 별도로 제정되어 있지는 않다. 이 때문에 고용주로서는 각종 비용 절감을 위해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판례법을 중심으로 일부 기업들의 비정규직 남용형태에 제동이 걸리고 있음을 주시하여야 한다. 특히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집단소송제’에 의해 뒷받침되는 미국 판례법의 효과는 노동법의 실효성을 담보하는 효과적인 제도적 장치로 손꼽힌다.

1991년에 개정된 민권법 제7편은 종업원이 성,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국을 이유로 하여 의도적이나 악의적인 차별을 당한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징벌적 손해배상청구가 집단소송의 형태로 이루어질 경우에는 그 배상액은 차별피해자 수만큼 늘어난다. 따라서 징벌적 손해배상청구와 더불어 집단소송제의 도입은 미국에 있어 각종 차별을 예방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실례로 1992년에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사내 비정규직 고용과 관련한 문제로 소송이 걸렸는데, 원래 소송을 제기한 근로자는 8명뿐이었다. 하지만 2000년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나올 무렵에는 그 판결의 효력이 회사에 근무하던 3만여 명에 이르는 종업원 자격을 갖춘 독립사업자와 임시직 파견근로자에게까지 미치게 됨으로써, 결국 회사는 집단소송자에게 총 97백만 달러를 지급하여만 하였다.

위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원조 격인 미국 역시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지나친 사회적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나름대로의 기본 장치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특수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간 걸핏하면 신자유주의 탓으로 문제를 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같은 비정규직 문제의 한국적 ‘특수성’이 은폐되어 왔으며, 마치 전 세계에 공통된 자본주의 일반의 문제로만 치부되어져 왔다.

만약 이처럼 비정규직 문제가 전 지구상의 일반적인 문제일 뿐이라면, 우리에겐 별 다른 방도가 없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철폐시키든지, 아니면 이 같은 비정규직 문제를 일으킨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면서 다시 과거의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복지국가’ 모델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실제 소위 진보학자들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과 한국의 사민주의자들은 후자의 주장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투쟁대상이 ‘추상적’이고 막연하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 이처럼 모호한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반드시 방향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 단위사업장 차원의 ‘정규직화’ 요구 정도로 개량화되면서 지리멸렬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이 같은 결과가 상당정도 나타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고의든 아니든 ‘신자유주의 탓’의 최대 공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같은 주장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이 사실상 사라져버린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필자소개
과거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으며 사노맹 사건으로 3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 사회를 연구할 목적으로 16년간 중국 유학생활을 보냈다. 중국인민대학과 상해재경대학에서 각각 금융(학사)과 재정(석사)을 전공했고 최종적으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에서 레닌의 정치신문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7년 8월 귀국하여 울산에 정착해 현재 울산 평등사회노동교육원에서 교육강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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